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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뱀의 해_ Architecture 그 건축물 속에 똬리 튼 뱀
뱀의 형태와 몸 구조는 건축에까지 강렬한 영향력으로 똬리를 틀고 앉았다. 멀리는 20세기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부터 가까이는 21세기 유수의 현대 건축가까지, 그들은 왜 뱀에 미혹되었나.

언젠가 인천에서 파리로 날아가던 때가 있었다. 열댓 시간 공중에 떠 있던 비행기 안, 다들 잠을 자느라 기내는 어두웠다. 그 어둠을 뚫고 창밖을 내다봤다. 창문을 살짝 들어올린 순간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는 곧 탄성을 질렀다. 때는 여름, 비행기는 유라시아 대륙의 벌판 위를 날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거나 메말라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곳에도 여름은 와 있었다.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붉은 비단 끈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구불구불하면서도 강한 방향성을 지닌 그것은 동과 서를,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비단길이었다. 지금도 나는 파리를 생각하면 에펠탑보다는 초록의 대륙을 횡단하던 붉은 비단 끈, 아니 비단뱀 같던 실크로드가 떠오른다. 21세기의 하늘길도 결국 중세의 비단길 위를 사뿐히 떠서 가는 여행길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뱀의 이미지도 그런 것이 아닐까. 뜻밖의 장소에서 낯선 조우, 거기서 맞닥뜨리는 상반된 이미지. 뱀은 혐오의 대상이면서도 생명력이 아주 강하다.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뱀은 불사, 부활의 이미지도 지니고 있다. 그뿐이랴. 다리가 없으면서도 누구보다 빨리 이동하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바로 이러한 뱀의 이미지를 차용한 건축이 있다.

카사 밀라의 다락방. 팔다리가 없는 뱀의 유일한 구조체인 척추 형상에 착안해 벽돌로 단순하고 강인한 구조를 지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 성당)으로 유명한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는 구엘 공원을 지으면서 군데군데 뱀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그중에서도 버려진 타일 조각을 모자이크 기법으로 이어 붙여 만든 서펜타인 벤치는 구불구불한 뱀의 이미지를 영락없이 닮았다. 직선 대신 구불구불한 곡선을 좋아한 가우디는 건축계에서 이단아로 통했다. 독창적이고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으로 유명하던 그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등 여러 걸작을 남겼다. 그의 건축은 유기적 형태와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이 특징인데, 지나친 독창성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한 비난 속에서도 자신의 작품 세계를 고수한 그는 배를 땅에 붙인 채로 기어다니면서도 결코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싶었으리라.

다락방의 모티프가 된 뱀의 척추 구조. ©seelensack036
가우디의 또 하나 역작인 카사 밀라에서도 뱀의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이 건물은 곡선과 유기적 형태를 강조한 독특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외관은 물결치는 듯한 석조 파사드와 철제 발코니로 구성했다. 내부는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특히 유명한 것은 다락방인데, 지붕 구조가 그대로 노출된 이곳은 뱀의 척추를 모방해 지었다. 본래 건축에서는 지붕을 덮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 우리말에서도 집과 지붕은 어원이 같고, 라틴어에서 집을 의미하는 도무스domus의 본래 어원은 돔dome이다. 둘 다 ‘덮다’라는 의미가 있다. 지붕을 어떤 방식으로 덮는가에 따라 건축물의 구조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가우디는 여기서 독특한 뱀의 척추 모양 구조를 사용했다. 팔다리가 없는 뱀은 척추가 곧 유일한 구조체이기도 하다. 그만큼 구조가 단순하고 강인하다. 바로 여기서 착안해 뱀의 척추 형상대로 구조체를 만든 것이다. 이것 역시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뱀의 이미지이다.

말년의 그는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 공사를 감독하다가 달려오는 전차를 미처 피하지 못해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26년 6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건축가가 사망하고 나서도 성당 건축은 계속되어 마침내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첫 삽을 뜬 지 1백44년이 되는 해이자 그의 사후 1백 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어쩌면 불사의 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허물을 벗었을 뿐 결코 죽은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부활했으니까.

건축과 관련한 사회, 문화, 역사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건축 칼럼니스트 서윤영.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건축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은 고려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는 〈미래 세대를 위한 건축과 국가 권력 이야기〉 〈10대와 통하는 건축과 인권 이야기〉 〈서윤영의 청소년 건축 특강〉 〈생각이 크는 인문학 26 : 집〉 〈이상한 나라의 기발한 건축가들〉 〈대중의 시대 보통의 건축〉 등이 있다. 함께 쓴 책으로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가 있다.


뱀을 닮은 현대건축

©Syam Sreesylam
숲속에 은거하는 주택 Chuzhi
인도 슐라기리에 위치한 추지는 더운 여름, 바위 아래 몸을 숨기는 뱀처럼 거대한 암석 지형 사이에 조용히 자리한다. 건축사무소 월메이커Wallmakers는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을 거스르지 않고 완벽하게 융합하는 위장 건축의 개념을 담아 이 주택을 설계했다. 버려진 플라스틱병 4천 개와 흙을 주조해 만든 빔으로 소용돌이를 형상화했고, 여러 개의 소용돌이가 나선형으로 오르며 만든 벽과 지붕 아래 은신하는 주택을 지었다. 소용돌이는 거주자에게는 안락하고 안전한 집을, 집 바깥의 생태계에는 방해받지 않고 지속하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강조하는 나머지 프로젝트와는 정반대의 태도다. 


©Srirath Somsawat
하늘로 승천하는 유리 빌딩 King Power MahaNakhon
방콕의 랜드마크인 킹 파워 마하나콘은 뱀이 똬리를 틀며 빌딩을 타고 올라가는 듯한 형상으로 도시 어디에서나 이목을 집중시킨다. 건축가 올레 스히렌Ole Scheeren은 매끈한 타워 대신 정사각형 큐브가 나선형을 그리며 침식하는 형태의 ‘픽셀화된 파사드’를 택한 이유에 대해 “주변과 어우러지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지상의 공공 광장부터 전망대가 위치한 최상층까지 회오리치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형상은 건물이
도시와 끊임없이 연결되고 있음을 표현한다. 


©Julien Lanoo
식당을 삼킨 보아뱀 Boa Canteen
〈어린 왕자〉 속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 실재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뱀 가죽을 입힌 듯한 파사드에 비늘 모양으로 뚫린 창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 건물은 프랑스 북부 롬 지역의 폴 베르 유치원과 레옹 블룸 초등학교가 함께 쓰는 학교 식당이다. 사거리 모퉁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외피의 재료는 바로 벽돌. 디하운트 바자르DHoundt+Bajart 건축사무소는 벽돌을 랜덤한 패턴으로 쌓아 살아 있는 뱀의 피부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을 구현했다. 파사드는 안으로는 아이들이 즐겁게 식사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밖으로는 동네의 상징적 장소로 자리매김하도록 돕는다. 


Render by ATCHAIN
뱀이 잠드는 계곡 Jinghe New City Culture & Art Center
중국 산시성 북쪽의 징허 신도시에 들어설 징허 신도시 문화예술센터는 한 마리 거대한 뱀이 도시를 가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ZHA)는 유기적인 비정형의 아이코닉한 건축을 디자인하는 사무소답게 이번에도 산시성 산맥을 흐르는 징허강을 닮은 역동적 건물을 설계했다. 물결치듯 흐르는 건물은 거대한 길과 같은 기능을 한다. 실내에서는 도서관과 공연 극장, 갤러리를 연결하고, 도시 바깥으로는 북쪽의 상업·주거 지역과 남쪽의 자연(공원, 강)을 잇는다. 강에서 영감을 받았으나, 잠자는 거대한 뱀을 닮은 건축으로 더 알려져 있다. 

글 서윤영(건축 칼럼니스트), 정경화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5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