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을 때까지 아방가르드”라는 말로 예술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 하종현. 그 뒤로 보이는 작품이 ‘접합’ 연작이다. 물감을 성긴 마대 뒤에서 밀어내면 하나의 물질이 다른 물질의 틈 사이로 자연스럽게 흘러나간다. 급기야 작품 표면에 수직 형태의, 폭포나 빗줄기 같은 에너지가 생겨난다. 사진 전병철,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주역>에서 ‘겨울’을 나타내는 괘는 다섯 개의 음효陰爻 밑에 한 개의 양효陽爻가 막 올라오는 형상이다. 찬 얼음장 밑에도 봄의 기척은 기어코 숨어 있다는 말이다. 겨울 가면 봄이 오고, 해가 뜨면 달이 지며, 어리다가 젊다가 늙는 모든 대립과 순환이 본래 한 몸이라는 이치를 하종현의 작업실 앞 나목에서 본다. 아흔 번째 봄을 기다리는 화가, 그의 가장 밑바닥에 꿈틀거리는 양의 효. 그걸 엿볼 수 있을까? 찬 바람이 그저 옷 솔기로 파고들던 3월 초의 어느 날. 이웃한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지금 하종현의 개인전을 열고 있다. 아트선재센터에서는 그의 초기 작업인 1959년부터 1975년까지의 작품을 전시 중이다. 국제갤러리에서는 이제 일반 명사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하종현의 ‘접합’’ 연작, 특히 2009년부터 최근까지의 ‘접합’ ‘이후 접합’ 연작을 전시하고 있다. 사실 이 두 전시는 그가 자기 전통과 어떻게 싸웠는가, 그 사회와 어떻게 싸웠는가, 자기 자신과 어떻게 싸웠는가의 기록이다. 하종현이라는 사람의 기록이다.
아무것도 돌아보지 말고 작업에만 몰두하자는 마음으로 집터도 지는 해만 본다는 의미의 서쪽으로 잡았다는 일산의 작업실. 인기척은 없지만 작품과 공기의 오라만으로 가득 차 보이는 공간이다. 사진에 주로 보이는 작품들은 ‘접합’ 연작이다.
죽거나 살거나 미술의 세계에서
하종현, 1935년 경남 산청에서 아홉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출생 후 얼마 되지 않아 온 가족이 도일했다. 일본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광복을 맞았고, 가족은 귀국을 택했다. 귀국선이 난파되면서 할머니와 여동생을 잃었다. 거지가 다 되어 한국에 돌아왔으나 강인한 어머니 덕에 꿋꿋이 성장했다. 사범학교에 가라는 어머니를 설득해 스무 살에 홍익대 회화과에 들어갔다. 홍익대에서 조교, 강사, 교수로, 나중에는 미대 학장으로 정년 퇴임했다. 교육자로서뿐만 아니라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을 맡을 정도로 행정가의 능력도 뛰어났다. 이것이 간추린 그의 이력이다.
“죽거나 살거나 그 미술의 세계에서 되는 거였다. 어렵더라도 그 미술과 더불어서 한 발짝도 바깥으로 안 나오고서 살았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체험인지 모른다.”(2015 아시아프 ‘히든 아티스트’ 심사 위원으로 참여 시 조선일보와 인터뷰) 그 귀한 체험기를 메운 것은 도저한 실험과 저항이었다. 그 기록이 이번 두 전시를 관통한다. 1959년부터 1965년 사이, 전쟁 후 한국 사회는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스로도 “인생의 마지막까지 체험했던”(이하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기념 인터뷰) 하종현의 그림에는 “어두침침하고 방향을 잡지 못해서 막 혼미한 상태”가 드러났다. 앵포르멜(제2차 세계대전 후 나타난 현대 추상회화의 한 경향)을 한국적 맥락에서 재구성한 회화였다. 두꺼운 물감, 불에 그을린 표면, 어두운 색조가 캔버스를 뒤덮었다.
작업실 옆 두 동의 창고를 전시장으로 만들었다. 왼쪽 바닥에 놓인 작품이 ‘이후 접합’ 연작 중 하나다.
나무판의 가장자리에 물감을 짜두고 다른 나무판을 이어, 그 사이로 물감이 스며나오게 한 ‘이후 접합’ 연작이다. ‘Post-Conjunction 21-510’, 2021, mixed media, 91×117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1967년부터 1970년 사이, 사회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면서 기하학 형태의 빌딩이나 다리가 세워졌다. 하종현은 도시의 형성과 변화를 강렬한 색채와 기하학 패턴으로 표현한 ‘도시계획백서’ 연작을 발표했다. 단청 문양, 돗자리 직조 기법 등 전통 미학을 재해석한 ‘탄생’ 연작도 선보였다. 회화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던 하종현은 캔버스를 이어 붙이거나 아래를 구부리는 실험도 했다.
1969년, 한국 미술계에는 “이것이 한국 사람이 가야 할 방향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면서 많은 사람이 개념 이런 것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것,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하는 미술 운동을 해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하종현이 오광수, 김구림, 이승조, 이일 등 12명의 작가, 이론가와 결성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였다. 세상은 군사정권 아래 사회적 억압, 언론 검열 등으로 뒤숭숭했다. 하종현은 철조망처럼 사람을 부자연스럽게 하고 흠집 내는 재료로 평면과 설치 작업을 이어갔다. 이는 1974년까지 지속되었다. <르몽드> 기자 필리프 다쟁은 이 시기 작품에 대해 “혁명 한복판에서 작가의 마음고생이 보인다. 철조망은 인간을 억압하는 상징이다. 움직일수록 손해 보는 세상을 예술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평했다.
작업실 옆 전시장 한가운데에는 이전에 작업한 ‘접합’ 작품을 큰 캔버스 안에 넣고 철망으로 가둬버린 작품이 있다. 그렇게 묶어버리니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왼쪽이 ‘접합’ 연작의 초기 작품, 오른쪽이 1970년대 선보인 철조망 작품이다.
‘접합’, 그 앞뒤 없는 실험
1974년, 가난하던 하종현은 구호 물품을 담는 거친 마대를 남대문시장에서 구해 캔버스 대신 쓰고 있었다. “다시 평면으로 돌아간다면 나만의 갈 길이 뭐냐, 나는 뒤에서부터 한번 해보자. 그래서 마대 뒤에서 물감을 앞으로 밀어내는 새로운 시도를 해봤어요. 이건 어떻게 보면 미술 역사를 완전히 거꾸로 해석한 것인데, 서구적인 기본 틀이 딱 짜인 사회에서는 이런 운동이 있을 수 없어요.”(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기념 인터뷰) 하종현과 연관 해시태그로 묶이는 배압법背押法(천의 앞면으로 물감을 밀어 넣는 기법) 그리고 ‘접합’ 연작의 시작이었다. “물감이 뒷면으로부터 발한하듯 스며 나온다”는 평론가 바르토메우 마리(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표현처럼 그의 캔버스는 피부, 물감은 땀과도 같았다. 거친 마대의 올 틈으로 밀려 나온 물감은 스스로 표정을 짓고, 소리를 냈다. 때론 추락하는 폭포처럼, 때론 파도의 포말처럼, 때론 되튀는 빗방울처럼. 생사불이生死不二이듯 그의 그림에서 안과 밖, 평면과 입체, 물질과 작가의 행위, 통제와 우연, 과거와 미래는 둘이 아니었다. 화면을 채우는 기법으로서가 아니라 삶과 우주를 바라보는 원리로서 그는 캔버스 뒤로, 앞으로 오갔다. 확산되었다. 그렇게 그림 속에 그림보다 넓은 세계를 그려넣었다.
AG 활동의 자취를 보여주는 1970년대 작품 ‘관계 72-9’, 1972(2025년 재제작), 나무 각목, 밧줄, 가변크기. 사진 남서원, 이미지 제공 아트선재센터, ⓒ 2025.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평생의 실험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미련도 없을 것
“한 가지 방법을 꾸준히 관철하는 아티스트가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부정하며 끝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아티스트가 있다. 나의 경우 후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1975년 공간미술 대상 수상 후 인터뷰) 그는 자신에게 면류관을 씌워준 ‘접합’ 연작을 35년 가까이 변주해갔다. 기왓장이나 흙을 닮은 색이 푸른색으로, 또는 먹색으로, 두터운 수직선이 날렵한 사선으로, 넓은 팔레트 나이프 자국이 세찬 붓놀림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2009년, 그는 젊은 시절의 작품과 ‘접합’ 작품을 커다란 캔버스에 넣고 철망으로 가둬버렸다. 이전 작품과의 단절이자 새 작업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마지막으로 할 일이 뭔지 생각해봤더니 화가로서 색을 써봐야겠다는 것”(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기념 인터뷰)이라던 그는 얇고 긴 합판을 종이나 천으로 싸고, 판과 판 사이에 물감을 넣어서 붙였다. 눌리면서 삐져나온 물감 위를 스크래치하거나 유화물감으로 덧칠했다. 그렇게 생겨난 색과 형태는 또 각자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평면과 조각, 재료와 행위, 미술과 비미술이 삼투현상처럼 오갔다. 그것이 2009년 시작된 ‘이후 접합’ 연작이다. 당시 80세를 바라보던 사람의 새 걸음이었다.
“나이가 있는 만큼 내 작업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화에 대한 평생의 실험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더 이상의 미련도 없겠지요. 그래서 더욱더 열심히,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작업에 몰두해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3년 전 개인전(국제갤러리)을 열며 <행복>과 한 인터뷰에서 88세의 하종현은 또 새 걸음을 말했다. 이건 필시 도의 경지가 아닌가. 외부의 자잘한 것은 다 없애버린 채 한곳을 향해 50년 동안 벽을 밀고 살아온 이가 이른 도. 변화야말로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근원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다. 겨울의 심골에서 막 움튼 양효, 그 낳고 낳는 생명의 힘을 우리도 그의 그림에서 곧 만날 것이다.
약 25년 전부터 하종현의 터전이 된 작업실. 스스로 물감을 가장 많이 쓰는 화가일 거라는 이야기를 방증하듯, 수많은 물감통과 함께 아내가 손수 만든다는 넓적한 팔레트 나이프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하종현 작업실의 내력
하종현의 작업실은 경기도 일산 끝자락에 있다. 창고 네 동 중 두 동은 전시장으로, 두 동은 작업실과 수장고로 쓰고 있다. 2007년, 아무것도 돌아보지 말고 작업에만 몰두하겠다는 결심으로 이곳에 집과 작업실을 마련했다. 집터도 지는 해만 바라본다는 의미로 서쪽으로 잡았다. 정년 퇴임을 앞둔 해에 일산 호수공원 앞, 카센터로 사용하던 곳을 작업실 겸 집으로 개조했다. 65세가 되어서야 제대로 된 작업실을 마련했지만, 호수공원 일대가 한류우드로 조성되면서 그의 집도 사업 부지에 수용되었다. 후배 미술인들이 나서서 ‘하종현 지킴이회’를 만들고, 서명운동까지 벌였으나 결국 수용되었다. 이후 지금의 집과 작업실 자리로 옮겼다. 물류 창고로 쓰던 곳이었다. 작품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전깃줄 없는 마당, 그림 운반차가 드나들 수 있는 넓은 입구, 대형 작품을 보관할 널찍한 공간. 그에 마침맞은 공간이 마련되었다. 수백 점의 작품을 보관하기 위해 부인 박미자 씨가 직접 꺾쇠를 구해 작품 하나하나를 간격에 맞춰 세웠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보관에서 얻은 아이디어였다.
〈하종현 5975〉
기간 2월 14일(금)~4월 20일(일)
장소 아트선재센터 스페이스 1, 2
전시 작품 1959~1975년의 초기 작업 40여 점, AG 관련 기록물
문의 02-733-8945
〈Ha Chong-Hyun〉
기간 3월 20일(목)~5월 11일(일)
장소 국제갤러리 K1, 한옥
전시 작품 2009년부터 최근까지 ‘접합’ ‘이후 접합’ 연작 30여 점
문의 02-735-8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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