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음악부터 영화와 드라마, 음식, 패션, 이제는 문학까지 한국이 전 세계에서 활약하는 요즘이지만, 공간 디자인 분야에서는 유독 반가운 소식이 드물었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의 건축가가 그들의 지역성을 재해석한 작업으로 화두를 던지며 프리츠커상 수상에 이를 때에도 한국은 이렇다 할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2018년부터 ‘양태오’라는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한국이 아닌 영국 런던, 오스트리아 빈 같은 해외 도시에서. 디자이너 양태오가 2013년 북촌에서 문을 연 태오양 스튜디오는 2019년과 2021년 월페이퍼Wallpaper의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2021년에는 세계 3대 아트 서적 출판사인 파이돈Phaidon 프레스의 ‘바이 디자인’에서, 2022년에는 <아키텍처럴 다이제스트>에서 세계 100대 디자인 스튜디오 중 한 곳으로 연이어 이름을 올렸다(두 매체 모두 한국인으로는 최초다). 최근에는 디진Dezeen 어워드의 ‘올해의 디자이너’에 최종 후보자 6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며 떠오르는 월드 클래스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소식이 더 의미 있는 이유는 그의 작업이 한국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다. 파이돈 프레스는 태오양 스튜디오의 작품에 대해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 세계적으로 환영받는 ‘한국의 미학’을 만들며 전 세계 공간의 다양성에 기여했다”고 평한다. 건축과 인테리어는 엄연히 클라이언트가 존재하는 일이지만, 태오양 스튜디오는 ‘한국적 전통과 지역성을 동시대 언어로 표현한다’는 목표를 작가와도 같은 자세로 고수한다. 그리고 그 업역은 전시 기획과 가구, 스킨케어, 향 브랜드를 넘나든다. 북촌의 한옥을 고쳐 사무실을 열고 작업을 펼쳐온 것이 벌써 13년째. 한국의 전통이라는 변치 않는 구심점을 공전하며 끝없는 리서치와 연구가 이루어지고, 서로 다른 프로젝트를 위한 아이디어가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며 스튜디오의 세계관은 나날이 또렷해지고 있다. 지금도 뉴욕의 레스토랑, 강원도의 리조트, 이태원의 오피스 등의 프로젝트가 활발히 이어지며, 태오양 스튜디오가 빚어내는 공기감은 전 세계에 한국성을 뿌리내리는 중이다.
양태오
유럽과 미국에서 공간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 북촌 한옥마을의 한옥에 태오양 스튜디오를 오픈했다. ‘전통 그리고 지역성의 재발견과 미래’를 주제로 국립경주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주중 한국문화원, 국제갤러리, 호림박물관의 전시 공간 기획 등 다채로운 공간 디렉팅 프로젝트를 통해 전통의 아름다움을 모던하며 동시대적 모습으로 표현한다. teoyangstudio.com
한강 레지던스(2024)
자연과 예술, 가족의 생활이 어우러진 도심 속 안식처. 한국 전통의 간결한 미학을 바탕으로 빛과 소재·형태 같은 기본 요소에 집중해 공간에 여유를 들이고, 아티스트 조지 콘도와 키스 해링, 윤형근 작가의 작품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가족의 일상에 예술을 자연스럽게 녹였다. 넓은 창 너머로 한강 풍경이 잔잔하게 펼쳐지는 곳에 자리해,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마주하며 바쁜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집이다.
예올 × 샤넬 프로젝트 ‘온도와 소리가 깃든 손: 사계절(四季節)로의 인도’(2024)
샤넬 코리아와 재단법인 예올이 장인 정신과 공예를 기반으로 선보이는 전시 프로젝트. 전시 디렉팅과 작가와의 협업에 참여해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된 대장장 정형구의 작품을 현대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사물로 재해석했다. 철이라는 거친 속성의 재료를 아름답고 일상적 공예로 재탄생시키는 대장장이의 손과 그의 반복되는 작업, 일상에 주목해 다과 받침, 원예 도구, 모기향 거치대 등 사계절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를 제안했다.
GS에너지 사옥(2022)
GS타워 최상층에 위치한 GS에너지 세 개 층을 통합해 리디자인한 프로젝트. 어퍼 캠퍼스Upper Campus라는 콘셉트로 서로 배우며 성장하는 분위기의 공간을 완성했다. 신경과학 이론에 기반한 창조적 환경을 토대로 효율성과 미학의 균형을 맞추고, 자연 소재와 식물을 활용해 지속 가능성을 생각하는 GS에너지의 철학을 담았다.
블루보틀 스튜디오 서울(2024)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오픈하는 블루보틀 스튜디오. 브랜드가 고객에게 전하는 환대를 공간에 녹여 깊은 유대를 끌어내는 것에 집중했다. 소격동 골목 끝에 자리한 위치에 착안해 ‘골목 안 푸른 집: 시간의 문을 열다’라는 콘셉트를 정하고,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쉬어 가는 오아시스 같은 장소로 디자인했다. 새로 조성한 중정과 옻칠한 가구, 토기 등의 고미술품이 동시대의 가구와 어우러져 예술을 벗 삼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한솥 신사옥 & 한솥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2024)
한솥도시락을 소비의 중심지인 청담동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 데 집중한 프로젝트. ‘한솥의 집’이라는 콘셉트로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은 듯 자연스럽고 편안한 환대의 공간을 만들었다. 키친과 카운터가 위치하는 1층은 집 속 주방처럼, 2층 다이닝 라운지는 거실과 다이닝룸으로, 아카이브실은 서재처럼 디자인했다. 지하의 한솥 아트스페이스는 분기마다 다양한 전시를 열며 한솥이 중시하는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을 드러낸다.
시그니엘 서울 스파(더 리트릿 시그니엘)(2023)
한국 본연의 미학인 ‘무미’를 바탕으로 기존 하이엔드 스파의 틀에서 벗어나 시그니엘 리트릿만의 새로운 럭셔리를 보여주는 공간. 목재와 석재의 묵직함, 스틸의 매끈한 가벼움이 조화를 이루는 배경에 다양한 공예 작품으로 물성과 형태를 더하고, 풍부한 간접 광을 사용해 안락한 무드를 조성했다.
“저에게는 작업이 곧 스스로를 발견하는 과정이에요. 일을 하면서 배운 철학과 미학이 저라는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밝혀줍니다.”
공간과 가구, 향, 스킨케어까지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작업합니다. 스튜디오도 종합적인 디자인을 실천한다는 의미를 담아 ‘멀티디시플리너리Multidisciplinary’라는 단어로 소개하고요. 지금처럼 작업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표현 방식과 도구만 달라질 뿐 모두 ‘한국인으로 어떻게 아름답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전통이라는 것이 단순히 공간만이 아니라 의식주 전반에 걸쳐 있는 개념인데, 이를 공간으로만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공간과 스킨케어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결국 사람에게 이롭고 아름다우며 건강한 삶을 만들기 위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각각의 영역에서 작업하는 내러티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풍성해지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여러 영역에서 추구하는 본질이 ‘한국의 전통과 지역성에 대한 동시대적 표현’으로 수렴한다는 것 또한 스튜디오의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언제부터 목표로 삼게 됐나요?
직접적인 계기는 이곳 한옥에 온 후부터예요. 당시 북촌 한옥마을이 전통과 지역성을 상실하는 광경을 매일 직면했습니다. 좋아하던 한옥이 완전히 다른 모습의 액세서리 가게가 되어 껍데기만 남는 모습도 보았고요. 디자이너로서 이 문제를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전에도 저는 디자이너였지만, 이 미션을 찾으면서 비로소 디자이너가 된 것 같아요. 마치 일생의 카르마(업)를 찾은 사람처럼요.
한국의 전통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어떤 것이었나요?
하나만 꼽는다면 무미無味입니다. 인위적인 꾸밈이 없는 아름다움을 뜻해요. 본질에 집중하는 삶을 추구하는 선조들의 철학이죠. 모든 것이 바쁜 지금의 한국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입니다. 무미는 결국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자연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서 그걸 닮은 공간을 만들면 되레 흉해질 때가 많습니다. 자연을 따라 하기보다는 그 속에 내재한 정신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한 가치를 몇백 년 동안 이어온 것이 우리의 전통 건축이에요. 거기에서 많은 배움을 얻습니다.
공간을 디자인할 때 적재적소에 아트를 이용해 무드를 완성하고, 직접 작품을 수집하는 컬렉터이기도 합니다. 예술 작품의 어떤 점이 즐거움을 주나요?
깨달음을 주는 작품을 좋아해요. 작가는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왜 이 작품에 이끌리는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작품을 조사하면서 발견한 지점이 제 삶의 철학과 일치할 때 가장 기쁩니다. 작품을 소장하고 싶어지고요. 컬렉팅은 상호 관계적인 것이라 내가 작품을 보지만 작품도 나를 봐요. 그래서 작품을 두고 나면 그 작품에 떳떳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이우환 선생님의 작품을 걸어두면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관계항에서 나는 누군가와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요. 컬렉팅은 작가가 빚어낸 에너지를 집 안에 들이는 것이기에 쉬운 행위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공간에 작품이 더해지면서 좋은 내러티브가 생기고 저 자신이 더 나아져요. 그래서 컬렉팅을 하게 됩니다.
*기사 전문은 <행복> 1월호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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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 in Life_ 더 디자이너 : 양태오 한국의 전통을 동시대 예술로 치환하는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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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의 미감을 자신만의 언어로 치환해 공간에 내러티브를 입히는 디자이너 양태오. 그가 구현한 결과물에는 공간, 가구, 제품 등 분야와 관계없이 고유한 공기감이 흐른다. 디자이너이자 기획자, 아트 컬렉터인 그를 자신의 뿌리이자 동굴이며 영감의 원천인 북촌 한옥 청송재에서 만났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5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