스튜디오 히치 오피스에서 만난 박희찬 소장. 수많은 프로젝트 모형과 목업으로 가득한 사무실에서 직접 만들고 테스트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어느 건축가가 말했다. 연필이나 컴퓨터로 도면을 그릴 때 건축가는 공간이 아니라 벽이나 문·창문 등 공간의 경계를 그리는데, 그러다 보면 자신마저도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 공간이라는 사실을 잊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건축가는 가장 유형의 것을 만들지만 결국 그것으로 관장해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이라는 의미다. 스튜디오 히치는 그 무형의 공간에 집중할 줄 안다. “비례가 완벽한 파사드라든가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눈길을 끄는 이미지를 만드는 건축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저희가 설계한 공간을 어떻게 경험하고 반응하는지가 훨씬 중요해요. 피상적 오브제로서가 아니라 ‘어떤 경험을 줄 것인지, 그러려면 그 안에서 어떤 행위가 일어나야 하는지’를 가장 고민합니다.” 경험에 집중하는 스튜디오 히치의 일은 전통적 의미의 건축물을 짓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바퀴를 달아 움직이는 가구와 잠망경 같은 장치(베니스 비엔날레)를 설치하거나 미술관에 공간을 탐험하는 기계(리추얼 머신)를 세우고, 건물 지붕을 커다란 게임 머신(서울 어반 핀볼 머신)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박희찬 소장은 그러한 작업을 건축적 장치(architectural machine)라 표현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그것을 만드는 일에도 직접 참여한다.“예전에는 건축가가 석공이고 목수이던 시절이 있었잖아요. 산업이 분화하면서 건축가가 그림만 그리고 정작 디자인한 공간이 생산 과정에서는 배제되는 것을 봤어요. 저희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가장 근본적인 과정에 관심을 둡니다. 건축가는 제조 과정 안에서도 분명히 역할을 해야 해요. 예전처럼 목수가 되어 나무를 깎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대로 코디네이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할 때 주도권을 잃지 않고 생각한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건축가를 뜻하는 단어 architects는 고대 그리스어 arkhitekton에서 유래했다. 우두머리를 뜻하는 archi와 기술자, 목수, 제작공을 뜻하는 tekton이 결합한 단어다. 이는 건축가가 모든 과정을 관리하는 사람이자 만드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스튜디오 히치는 직접 만들고 테스트하며 스튜디오의 감각과 주도권을 지킨다. 그들의 프로젝트는 건축물의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지만, 오히려 건축가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박희찬
서울과 런던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일했다. 2018년 서울에 돌아와 스튜디오 히치를 설립한 후 건축, 산업디자인, 패브리케이션, 디지털 인터랙션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건축적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산양양조장, 서울 어반 핀볼 머신이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젊은 모색 2023>, 2025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 한국관 작가로 참여했다. 2020년 한국건축가협회상, 2022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고, 2023년 Architectural Review의 Emerging Architects 후보에 올랐다. studioheech.com
유기장 전수관(2025)
국가무형유산 유기장 이봉주 선생의 방짜 유기 작품을 전시하는 방짜 유기 박물관. ‘건물 속 건물’을 콘셉트로 창고, 아카이브로 사용해온 기존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안에 지역의 흙을 다져 만든 독립된 건물을 새롭게 세웠다. 방문객은 기존 건물과 새로 들어선 흙다짐 건물 사이를 오가며 작품을 경험한다. 흙과 나무, 쇠 등 지극히 근본적인 재료로만 만든 이 전시 공간은 이봉주 선생의 방짜 유기 제작 과정을 은유한다. 그와 협업해 만든 방짜 유기 조명과 손잡이, 가구와 집기도 건물의 일부로 존재한다.
나무의 시간(Time for Trees), 베니스 비엔날레 2025 한국관(2025)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건립 30주년을 기념하며 이곳에 원래 존재해온 나무와 새로 만든 건축물, 즉 자연과 건축물의 경계를 탐험하는 작업이다. ‘그림자 감지 장치(A Shadow Caster)’ ‘자르디니 건축 여행자들(Giardini Travelers)’ ‘엘리베이티드 게이즈 1995Elevated Gaze 1995’라 이름 붙인 연속된 공간 장치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한국관 주변 풍경을 공감각적으로 탐지하며 건축물과 나무가 함께해온 시간을 마주하게 한다. 한국관이 자르디니 공원 내에 존재하는 방식은 주변 나무와 건축물을 동등하게 간주한 결과였다. ‘나무의 시간’은 이 특별한 관계를 다시 읽어내고 예찬한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순간들(2024)
2000년부터 2024년까지 매년 영국 런던의 하이드파크에 들어선 23개의 서펜타인 파빌리온을 한자리에 모아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 설계했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임시 공공장소인 서펜타인 파빌리온을 살펴보며 도시 속 공공장소의 가능성과 의미를 나누고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시작했다. 이벤트를 위해 임시로 짓는 파빌리온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막marquee’이 있다. 그 의미를 좇아 거대하면서도 가벼운 농업용 텐트를 비움홀에 세워 파빌리온의 의미와 가치를 상기했다.
“건축이 피상적 오브제로서가 아니라 ‘어떤 경험을 줄 것인지, 그러려면 그 안에서 어떤 행위가 일어나야 하는지’를 가장 고민합니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나무의 시간’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전시했습니다. 이번 전시는 한국관 건립 30주년을 맞아 한국관이라는 장소 자체를 주제로 기획했다고요.
한국관은 여러 면에서 나머지 국가관과는 다른 조건에서 탄생했어요. 공원 내의 나무는 한 그루도 베어서는 안 되고, 주변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조건으로 지은 임시 건물이었죠. 그 결과 투명하게 외부와 연결된 지금의 모습으로 탄생했고, 전시 또한 늘 시간과 주변 공간 안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같은 작품도 아침에 볼 때와 저녁에 볼 때, 계절마다 다르게 경험할 수 있죠.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화이트 큐브 형식의 다른 국가관과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건물 안팎이 연결되고 주변과 관계 맺어온 한국 건축의 본질과도 닮은 부분이 있죠.
이번 전시에서 그 특징을 감각하는 경험을 제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무의 시간’이라는 제목을 짓고, 건축물과 늘 동등하게 공존해온 나무, 즉 자연환경을 바라보는 작품을 준비했습니다. ‘그림자 감지 장치’는 가벼운 패브릭 스크린에 맺히는 주변 나무 그림자의 패턴을 바라보고, 건물 바깥에 잠망경을 설치한 ‘엘리베이티드 게이즈 1955’를 통해 사람의 시야에서는 확인할 수 없던 건물과 외부 환경의 경계, 건물과 나무가 만드는 풍경을 소리와 함께 감상할 수 있어요. ‘자르디니 건축 여행자들’은 아카이브 영상을 보는 벤치였다가 더 높은 시야에서 작품을 볼 수 있게 사다리가 되고, 작은 공연이 열리는 무대가 되기도 하는 모듈러 트러스 장치예요. ‘자르디니의 건축 여행자들’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이 벤치가 한국에 있다가 비행기에 실려와 베니스에서 움직이며 작품을 보는 우리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해서였어요. 이런 작품들이 모인 덕분에 바쁘게 전시를 보고 떠나는 대부분의 국가관과 달리, 한국관에서만큼은 사람들이 머물면서 작품과 풍경을 보고 쉬어가는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포스리하우스(2023)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신다. - 시편 147장 3절. 제주 중문성당의 언덕 서쪽에 위치한 포스리하우스는 성당 사무실, 성물방, 신자들과 순례자를 위한 공공 화장실을 제공하고 제주 4.3사건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계획됐다. 무채색 시멘트 타일로 마감해 하나의 덩어리로 읽히는 파사드 사이로 김무열 작가가 제주 4.3사건을 기억하는 뜻을 담아 작업한 동백꽃 빛깔 타일이 안팎을 연결한다. 방문객은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창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고, 서측 개구부의 숨은 외부 정원으로 나오면 제주 돌담과 소나무 사이로 넓게 펼쳐진 중문의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작품에서 느껴지듯 스튜디오 히치의 작업은 스펙트럼이 다양합니다. 건축물에만 머물러 있지 않아요.
한국에서 처음 사무실을 개소했을 때 일이 없었어요. 처음에는 공모전에 응모하거나 규모 검토 같은 일을 하기도 했는데, 점차 그 시간에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거나, 재료를 실험하면서 우리만의 아이디어와 개성을 발전시키는 작업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렇게 작업하면서 여러 기회가 생겼고,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젊은 모색 2023〉에서 리추얼 머신을 선보이면서 저희의 색을 알리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왜 건축 안 하고 그런 작업을 해?”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그 이후에는 “건축가니까 이런 작업도 하는 거구나”라고 바뀌었어요.
프로젝트를 할 때 만드는 과정에 굉장히 집중해요. 한국 전통 건축의 공예적 정신과 기법, 현대 공학 기술을 결합하는 시도를 활발히 하고 자재 개발에도 적극적입니다.
일단 잘 만드는 것에 대한 욕심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서울의 흐름을 가장 잘 대변하고,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지점이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 존재하는 기술과 기법으로 어떻게 동시대에 맞는 건축물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특히 재료의 경우에는 저희가 원하는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소재가 있다면 건축적으로 기성 재료로 만든 건물과 다른 가치를 표현할 수 있고, 건축주는 특별한 걸 갖게 돼요. 그래서 프로젝트를 할 때 어떤 소재가 있으면 좋겠는데 만약 없다면 우리가 한번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작업합니다. 예전에는 전부 손으로 만들던 것을 디지털 패브리케이션 같은 오늘날 기술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연구하기도 하고요.
서초동 글라스 하우스(2023)
30년 전 이 집을 지은 노부부와 출가한 자녀의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해 돌아와 세 가구가 거주하는 주택으로 고친 프로젝트. 반투명한 유리블록은 가족의 역사를 간직한 기존 건물의 벽돌 외벽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다. 벽돌로 만든 구조를 보강하기 위해 세운 철제 구조체는 흰색 페인트로 마감하고 그 모습을 정직하게 노출했다. 입구와 복도에 반복해 사용한 색색깔 타일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광을 받으며 다른 빛깔로 반사되는데, 이는 세 가족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은유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체성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기는 언제였나요?
영국의 홉킨스 아키텍츠에서 일했는데, 영국 건축계에서 건축가 마이클 홉킨스의 작업을 정의하는 단어가 영국적 감성(English Sensibility)이었어요. 하이테크 건축을 하는 사무실인데도 영국적이라 표현할 수 있는 건 그 하이테크를 영국 여러 지역의 특성과 공법, 재료, 그리고 역사적 맥락과 전통을 적용해 구현하기 때문이었어요. 그때의 경험을 계기로 스튜디오 히치도 지극히 현대적인 작업을 하지만 동시에 내가 태어나고 자란 장소에 잘 맞는 건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더 열심히 고민하게 됐습니다.
카페 엔지니어링 클럽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무소와 카페를 함께 운영하며 발견한 의외의 장점이 있다면요.
좋은 점은 매일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에요. 이곳은 이곳대로 좋은 커피를 만드는 장소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히치도 그렇지만 엔지니어링 클럽도 커피에서만큼은 엄격했으면 좋겠거든요. 그리고 건축가와 바리스타의 일하는 방식이나 서로 다른 패턴을 경험해보는 것은 건축가로서 더 다양한 시각을 지닐 수 있게 도와줍니다. 저는 건축을 정말 사랑하지만, 한편으로는 건축에만 매몰되지 않고 주변을 살펴보고 싶어요. 엔지니어링 클럽을 통해 많은 친구와 동료를 만나고, 다양한 사람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산양양조장(2021)
1944년 산양 합동 주조장으로 건립되어 문경의 근현대사를 함께해온 산양양조장이 지역사회를 위한 복합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80여 년 세월을 견뎌온 양조장이 간직한 건축적 가치를 극대화하고, 지역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으로 고쳤다. 기존 구조체와 외벽, 공간에 대한 연구와 아카이빙을 통해 섬세하게 전략을 수립하고, 기존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다시 짓는 것이 아니라, 남길 수 있는 부분을 우선 고려하며 기존 구조체와 마감재를 최대한 유지하는 방향으로 복원과 재구축 작업을 진행했다.
스튜디오 히치의 앞으로 10년, 20년은 어땠으면 하나요?
20년 뒤까지 스튜디오 히치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웃음) 물론 건축을 무척 좋아하지만,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시기에 정말 잘하고 싶고, 다른 건축가보다 좋은 걸 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그때는 제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뭔가를 또 찾고 싶어요. 참고로 저는 자전거도, 디저트도, 요리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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