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미셸 푸코는 현실에 존재하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헤테로토피아’라는 공간 개념을 제시했다. 헤테로토피아는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다. 어린 시절의 다락방, 정원의 깊숙한 곳, 인디언 텐트처럼 현실에 있지만 나만을 위해 다른 형식으로 존재하는 공간. 우리에게도 각자만의 헤테로토피아가 있다. 비록 미처 모르고 지나치거나 금세 사라졌을지라도. 정희원 교수에게는 책이 그러한 존재다. 지난해 ‘저속 노화’라는 키워드를 알리며 사람들의 식습관과 라이프스타일에까지 영향을 미친 그는 매일 한 시간 반 이상 독서를 하고, 책을 쓰거나 읽으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활자 중독자다. 번뇌에 싸일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답이 필요할 때 그가 가장 먼저 꺼내 드는 것 또한 책이다.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 ‘정희원의 저속노화’에서 좋아하는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코너 ‘정희원의 도서관’을 열기도 했다. 이쯤 되면 그에게는 책이 자신의 저속 노화를 이루는 방법이 아닐까. 책 속의 세계를 자유로이 유영하고, 작가가 되어 스스로 그 세계를 짓기도 하는 정희원 교수에게 책의 시간은 과연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졌다.
유튜브 ‘정희원의 도서관’ 촬영 스튜디오에서 만난 정희원 교수. 테이블 위 도서는 유튜브에서 소개했거나 소개하려고 준비 중인 책들이다.
노년내과 의사로 일하며 지속 가능한 나이 듦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알리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노년내과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노년내과에서는 노쇠해진 환자를 대상으로 기능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진료하는 일을 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하는데요, 하나는 노쇠가 모든 노인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젊은 사람도 노쇠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특정 증상에 집중해 진단을 내리는 것과 달리 기능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근감소증을 앓는 환자를 예로 들어볼게요. 근감소증은 근육이 줄어드는 병으로 노쇠 증상 중 하나입니다. 아직은 별다른 약이 없어요. 병원에서는 단백질을 섭취하고 근력 운동을 하라고 하는데, 좋아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근감소증은 여러 원인이 맞물려 생긴 결과이기에 원인을 하나씩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를테면 우울증이 있으면 근육이 빠질 수 있습니다. 우울증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식사를 못 하고, 활동량이 줄어드니까요. 이런 분들이 일반 병의원에서 식욕 촉진제나 소화제, 수면제를 처방받으면 근육이 더 빠집니다. 사람을 더 가라앉게 만드는 약이라 식사량이나 활동량이 줄어들게 되거든요. 이럴 때는 증상이나 질병 하나보다 전체를 조망하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환자의 진료 기록과 면담을 통해 악순환의 고리를 하나씩 끊어가는 거죠. 이 환자에게는 우울증과 수면 관련 약제를 처방해드리고 외부 활동을 할 것을 조언했습니다. 이제 예전처럼 활동하게 되었고, 근육도 점점 생기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연구를 이어오며 발견한 저속 노화의 핵심 비법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발견한 것은 아니고, 예전에 있던 개념을 손본 것이 있습니다. 4M이라는 개념인데요, 삶의 네 가지 축이자 노화를 늦추는 네 가지 기둥이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동성(Mobility)과 마음건강(Mentation), 건강과 질병(Medical Issues), 그리고 나에게 중요한 것(What Matters)입니다. 각각 꾸준한 운동, 적절한 몰입 활동을 통해 두뇌 활동을 촉진하는 것, 건강하게 먹고 잘 자는 생활이라 설명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나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목표나 커리어, 자산, 가족 등 무엇이든 될 수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이 개념을 특히 어려워합니다. 성적이나 돈처럼 밖에서 요구하는 가치, 숫자로 비교되는 것을 바라보고 사는 경우가 많거든요. 하지만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좇아 살지 않으면 결국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어요.
교수님에게는 책이 저속 노화를 위한 비법이기도 할 것 같아요. 유튜브에서 책을 읽고 쓰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교수님에게 책은 어떤 존재인가요?
숨어서 쉴 수 있고 현실도피를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도파민과 세로토닌(행복감을 느끼게 해 행복 호르몬이라 부른다)을 공급하는 수단이고, 선생님이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즐거움을 주나요?
취미로 호른을 연주하다 보니 음악과 비교해 설명하자면, 제 경우에 음악은 그것 외의 어떤 활동을 수반합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뭔가를 하고, 호른을 불면서 음악을 만들어낼 때도 악기 연주라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책을 읽거나 쓸 때는 오롯이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고 집중하게 돼요. 그 몰입이 주는 기쁨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평소 언제 어디서 책을 읽나요? 책 읽는 습관이나 취향이 궁금합니다.
버스나 지하철, 기차 등에서 이동하는 동안 많이 읽고,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폰에 메모해요. 의사가 된 이후로는 문학보다는 비문학을 주로 읽습니다. 평소 환자와 그 가족의 고통과 슬픔을 가까이에서 겪는 일이 많다 보니 감정 표현이 절제되고 자극적이지 않은 비문학에 손이 갑니다.
개인적으로 책을 더 깊이 음미하는 방법을 소개한다면요
저는 책으로 곰탕을 끓여요.(웃음) 보고 또 봅니다.
최근 유튜브에서 ‘정희원의 도서관’이라는 코너를 열고 좋아하는 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개한 책에 대해 짧게 들려주세요.
하버드 의대 정신과 교수인 크리스토퍼 M. 팔머가 쓴 <브레인 에너지>와 중국 명나라 말기의 문인 홍자성의 <채근담> 두 권의 책을 소개했어요. <브레인 에너지>는 정신 건강에서 간과하기 쉬운 식사, 운동, 수면 등 생활 방식을 정갈하게 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합니다. 약을 먹지 말라는 것은 아니고 생활 방식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죠. <채근담>은 동양 고전 중에서도 문체가 쉽고 짧은 구절로 구성되어 있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고,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지표가 되어준 책이라 매년 한 번은 찾아봅니다. 특히 노화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 많은데요, 그중 하나가 “노쇠했을 때의 입장으로 지금의 젊은 시절을 바라보아야 분주하게 공명을 좇는 마음을 제거할 수 있고, 영락했을 때의 입장으로 지금의 영화로움을 바라보아야 사치스럽게 부귀를 추구하는 생각을 끊을 수 있다”입니다. 사람들은 노화를 흔히 나와는 별 관계 없는 일로 치부하다 보니 노화를 맞닥뜨렸을 때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노화는 삶의 궤적이 축적된 결과입니다. 고기, 술, 좌식 생활 등 즐겁고 편한 것을 추구하면 비싼 계산서를 받게 됩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구절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