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경기정원문화박람회의 초청 작가로서 선보인 정원 ‘혼자 웃는 까닭’을 거니는 황지해 작가. ©조성희
올해 여름은 정말이지 지독했다. 기록적 폭염과 열대야, 아열대 지방의 스콜처럼 변덕스럽게 퍼붓는 폭우. 예년과 달리 아직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 초와 세찬 빗줄기를 온몸으로 머금은 땅의 온도가 한 뼘쯤 내려간 같은 달 말, 황지해 작가를 만났다. 장소는 두 번 모두 남양주시 다산수변공원에서 자라는 팽나무 아래였다.
2011년과 2012년, 그리고 2023년에 세계적 가든 쇼 영국 첼시 플라워 쇼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한국인 최초 3 골드 메달리스트’란 쾌거를 이룬 황지해 작가는 국내외 가든 쇼에 참여하는 건 물론 공원 조성, 미술관 프로젝트 등 자연과 정원을 매개로 전방위적 활동을 펼치는 정원 디자이너이자 환경 미술가다. <행복> 취재팀과 만난 날 역시 10월 3일부터 6일까지 진행한 제12회 경기정원문화박람회의 초청 작가로서 선보일 정원 조경에 한창이었다.
남양주에서 탄생한 다산 정약용의 시 ‘독소’에서 모티프를 얻은 ‘혼자 웃는 까닭’은 팽나무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사색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사진 유청오, 경기정원문화박람회 제공
“팽나무는 예로부터 마을의 수호수로서 사람들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해주던 마을지기이자 정령이었습니다. 강직한 줄기와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으며, 나뭇가지는 우리 몸의 신경세포에서 뻗어 나온 가지돌기를 닮았죠. 인간이 자신의 영혼과 마주하는 순간 나오는 엔도르핀과 도파민은 어쩌면 팽나무와 닮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걷는 사람의 눈높이를 낮춰 오롯이 팽나무에 집중하고, 흐트러진 몸의 균형과 희미해진 삶의 목적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도록 고립된 시간을 선사하고 싶었어요.”
강원도의 한 마을에서 버리기 위해 허문 담돌을 가져와 쌓은 담에는 자연스러운 멋이 깃들어 있다. 사진 유청오, 경기정원문화박람회 제공
원형을 그리며 땅속으로 파고든 길, 그 길을 걷는 이의 양옆에는 강원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버리기 위해 허문 담돌을 가져와 쌓은 담장이 펼쳐진다. 담 주변에 식재한 갯버들, 인동초, 작은 유충이나 애벌레들이 서식할 덩굴식물 등을 바라보며, 돌 위에 새겨진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미당 서정주 시인)”와 같은 문구를 손으로 짚으며 걷다 보면 나오는 돌계단. 그 위에 팽나무 한 그루가 꼿꼿하게 서 있다. 정원의 이름은 ‘혼자 웃는 까닭’이다.
2011년 첼시 플라워 쇼에서 금상과 최고상을 동시에 수상한 ‘해우소: 마음을 비우는 곳’. 몸과 마음을 비워 스스로 자유로워지던 선조들의 철학, 우리가 먹고 배출한 것이 다시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지는 생명의 순환에 대해 말한다.
영국 국왕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한국 정원
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된 2011년 첼시 플라워 쇼 아티즌가든 부문 금상과 최고상 수상작 ‘해우소: 마음을 비우는 곳’은 화장실을 ‘근심을 푸는 곳’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라고 칭하던 선조들의 이야기를 표출한 정원이다. 해우소에서 몸을 비우고 마음을 비워 스스로 자유로워지던 선조들의 철학뿐만 아니라, 우리가 먹고 배출한 것이 다시 자양분이 되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고 식물을 자라게 하는 생명의 순환까지 상기시킨다. 2012년 첼시 플라워 쇼 쇼가든 부문 전체 최고상과 금상을 수상한 ‘고요한 시간: DMZ 금지된 정원’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아름다운 원시림으로 다시 태어난 비무장지대에 서린 자연의 재생력과 치유, 회복의 철학을 표현했다.
우리나라 자생종, 특산종만이 지니고 있는 선·형· 색을 극대화해 지리산 약초 군락지를 표현한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는 사람과 자연이 공생하는 원리와 질서, 공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 Adelina
그리고 지난해, 11년 만에 첼시 플라워 쇼 쇼가든 부문 금상을 거머쥐게 한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는 지리산 동남쪽 약초 군락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지리산은 한국의 어머니 산이라 불리죠. 한국 최후의 원시림이며 1천여 종의 약초가 자라는 한국 식물의 종자 은행과도 같은 곳이에요. 정원 콘셉트는 병원과 약국이 생겨나기 전 우리의 생명과 건강, 삶의 질을 담당하던 산이 곧 병원이고, 약국이었다는 점에서 출발했어요. 동양에서 사람의 몸은 자연의 운행과 동일하다 여기죠. 모든 세계와 인류가 연결되어 있듯, 그 공생의 원리와 질서 및 공존에 대한 이야기를 민간 약초의 생장 환경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지구 반대편 영국에 한국 지리산의 약초 군락지를 표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특히 이번에는 탄소 발자국 문제로 영국 현지에서 지리산의 독특한 지형적 특색과 원시적 힘을 대표하는 편마암 바위와 한국 자생종, 멸종 위기 식물을 찾아야 했다. “지리산 느낌의 편마암을 찾기 위해 동서남북으로 영국 땅을 뛰어다녔어요. 한국 식물은 북쪽의 노스웨일스에서 간신히 찾았죠.”
2023 첼시 플라워 쇼에서 선보인 정원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 안에 세운 약초 건조장은 이후 찰스 3세의 개인 별장인 샌드링엄 캐슬에 이설됐다. © Adelina
어렵게 수급한 식물과 자재를 바탕으로 1mm 선태식물부터 10m 서어나무까지 높이의 단계를 최대한 많이 쪼개 공간에 깊이를 더하고, 우리나라 자생종·특산종만이 지니고 있는 선·형·색을 극대화한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는 현지에서 극찬을 받았다. 특히 영국 국왕 찰스 3세는 직접 첼시 플라워 쇼에 세 번 이상 출전했을 정도로 정원 사랑이 지극한 것으로 유명한데, 국왕 즉위 이후 처음 찾은 2023 첼시 플라워 쇼에서 한국 정원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를 가장 먼저 방문하고 오랜 시간을 보내 화제를 모았다. 쇼가 끝난 이후 ‘백만 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 안에 세운 약초 건조장을 올봄 자신의 개인 별장인 샌드링엄 캐슬에 이설했다. 또한 정원을 채운 한국 식물은 3천여 명의 정서적 치유를 도울 수 있게 영국 매기 재단 정원에 기증되었다.
“한국 정원의 미학은 ‘무심함’이라 생각해요.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대한 선조들의 깊은 존중이 느껴지죠.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지니며,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는 정원을 유연하게 해요. 첼시 플라워 쇼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한국 정원은 흐르고 있어요’ ‘매번 볼 때마다 달라 보이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같은 반응을 보였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작가가 주로 선보인 한국 정원이 아닌 열대 식물을 활용한 프로젝트란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 2024 싱가포르 가든 페스티벌의 ‘SUNKISS: 붉은 씨앗’.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한 인류의 과거와 현재 및 미래를 바라보고, 기후 환경 위기에 처한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대상은 무엇인지를 상기시킨다.
단 하나의 식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올해 황지해 작가는 고양국제꽃박람회, 전주정원산업박람회, 싱가포르 가든 페스티벌, 경기정원문화박람회 등 수많은 가든 쇼 참가 및 10월 25일 공개 예정인 뉴욕 한국문화원 정원 조성, 2025년 첼시 플라워 쇼 준비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중 8월에 개최한 싱가포르 가든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정원 ‘SUNKISS: 붉은 씨앗’은 황지해 작가에게 새로운 도전이었기에 특히 의미가 있다. “싱가포르 가든 페스티벌에는 판타지 가든이라는 카테고리가 있어 실험적 정원을 시도해볼 수 있어요. 올해 주제는 ‘열대지방의 자연과 생태를 찬양하라’였습니다. 뜨거운 태양을 머금고 자란 열대식물은 지구 생태계를 상징하고, 창조적 본능을 일깨우죠. 이러한 열대식물로 조성한 정원을 통해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예측해보고자 했죠. 그리고 기후 환경 위기에 직면한 지금 지구 최후의 보호막이 무엇인지, 또 우리가 지켜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묻고자 했어요.”
그동안 주로 선보인 한국 정원이 아닌 열대 정원이라는 점에서 황지해 작가에게 새로운 시도였지만, 사실 그동안 그가 작업한 모든 정원의 근원은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
“모든 프로젝트는 땅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이야기에서 출발해요. 본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이름을 찾는 것에서 시작하죠. 저는 제가 만든 정원이 어떤 대단한 예술을 논하기 이전에 다음 세대를 위한 실질적 준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커요. 그래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늘 생태적 양심, 미학적 양심을 묻고 답하는 과정을 거치며,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식재 디자인을 선보이고, 자연의 순리에 동참하는 설계가 되게끔 고민합니다.”
10월 말 공개하는 뉴욕 한국문화원 정원 프로젝트의 디자인안. 전남 담양의 소쇄원 내에 있는 담장 애양단에서 영감을 받았다.
<행복>과 두 번째 만나고 나흘 뒤 황지해 작가는 뉴욕 한국문화원의 정원을 조성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기사가 독자들에게 가닿을 무렵 공개 예정인 뉴욕 한국문화원의 새로운 정원은 전남 담양의 소쇄원 내에 있는 담장 ‘애양단’을 모티프로 한다. 소쇄원은 조선 중종 때 학자 양산보가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화를 입자 벼슬을 단념하고 초야에 묻혀 살면서 만든 별서 정원이다. 소쇄원 담장의 미기후가 길러낸 키가 작은 제비꽃, 넉줄고사리, 인동초, 바람꽃 등은 약 11,000km 떨어진 뉴욕 한국문화원 담장으로 건너가 소쇄원의 독특한 지형적 특징이 만들어낸 생태 환경을 고스란히 보여줄 예정이다. 더불어 이 프로젝트는 뉴욕 맨해튼 중심에서 선보이는 첫 한국 정원이라는 점에서도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프로젝트마다 정원의 모티프와 그 안에 심는 수종은 다르지만, 늘 인간과 자연의 공생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전하는 황지해 작가에게 정원 디자이너로서 최종 목표를 물었다.
“평생의 터를 가지고 싶어요. 한 장소에서 하나의 나무를 매일 아침 바라볼 수 있고, 하나의 꽃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는 곳. 아침 해와 저녁노을이 꽤 길어서 하루의 대부분을 식물과 함께 보낼 수 있는 곳요. 그런 터 안에서 살아가며, 죽기 전 단 하나의 식물이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사람으로 살다 간 존재가 될 거예요.”
황지해 정원 디자이너가 추천하는 영감과 사유의 정원
재단법인 한택식물원
한국의 자생식물이 잡초처럼 홀대받던 1970년대 말, ‘우리나라에 세계적 식물원을 만들어보자’라는 목표로 시작해 40여 년이 지난 지금 20만 평에 달하는 부지 안에 자생식물 2천4백여 종(초본 1천7백여종, 목본 7백여 종)과 외래 식물 7천6백 여 종 등 1만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총 33개 테마정원 및 야외 공연장, 영상 및 전시실, 쉼터, 식당, 카페, 기념품 숍, 식물 판매장 등을 갖췄다.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한택로 2 문의 031-333-3558
“국내 최대의 사립 식물원으로 한국의 귀한 자생종을 만날 수 있어요.”
베케
평강식물원, 비오토피아 수·풍·석 박물관,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암석원 등을 탄생시킨 서귀포 태생의 조경 전문가 김봉찬 대표의 조경 설계, 설치미술가 최정화 작가의 기획과 자문, 에이루트건축사사무소의 건축이 어우러져 탄생한 제주의 카페와 정원. 지난 2023년에는 정원 중심의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리뉴얼을 거쳤다. ‘천연 굼부리 위에 지은 집’을 콘셉트으로 굼부리 형태로 파낸 땅 위에 조성한 자연과 인공의 어우러짐이 극대화된 노각나무 숲, 한라산의 계곡처럼 절벽 위에 풀과 나무가 자라는 베리정원, 오름의 습한 초지대를 표현한 사초정원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주소 제주도 서귀포시 효돈로 48 문의 064-732-3828
“제주도 자연의 속살을 한 조각 떼어내 도심 속에 옮겨놓은 듯한 곳이에요. 인위적인 것 없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정원을 만끽할 수 있죠.”
마이알레 과천빌리지
자연을 곁에 둔 삶의 가치를 의식주 생활 전반에 걸쳐 전하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마이알레. 본점인 마이알레 과천빌리지는 정원을 중심으로 카페, 레스토랑, 리빙 숍이 모인 복합 문화 공간이다.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키운 유기농 채소와 허브를 사용한 요리를 즐기고, 친환경 공정 무역 기업의 제품을 향유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주소 경기도 과천시 삼부골3로 17 문의 0507-1344-1794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재조차 특별하게 보이도록 디스플레이해 식물에 관심이 없는 이들의 마음까지 빼앗죠. 자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어요.”
― 기사 전문은 <행복> 11월호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