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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 이대길 정원사가 만추晩秋를 보내는 법
순식간에 가을을 보내고 겨울이 들어설 것만 같은 요즘이지만, 정원사는 그 사이에도 찰나의 귀한 계절을 발견해낸다. 식물의 시선으로 생태를 고민하며 정원을 짓는 이대길 정원사가 전하는 만추의 풍경과 정원사의 일.

피트 아우돌프의 개인 정원 후멜로의 정경. 그는 초원의 아름다움을 정원에 담아내기 위해 그라스의 질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독일의 어느 정원사는 1년의 사계절에 초봄, 초여름, 늦가을까지 더해 일곱 계절로 나누어 시간을 더욱 세밀하게 감각했다. 그는 풀협죽도(Phlox Paniculata)라는 식물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렇기에 풀협죽도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초여름은 여느 정원사가 맞이하는 여름과는 달랐을 것이다. 좋아지면 눈길이 가고, 계속 보다 보면 점점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심지어 직접 육종(식물의 품종을 개량하는 것)을 하기도 했으니 식물이 이듬해 예상한 것과 같은 모습의 꽃을 다시 피워내는 시기는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었을까. 정원사의 이름을 벌써 알아차린 이도 있을 것이다. 그는 독일 정원의 아버지라 불리는 칼 푀르스터Karl Foerster이다. 그는 다수의 책을 포함해 여러 유산을 남겼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 그중 하나는 잎이 가느다란 관상용 그라스(Ornamental Grass)의 아름다움을 일찍이 느끼고 정원에 심을 가치가 있는 식물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화사한 꽃이 주인공이던 가드닝의 오랜 역사에서 형태와 질감의 은은한 멋을 느낄 수 있는 그라스에 주목한 그가 얼마나 깊은 시야로 앞서간 인물인지 들여다볼 수 있다. 상당수의 그라스는 드넓은 초원에서 자라 바람을 타고 씨앗을 퍼트리는 까닭에 씨앗에 털이 달려 있곤 하는데, 그로 인해 빛을 가득 머금게 되어 몽환적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털 달린 씨앗은 금세 한꺼번에 날리지 않고, 서서히 빠지면서 겨울까지 아름다움을 이어간다. 특히 가을부터 개화하는 종이 많기에 칼 푀르스터는 늦가을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만추를 일곱 계절에 넣었을 것이다.


네덜란드에 위치한 정원 블린더호프Vlinderhof. 보드라운 늦가을 볕이 그라스에 아름답게 내려 앉아 있다.

늦가을엔 말라가는 식물도 제법 많아지는데, 그럼에도 햇빛은 공평하게 식물을 대한다.

나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정원사로서 그 아름다움에 대해 익히 공감하고 있다. 가을이 되면 늦가을까지 나의 시선은 온통 그라스의 꽃이삭을 따라 이리저리 항해를 시작한다. 특히 저물어가는 오후의 빛을 보고 있는 동안은 더없이 행복하다. 늦가을의 햇빛은 좀 더 입자가 작고 많은 것인지 꽃이삭의 모습도 더 뿌옇게 솜털이 나 있는 듯하다. 이 아기 피부 같은 가을볕이 그라스의 섬세한 이삭에 내려앉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온전하게 끼워 맞춰져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언젠가는 이 모습을 보고 느끼기 위해 여름내 땀 흘리며 정원을 돌보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늦가을의 빛은 인내의 계절을 겸허하게 지나 보낸 정원사에게 선사하는 선물과도 같다. 그러나 느긋하게 탐미하며 시간을 보낼 만큼 정원사의 늦가을은 한가롭지 못하다. 가을은 봄 다음으로 식물을 심기 좋을 만큼 밤 온도(10~20℃ 내외)가 낮아지기에 서둘러 겨울 전에 할 일을 마쳐야 한다. 여러해살이풀의 경우 초가을에 심어 새로운 자리에서 뿌리가 안착해야 겨울을 나기 수월하고, 늦가을엔 이듬해 봄의 풍경을 상상하며 추식 구근을 심곤 한다. 특히 튤립Tulip과 알리움Allium처럼 곰팡이에 취약한 구근은 11월에 접어들어 흙이 얼기 전에 구근 높이의 2~3배 깊이로 심으면 좋다. 그 외의 구근은 9월과 10월 사이에 심어 새 흙에 뿌리를 내려야 겨울을 나는 데 수월하고, 설강화와 패모의 경우에는 구근이 공기 중에 노출되면 상태가 빠르게 나빠지므로 최대한 신속하게 심는 것이 좋다.

제주도에 위치한 정원 담소요. 드넓게 펼쳐진 초지 정원에 해 질 녘의 햇빛이 숭고미를 더한다.
이왕 흙을 파봤으니 흙 속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흙을 손으로 만져본 적이 있는가, 어떤 느낌이었는가. 흙을 쥐어본 이래로 그것은 따뜻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러한 흙이 많은 생물에게는 겨울의 추위를 피할 집이 되어준다. 이 거칠고 때로는 질퍽하기도 한 흙에서 식물이 뿌리를 뻗고 생물이 머물기까지 하니 모든 생명은 흙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정원사보다 더 부지런한 풍뎅이·거미·도마뱀·개구리 등이 겨우내 잠을 청하러 흙이라는 집으로 들어가고, 늦가을 정도면 웬만한 친구들은 이미 잠들어 있다. 그러나 정원사의 욕심은 끝이 없고, 때로 잠든 생물의 집은 흙이 얼기 전까지 일을 하려는 이들에 의해 파헤쳐진다. 혹여라도 캐내기까지 한다면, 정원사는 그 집의 깊이를 정확히 알 수 없어 부실하게 묻어주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 ‘그들이 고려한 깊이보다 얕게 들어간 친구들은 겨우내 춥지 않았을까.’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못하다. 우리가 딛고 있는 표면은 누군가에게는 집이 될 만큼 아늑한 품이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는 정원을 가꾸면서 글을 쓸 정도로 애호가이기도 했는데, 그는 저서 <정원가의 열두 달>에서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이 말의 뜻을 이해한 건 늦가을의 어느 날 흙 속에서 도마뱀을 캐내었을 때였다. 도마뱀은 놀랄 겨를도 없이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나는 그가 잠들려 했을 깊이를 알지 못해 저지른 잘못을 정확히 해결할 수가 없었다. 대지 위의 모든 생물이 자신의 유전자에 각인된 나름의 방식으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그날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으려고 생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을 공부해나가고 있다.

수시사Succisa Pratensis. 가을에 핀 쿠션을 닮은 보라색 꽃을 피우는데, 가을볕을 만나 더욱 빛이 난다.
우선 가장 전제하는 생각은 함부로 독단하거나 합리화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야생의 친구들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것을 먹기도, 이용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정원사는 정원의 아름다움을 좇아 평생 정리하는 숙명을 지닌 사람이지만, 보기 싫어도 추위에 말라버린 줄기, 낙엽 등의 잔해를 그대로 두면 생물들에게 도움이 된다. 낙엽 아래에는 무당벌레가 촘촘하게 서로서로 붙어 체온을 나누고, 마른 줄기 안에서 겨울을 나는 곤충도 있다. 죽은 나무에서는 무려 숲의 30%에 해당하는 생물이 살아간다. 가을에 익은 씨앗을 따는 것도 그 시기의 일이다. 하지만 나의 정원으로 삶을 들인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조금은 남겨두자. 참새를 비롯한 작은 새들이 강아지풀을 포함해 생각지도 못한 여러 풀의 씨앗을 먹으며 겨울을 난다. 가느다란 줄기에 대롱대롱 앉아서 위태로워 보이지만 안정적 자세로 유연하게 먹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 모습을 더 좋아하는 이들은 겨울 동안 여러 견과류를 정원에 매달아놓기도 한다. 생물을 생각하는 마음만큼 그들과의 관계는 깊어지고, 더욱 자주 인사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렇게 고요한 겨울 정원에 생기가 더해진다.

이대길 정원사의 실험정원. 직접 식물을 기르며 경험을 쌓는 일이 때로는 버겁지만 계절마다 발견하는 고유한 아름다움에서 나아갈 힘을 얻곤 한다.

수크령은 품종마다 꽃이삭의 색감이 달라 햇빛이 비추었을 때의 모습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사실 앞선 이야기는 모두 자연을 그저 그대로 두면 된다는 말과도 같다. 돌본다는 말조차 사람의 언어이며, 돌봄이 필요하지 않은 그들의 환경을 망가뜨리고 되레 돌봐주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독일처럼 사계절이 있어 칼 푀르스터가 나눈 일곱 계절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기후 위기로 인해 그가 더한 계절은 나날이 줄어든다. 계절을 느낄 법하면 금세 다른 계절이 떠오를 정도로 그 흐름이 빠르다. 인류의 활동으로 자연의 다양성은 갈수록 줄어드는데, 이제는 그도 모자라 계절마저 단순해지는 느낌이다. 늦가을의 아름다움을 언제까지 예찬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자연은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데 인류가 그 약속을 저버린 건 아닐까. 정원사는 계절의 품 안에서 기쁨과 아름다움, 실망, 기대, 여러 감정을 새긴다.



정원사 이대길(@daegil._)은 생태를 기반으로 한 미학적 표현을 통해 아름답고 지속 가능한 정원을 만들고 돌본다. 이를 위해 자연주의 식재 디자인, 식물사회학, 생태학의 이론적·경험적 기틀을 다지고 있다. 주요 작업으로는 이솝성수, 편강율, 르디투어, 투티에 등 브랜드의 정원이 있다. daegillee.com

글과 사진 이대길 | 담당 정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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