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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덩골정원 자연으로 빚은 한국의 시간
경기도 양평, 메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산골짜기에 메덩골정원이 자리 잡았다. 20만㎡ 규모의 드넓은 정원에서는 거니는 발걸음마다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이야기가 흐른다.

메덩골 한국정원. 원래 지금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풍경이 자연스럽게 안착해 있다.
서울에서 차로 한 시간 반, 빌딩 숲을 벗어나 바깥 풍경이 온통 푸르러진 뒤에도 한참을 지나 도시가 거의 잊힐 때쯤 메덩골정원이 등장한다. 매봉산과 구락산 자락에 폭 감싸인 이곳은 메꽃이 많이 피는 골짜기라 하여 예부터 메덩골이라 불렀다. 메덩골정원의 설립자는 야생의 자연과 더 가까운 이곳에 한국 역사와 철학을 담은 정원을 조성하고 메덩골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진원 대표. 설립자와 뜻을 함께해 팀에 합류한 뒤 지금의 메덩골정원을 완성했다.
메덩골정원의 시작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립자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한 국가의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장소가 곧 정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나 한국은 급속한 산업화를 겪으며 정원 문화를 고민하고 만들 여유가 없었고, 자연히 그러한 장소도 부재했다. 정원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공간이 정원 형태로 탄생한다면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보여주고, 사회에도 기여하는 유산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직접 프로젝트를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설립자와 뜻을 함께해 팀에 합류한 뒤 지금의 메덩골정원을 완성한 최진원 대표는 정원을 ‘예술의 종합체’라 표현한다. “예술이 어려움을 극복한 끝에 영속하는 가치를 일구어낸 것이라면, 이를 공간으로 구현한 것이 곧 정원입니다. 자연과 인간, 시간, 문화, 그 모든 것의 합작품인 거죠.”


사각 연못 함소연과 파청헌, 붉은 산단풍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해 선비들의 풍류를 표현했다.
월드클래스 정원을 목표로 했기에 부지는 외국인도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서울 근교의 장소를 찾았다. 서울에서 차로 한 시간 반이 넘지 않는 거리를 기준으로 넓은 땅을 수소문한 끝에 발견한 곳이 바로 메덩골이다. “두물머리를 비롯해 우리가 흔히 양평 하면 떠오르는 장소는 대개 서쪽에 있습니다. 이곳은 동쪽에 위치해 관광객이 많지 않고 상업적 분위기도 덜합니다. 주변은 대부분 국유림이라 앞으로 개발될 여지가 적고요. 수익을 생각하면 불리한 조건이지만, 완성될 풍경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좋았습니다. 주차장이 자리한 입구만 좁게 나와 있고, 나머지는 주변 산이 품고 있어 위요하는 듯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고요.”


건축가 승효상이 병산서원을 모티프로 설계한 선곡서원.
메덩골은 정원이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곳이 아니라, 사색하고 정서적으로 치유하는 공간이 되길 바랐던 그들의 뜻에 잘 부합하는 입지였다. 2016년 부지를 매입한 이후 한국의 정서를 주제로 하는 한국정원, 프랑스 정원 스타일로 철학과 인문학을 표현한 현대정원 두 영역으로 나누어 본격적인 기획에 돌입했고, 내년 봄, 2만㎡ 규모의 한국정원이 먼저 개관을 앞두고 있다.


자연의 언어로 한국 정서를 그리는, 메덩골 한국정원
한국정원은 민초들의 삶, 선비들의 풍류, 한국인의 정신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한국 정서가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첫 장면은 동요 ‘고향의 봄’을 묘사한 정원이다. 눈높이에는 개복숭아 열매가, 발이 닿는 땅에는 진달래꽃이 피어난 과수원길의 정경이 우리 맘속에 내재한 고향의 심상을 일깨운다. 고향의 봄은 벼와 목화, 들깨가 자라는 남도돌담길로 이어진다. 이재연 조경가는 밭 정원을 만들어달라는 미션을 받자마자 영화 <서편제> 속 진도아리랑 가락이 흐르던 청산도의 길을 떠올렸다고. 돌담은 공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돌을 모아 낮게 쌓고, 그 시절 논밭에 자라던 작물을 심었다. “전통 정원 하면 흔히 떠올리는 궁궐 정원 대신 정말 한국적인 풍경과 정신은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고향의 봄’ 속 과수원길이나 남도돌담길의 밭길, 메덩내의 빨래터는 지금까지 정원으로 표현된 적은 없으나, 한국의 정서를 지닌 장면을 찾아 구현해낸 결과물입니다. 만들고 보니 한국의 정서는 길이라는 장소성과 많이 맞닿아 있더라고요.”


낮은 돌담 너머로 벼와 들깨, 고추 등 논밭의 작물이 자라는 남도돌담길.
구불구불 굽이진 길은 지나온 곳도, 앞으로 펼쳐질 곳도 쉽게 보이지 않아 지금의 풍경에만 오롯이 집중하게 한다. 그렇게 한참 오르다 보면 반듯하게 오와 열을 맞춘 한옥과 마당이 두 번째 장에 들어섰음을 알린다. 이름에서부터 그 운치와 기백이 느껴지는 정원 ‘선비들의 풍류’다. 기하학적 배치로 놓인 파청헌과 사각 연못 함소연은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술을 마시던 유상곡수의 즐거움을 묘사하고, 그 옆에 산단풍 한 그루가 섬처럼 서 있는 모습이 화룡점정을 이룬다. 건너편 재예당載藝堂은 한국정원의 하이라이트다. 커다란 향나무와 바위 하나만 놓고 드넓은 정원을 그저 비워두었는데, 그 고요함이 되레 강하고 신비롭다. 이곳 한옥 툇마루에서는 국악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낮은 담장 너머로 주변의 경치까지 무대의 일부가 되어 더욱 영화 같은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건축가 승효상은 선곡서원의 실내를 거니는 동안 주변의 자연을 계속 조우하도록 설계했다.
마지막 장 ‘한국인의 정신’에서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서 있는 경주솔밭, 서애 유성룡 선생을 따르는 유생들을 커다란 돌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으로 표현한 돌정원이 등장하고,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선곡서원이 대미를 장식한다. 선곡서원은 조선 시대 성리학을 계승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곳이던 서원 중에서도 건축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병산서원을 모티프로 한 현대판 서원이다. 누대 아래로 진입해 카페와 전시실, 서재를 산책하듯 거닐다 취병루의 누각에 오르면 병산서원의 만대루처럼 기둥이 빚어내는 프레임 너머로 바깥의 돌정원과 경주솔밭이 펼쳐지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땅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한국정원 바로 옆에 5만㎡ 규모로 들어설 현대정원은 지금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다. 최진원 대표는 이곳을 ‘정원이지만 미술관처럼 지적 영감을 얻는 장소’라 소개한다. “한국정원이 한국의 정서를 우리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면, 현대정원은 철학과 인문학 그리고 한국의 현대사 등 지금의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정원마다 주제가 명확하고, 표현도 더 추상적이어서 하나하나 미술품을 관람하듯 감상하기를 권합니다.”


쪽빛 연못과 정자, 커다란 바위의 탁 트인 정경이 펼쳐지는 용반연龍返淵. 이시희 조경가의 돌 놓는 솜씨가 돋보이는 곳이다.
현대정원은 외국인도 공감할 수 있는 풍경을 짓기 위해 해외 조경가와 정원가의 손길을 빌렸다. 프랑스 세리쿠르 정원의 오너인 조경가 기욤 고스 드 고르가 프랑스 정원의 기법으로 디자인하고, 영국에서 활동하던 정원가 사바티노 우르조가 원예를 담당한다. 두 사람이 지은 경관에 자연 친화적인 미니멀리즘 건축으로 알려진 칠레 건축가 페소 본 에릭사우센이 니체의 철학을 주제로 디자인한 레스토랑, 땅과 교감하는 건축을 추구하는 스페인 건축가 앙상블 스튜디오가 설계한 비지터 센터가 각각 작품처럼 들어설 예정이다.


조경가 기욤 고스 드 고르가 ‘한국의 미래’를 주제로 디자인한 무영원無影苑.
“완성도 있는 풍경을 만들되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보다는 감상하면서 나의 삶도 돌이켜보는 곳이 되길 바라며 지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자연의 모습을 상상하며 조성하는 일이 조경인 것처럼 저희도 메덩골정원이 후세에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를 고민하며 이곳에서 펼쳐질 일들을 하나하나 준비해갈 생각입니다.”
조경가가 자연을 디자인하는 일은 언뜻 신이 지구를 빚어내듯 전지전능한 행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언제나 허리를 숙이고 자연을 선생으로 삼아 그 속에서 배움을 구한다. 한국의 정원은 언제나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그 자체를 즐기는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메덩골정원 또한 자연의 풍경을 넘어서지 않는 겸허한 자세로 그들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땅에 그려내고 있다. 한국정원은 내년 봄 먼저 문을 열고, 현대정원은 내년 이맘때 완공할 예정이다. 그들이 10년 넘게 상상한 이야기가 완성될 순간이 머지않았다. 



메덩골정원을 <행복>에 소개한 장학건설 정세학 대표. 장학건설은 메덩골정원 비지터 센터의 시공을 담당하고 있다. 메덩골 한국정원의 모습을 보고 한국에 이런 정원이 또 있을까 싶었다고. “건축주가 오랫동안 수집해온 바위와 나무로 구현한 정원과 연못, 계곡은 한 폭의 그림처럼 놀라운 풍경이었습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메덩골정원을 만든 사람들

이재연 조경가는 조경 디자인 린 대표로, 과천 국립과학관과 천리포수목원, 인천국제공항 청사 내 정원의 조경을 설계했다. 메덩골정원에서는 한국정원의 모든 조경을 총괄하였고, 현재 진행 중인 메덩골 현대정원의 조경에도 높은 비중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재연 / 조경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원칙은 ‘원래 있던 것처럼’이에요. 풍광 좋은 곳에 손을 댄 듯 안 댄 듯 경치를 더하는 것이 한국정원의 본질입니다. 메덩골정원은 야생의 빈 땅 위에 사람의 손길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정교하게 만들었지만, 마치 본래 이 모습이던 것처럼 존재합니다. 한국정원의 본질을 거꾸로 구현한 것이죠.”


승효상 건축가는 ‘빈자의 미학’이라는 철학을 주춧돌 삼아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건축을 완성한다. 메덩골정원에서는 병산서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선곡서원과 서원 뒤 산길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암자인 경외암을 설계했다.
승효상 / 건축가
“스스로 배우고 성찰하고 사유하는 서원 같은 공간이면 좋겠다 싶었고, 그런 장소를 생각하면 항상 병산서원이 마음속에 떠오릅니다. 독락당이나 통도사, 선암사와 함께 제 건축의 뿌리를 이루는 전통 건축이자 저에게 깊이 체화된 장소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의 풍경을 만들었습니다.”


이시희 조경가는 메덩골정원에서 돌 명인으로 불린다. 길이가 400m에 달하는 계곡 메덩내를 비롯해 이곳에 놓인 모든 돌은 그가 일일이 배치했다. 신이 빚은 것일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놓은 탓에 메덩골 한국정원에서는 돌이 경관의 중심이 되었다.
이시희 / 조경가
“옛날에는 자연의 형세가 멋진 곳에 집 짓고 살았잖아요. 이곳에 그러한 풍경을 짓는다는 마음으로 작업했습니다. 25톤 트럭으로 3백 대 분량이 넘는 돌을 사용했는데, 상상한 정원의 분위기에 맞춰 여기쯤 이런 돌이 놓이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하나하나 배치했습니다.”


기욤 고스 드 고르 조경가는 프랑스에서 조경을 공부하고 아버지를 이어 노르망디에 위치한 세리쿠르 정원(Les Jardins de Séricourt)을 운영, 관리하고 있다. 이곳은 2012년 프랑스 올해의 정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메덩골정원에서는 한국정원 중 무영원과 현대정원의 조경을 맡아 프랑스 스타일이 녹아든 정원을 디자인했다.
기욤 고스 드 고르Guillaume Gosse de Gorre / 조경가
“무영원은 한국의 미래를 표현한 정원입니다. 건너편 재예당에서 보이지 않도록 지면에 낮게 자리 잡은 형태로 설계했어요. 한국이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세계에 위상을 떨치는 모습을 빅뱅처럼 폭발하는 형태로 형상화했습니다. 가운데 심연처럼 자리한 수공간은 지금의 한국 위상이 깊은 역사에서 비롯되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방문객을 성찰의 시간으로 이끕니다.”


사바티노 우르조 정원가는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가드닝을 공부하고 영국 왕립원예협회 대표 정원인 위슬리 정원에서 10년 동안 원예 전문가로 일했다. 메덩골정원에서는 식물을 심고 관리하는 일을 비롯해 디자인에 맞는 수종과 식재 방식을 제안하고, 친환경 가드닝을 연구·실천하고 있다. 이곳의 첫인상을 담당하는 윈터가든이 그의 작품. 한국정원과 현대정원의 특징이 고루 담겨 있으면서 겨울에도 생기 넘치는 정원을 연출했다.
사바티노 우르조Sabatino Urzo / 정원가
“정원을 가꿀 때 미와 기능, 지속 가능성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메덩골정원 또한 다양한 식물이 어우러져 자라는 생태계를 우선순위에 두는 자연주의 스타일의 식재, 직접 배합한 유기농 비료와 퇴비, 토착 식물의 활용 등으로 지역 생태계에 기여하는 정원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글 정경화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