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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최시영 자연이라는 안식을 짓는 공간 디자이너
건축가, 공간 디자이너, 조경가, 정원가. 디자이너 최시영은 다양한 직업으로 수식된다. 주상복합 아파트의 시작을 열면서 공간 디자이너로 활약하다, 밭을 일구고 정원을 가꾸는 조경 건축가로 제2의 막을 올린 그가 이제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라는 영역을 개척하며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요즘 장안의 화제인 예능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은 국내 정상급 셰프들과 전국에서 참전한 요리사들이 최고의 맛을 놓고 승부를 펼치는 이야기다. 이미 장인의 반열에 오른 셰프들이 까마득한 후배 요리사와의 대결에도 상대를 존중하고 전력을 다하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셰프 중의 셰프라 꼽히는 에드워드 리는 매번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자신의 길을 거침없이 가는 모습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공간 디자인 분야에서 이와 같은 인물을 꼽는다면 아마 디자이너 최시영을 떠올리지 않을까. 그는 미술을 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건축을 택하고, 긴 방황 끝에 느지막이 공간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다. 몇몇 주택 작업이 계기가 되어 참여한 타워팰리스 프로젝트를 통해 국내에 주상복합 아파트라는 유형을 성공적으로 데뷔시키며 스타덤에 올랐고, 디자이너가 공간 프로젝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 <행복>과는 집 개조 프로젝트부터 리빙디자인페어,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등에서 협업하며 함께 성장해온 사이이기도 하다. 공간 디자이너로 최고의 자리에 섰으나, 자연이 주는 위로와 사색의 경험을 전하고자 조경가이자 정원가로 변신해 자연에도 자신만의 언어를 드리우고, 지금도 스스로를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라 정의하며 새로운 영역에 문을 두드린다. 그런 그가 19년 만에 작품집을 출간한다. 주택 작업과 최근 진행 중인 랜드스케이프 프로젝트 계획안 두 권으로 나누어 그동안 공개하지 못한 작품을 소개하는 장이다. 위안과 사색의 시간을 선사하고 이제 그의 터전이자 영감의 원천이 된 파머스대디에서 출간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던 그를 만났다.


최시영
리빙엑시스 대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자연 앞에 겸손하고 인간에게 친절한 공간으로 세상과 아름답게 소통하는 작업을 한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와 건축도시대학원을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 환경디자인과 겸임교수, 중앙대학교 건설대학원 실내건축학과와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제12회 대한민국디자인대상 디자인공로부문 산업포장, 아시아 태평양 스페이스 공간디자인협회 엑설런트 어워드, 독일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본상 등을 수상했다. livingaxis.com




에덴 파라다이스 메모리얼
봉안당은 죽은 자를 모시는 공간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장소이기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획한 새로운 개념의 메모리얼. 일곱 개의 테마 가든과 허브 및 블루베리가 자라는 키친 가든을 조성해 사색하고 뛰어놀기도 하며 가족이 마음을 나누고 추억을 만드는 장소를 완성했다.



삼성동 H주택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건축주의 세컨드 하우스이자 비즈니스 미팅 장소, 게스트하우스, 갤러리까지 겸하는 레지던스. 신축이 불가능했기에 리모델링과 증축으로 방향을 바꿔 작업했다. 증축한 거실은 성큰 가든처럼 바닥의 단을 낮추고 담돌을 둘러쌓아 아늑한 분위기를 냈고, 거실 지붕 위에 덱을 깔고 정원을 조성해 침실에서도 항상 자연을 접할 수 있다. 35년이 넘은 주택의 지붕과 벽이 만들어내는 선, 그리고 새로 증축한 공간이 조화를 이룬다.




파머스대디
경기도 이천의 산과 들 사이에 자리한 최시영 디자이너의 공간. 아버지가 목장에서 쓸 작물을 키우던 곳을 밭이자 정원, 파티와 모임을 열기도 하는 장소로 가꿨다. 어린잎 채소를 키우는 키친 가든, 오이와 수세미가 자라는 아치 정원, 60cm 깊이의 수공간에 측백나무로 벽을 세운 사색의 정원 등 모든 풍경에 그의 생각과 손길이 깃들어 있다.



S 공장 사옥
자연과 교감하는 일터에서 직원들이 더 건강하게 일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가기를 바라며 디자인한 사옥. 건물 파사드의 프레임을 따라 등나무 줄기가 자라고 그라스와 팽나무를 심은 정원, 돌 정원을 계획해 건물 안팎 곳곳에서 자연을 만날 수 있다.




레지던스 시그니엘 서울
서울의 하이라이즈high-rise 풍경을 감상하며 피로를 덜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 이끼가 자라는 음지 가든과 칸살 중문, 선의 미학을 살린 티룸, 한옥 마루처럼 단을 내고 투명한 욕실까지 레벨을 맞춘 마스터베드룸 등 동양의 미감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프랑스에서 공수한 두께 50mm의 슬레이트석으로 벽체를 마감해 고목의 질감을 표현했다.


“좋은 공간이란 아침에 눈떴을 때 살아 있는 생명과 눈을 마주할 수 있는 곳입니다.”

건축부터 인테리어디자인, 조경까지 경관에 관한 모든 것을 디자인합니다. 그중에서도 어떤 수식어로 불렸으면 하나요?
랜드스케이프 건축가면 좋겠어요. 제가 정의하는 랜드스케이프 디자인은 정원을 바탕으로 하는 건축입니다. 지금까지는 건축에 조경을 더하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자연이 주인공이고 그중 일부에 건축을 짓는 개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대표적 인물이 영국 디자이너 토머스 헤더윅이에요. 도쿄 아자부다이 힐스 저층부를 디자인했고, 최근 노들섬 프로젝트에 당선되며 한국에서도 이슈가 됐죠. 그는 산업 디자이너라 건축가도, 조경가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작업하는데, 그 새로움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대표님이 꿈꾸는 ‘자연이 주인공이 되는 공간’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요?
최근 세종시에 300만㎡(90만 평) 규모의 산업 단지 마스터플랜을 설계하고 있어요. 전자나 반도체 분야의 회사와 공장은 물론 주택, 갤러리, 호수공원, 언덕 너머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와 몰까지 산업 단지 안에 녹아드는 파격적 기획입니다. 이렇게 여러 용도의 공간을 묶어주는 개념이 랜드스케이프입니다. 경사진 언덕과 그의 일부가 된 건축이 만드는 정원이 메인 테마입니다. 그 안에는 크고 작은 가든이 3백~4백 개 있어요.

지금은 조경 건축가로 활약하지만, 대형 주거 프로젝트를 작업하며 서울의 경관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건축가들이 주택에 관심이 많지 않았어요. 규모가 작은데 손은 많이 가니까요. 몇 차례 단독주택을 설계했는데, 필수 요소이던 몰딩도 없애고 당시에는 모두 낯설어하던 심플한 디자인을 했지요.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클라이언트의 의뢰가 이어졌고, 그 작업이 계기가 되어 주상복합 프로젝트를 맡게 됐습니다.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즈음은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으면서 처음으로 좋은 집은 무엇인지, 좋은 디자인은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된 시기였어요. 여러모로 운이 따르기도 했습니다.

파머스대디를 열며 조경가이자 정원가로 2막을 시작했습니다. 어떤 계기로 정원에 몰두하게 되었나요?
연이어 프로젝트를 하면서 많이 지쳤어요. 시행사가 정한 빠듯한 일정에 맞춰 정신없이 일하는 것도, 끊임없이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도 힘들었어요. 그때 도망치듯 떠난 캐나다에서 저를 위로한 것이 자연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10년을 자연만 보러 다니다 아버지가 밭으로 쓰던 이 땅을 떠올리고 이곳으로 온 거예요. 그리고 이리저리 고쳐 지금의 파머스대디가 된 것입니다.

파머스대디는 오픈 직후부터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대표님에게 이 공간은 어떤 곳인가요?
제 놀이터이자 실험실입니다. 명색이 디자이너인데 밭도 예쁘게 만들어보자 해서 농사를 아름답게 지은 거예요. 봄여름에는 수박과 참외를 키우고, 지금은 배추와 무가 자랍니다. 동시에 식물을 키우며 디자인을 실험하고요. 파티나 공연을 열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자연의 어떤 점이 위로가 됐나요?
한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빨리빨리 문화인데, 농사는 정반대로 자연의 속도에 제가 맞춰야 해요. 농사의 한자 농農은 ‘별 진辰’ 자와 ‘노래 곡曲’을 결합해 만든 글자예요. 별을 노래하는 일, 해와 달과 별을 헤는 마음, 우주의 이치를 읽고 그에 맞춰서 지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느리게 속도를 맞춰가는 일이 무너지던 멘털을 잡아줬습니다. 그리고 농사는 할 일이 정말 많아요. 노동도 이런 노동이 없는데, 착한 노동이에요. 몰입하면서 머리를 비우는 것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자연은 돌보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런데 이 아이들을 돌보다 보니 그게 결국 저를 돌보는 일이더라고요.

위로를 준 정원이 이제는 작업의 새로운 정체성이 되었어요.
사람들에게도 정원이 주는 사색과 위로의 경험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가든의 시대가 올 거라고도 생각했고요.
대표님이 디자인한 정원은 조경가가 만드는 것과는 다른 모습일 것 같습니다. 건축을 바탕으로 하다 보니 정원을 설계할 때도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 장소로 디자인해요.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시간의 개념으로 설계합니다.

조경을 작업하면서 건축이나 인테리어할 때와 가장 달랐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자연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기보다 만들어지는 것에 가까워요. 정원도 자연의 일부일 뿐이고요.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인데, 그래서 신비롭고 할수록 겸손해집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1백50년 전에 “인류가 발달할수록 크고 견고한 건물을 지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자연으로 향할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가든을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정말 동의합니다.

19년 만에 작품집을 출간합니다. 무엇이 계기가 됐나요?
제가 좋아하고 저에게 익숙한 ‘책’이라는 방식으로 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간 드러내지 못한 작품을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특히 조경 작품은 최근에 진행 중인 것이 많은데, 이번 작품집을 계기로 자연이 건축을 얼마나 생동감 있게 만드는지 보여주려 합니다.

디자이너 최시영의 다음 10년, 20년은 어땠으면 하나요?
클라이언트가 보내준 신뢰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해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 나는 할 수 있다 크게 두 가지 인생관을 평생 지켜왔고요. 언제까지 일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마음을 지키며 일한다는 것은 변함없습니다.

글 정경화 기자 | 사진 이기태 기자(인물), 리빙엑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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