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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
사람, 도시, 역사를 그려온 화가. 선과 색과 형상을 자유롭게 다뤄온, 어디에도 없는 화가 서용선.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내 이름은 빨강>이 내 발목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결국 그달, 양평 문호리에 있는 그의 작업실로 향하고 말았다. 그의 그림도, 작업실도, 아카이브 공간도, 그의 얼굴도 모두 ‘빨강’으로 통했다.

이른바 ‘스트로크’ 스타일의 거친 선으로 그린 자화상 앞에서. 그림이 캔버스 밖으로 걸어 나온 듯 그와 닮았다.
20년 넘게 숱한 화가를 인터뷰해온 나는 늘 차마 건네지 못한 질문을 사려 들고 이만 총총 물러났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에 쓴다. “대체 왜 그립니까?” 아마도 거개의 노화가들이 이리 답하지 않았을까. “그 답을 모른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고. 본디 신이라든지 생명이라든지 예술이라든지 세상의 어려운 것이 모두 ‘모르는 것’으로 결판났으니 말이다. 모른다는 것은 무지몽매와 다르다는 것쯤 모두 짐작하시리라. 모르기 때문에 날마다 새롭게 알아보고 싶어 그리도 많은 예술가가 몸 달아 살았을 것이다.

온 서울이 런던에서 건너온 아트 페어 때문에 “프리즈Frieze, 플리즈Please!”를 외치던 9월 첫 주, 우리는 한국 현대미술의 한 줄기를 채운 화가 서용선을 만나러 양평 문호리행을 계획했다. 그를 만나기 하루 전, 도시의 흐린 삶이 못내 지루한지 날씨마저 흐릿한 오후에 잠시 짬이 생겼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전시가 열리는 아트선재센터에 들렀다. 그를 만나기 전 치러야 할 의무 같았다.

눈부신 청춘 남녀들이 그의 사나운 자화상 그림 앞에서 카메라를 눌러댔다. 고리키 시절 선전선동화처럼 보이기도 하는 역사화 앞에서도 SNS용 사진을 박아대고 있었다. 저 MZ도 아닌 젠지들은 그 예술을 어찌 알아본 걸까. “요즘 젊은이들의 호응에 대해 조금 듣기는 합니다만, 정확한 이유는 몰라요. 그저 제가 늘 의심하고 흔들거리는 자세로 그림을 그려온 것이 젊은이의 감각과 좀 공통되나 봅니다. 어떤 그림은 만화 같고 팝아트 같고, 또 어떤 그림은 실험적이고, 어떤 그림은 구상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보인다더군요. 고정된 걸 반복해서 보여주지 않는 이라고 생각해 그들이 눈길을 좀 주는 게 아닐까요.”


문호리 도로변에 서 있는 빨간 건물 ‘오사’.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이자 아카이브 공간이다. 건축가 정의엽이 설계한 이 건축물은 보는 위치에 따라 평면과 입체를 오간다. 서용선의 회화가 건축으로 구현된 듯한 모습이다.
그때 내 망막을 점령한 그림, 전시장 맨 앞에 버티고 선 ‘빨간 눈의 자화상’은 온통 검붉은색과 짙푸른 색의 선투성이였다. 아니 전시장 안을 채운 거개의 그림이 온통 선 몇 가닥과 색 몇 개로 보였다. 자화상 연작이 그랬고, 단종의 비극이 깃든 청평포 풍경·한일병합의 막후 주역인 미 대통령 루스벨트와 태프트의 초상 등을 그린 ‘역사인물화’가 그러했다. 뉴욕, 베를린, 베이징에서 전철을 타고 다니며 그린 ‘도시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죄다 굵고 거친 선, 회색 지대란 없는 원색 무리가 캔버스를 뒤덮었다.

세부는 생략하고, 그림자도 입체감도 없이 그린 이차원 평면이었다. “물질적 평면성으로 입체적 공간감을 붕괴시켰다”는 조인수 교수의 설명이 딱 들어맞았다. 게다가 그의 그림은 오로지 선, 날카로운 선의 다발로 보였다. 평론가 이선영의 말처럼 “그에게 선은 동시에 색”임이 분명했다. 그는 대체 내면의 어떤 메시지를 저 거친 선과 색에 담은 걸까? 나도 그를 새롭게 알아보고 싶어 몸이 달았다.

1951년에 태어나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몇십 년 살았으며,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2014년 이중섭미술상을 받은 작가. ‘지금 한국 화단의 대표 화가’로 불리는 사람. 간추린 서너 줄짜리 이력만으로는 나의 오래된 질문 ‘왜 그리는가?’의 답 언저리에도 도달할 수 없었다.


어릴 적 살던 한옥을 해체하고, 거기서 나온 고재로 지은 한옥 ‘계성작우溪聲作雨’. 계곡 물소리가 몸속에서 나오는 듯한 경험을 하고 지은 택호다.
결국 도달한 곳이 자기 형상이라는 걸 그는 알까
이튿날, 양평 문호리의 깊숙한 골짜기에 들어서니 그의 작업실이 보였다. 모두 일가친척으로 보이는 비슷한 생김새의 건물 몇 동 사이, 자화상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그가 문을 열어주었다. 어…! 그런데 그는 그림처럼 사나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희喜와 노怒의 파고가 밀려온 흔적조차 없는 눈빛이다. 게다가 그 눈빛은 눈앞 대상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그림 속에서 눈을 부릅뜬 인물조차 정작 바라보는 곳은 외부의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보이던 게 떠올랐다.

작품 관리를 도맡아 한다는 여동생 서명자 씨의 안내로 몇 동이나 되는 창고와 작업실을 둘러보며 우선 그 어마어마한 그림 수에 압도당했다. 그가 스위치로 작동하는 기계처럼 작품 노동에 휘몰렸다는 증거다. 쉼 없이 걷는 삶, 배고픈 날도 걸어가는 삶이 바로 작가의 삶임을 그 무수한 캔버스 수가 보여준다. 그리고 몸뚱이를 드러낸 그 그림들은 심해어 같았다. 수압을 견디기 위해 두께 대신 길이만 택한 심해어처럼 그의 캔버스 속 형상은 입체적 공간감을 버리고 물리적 평면성을 택한 채였다. 그 형상이 자화상이든, 맨해튼 상업 지구 귀퉁이의 퇴역한 노동자이든, 강원도 철암의 탄광촌 풍경이든 그러했다. 그리고 그 모든 형상이 그와 닮아 보였다.


작업실 한쪽, 나무 포크에 물감을 묻혀 스케치 중이다. 
평생을 충직한 농부에서 모범을 삼은 사람처럼 고되게 그리며 새긴 것이 다름 아닌 자기 형상이라니. 그도 결국 도달한 곳이 자기 형상이라는 걸 알까. 거울이나 연못에 비친 반영 말고는 기실 제 눈으로 자기 얼굴 한번 제대로 본 적 없는(모든 인간이 그렇다!) 화가의 눈과 손이 세계를 더듬어 결국 자신의 본을 떴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자화상은 실제로 그린 순간 실패하는 그림이에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모습은 절대 안 나와요. 그래서 화가로서 가장 비극적인 그림 중 하나가 자화상이죠. 그런 점에서는 시시포스의 신화와 같은 점이 있어요. 그래도 먼저 그린 그림과 다음에 그린 그림은 차이가 있어요. 그것 때문에 하는 거예요.”(그의 작품집 <서용선 2008→2011> 중)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비극적이라던 그 그림이 굳이 자화상이 아닌데도 자신을 닮아버렸다니, 그는 대체 얼마나 끝없이 그려온 걸까.


연대별로 정리해둔 자신의 전시 도록과 포스터.
그의 집 이름은 빨강인가
그러고 보니 그의 집도 어딘지 그와 닮아 보였다. 무뚝뚝하게 생긴 건물 몇 동, 그 사이 어릴 적 살던 집의 고재를 뜯어다 만들었다는 한옥, 이곳에 오는 길목에서 만난 빨간 새 건물 ‘오사’까지. 우선 그는 비슷하게 생긴 저 회색 작업실과 창고 몇 동이 건축가 김광현(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설계라고 귀띔했다. 작업과 보관이라는 필요한 기능만 남긴 그 건물 속 무수한 캔버스 무리, 세밀한 분류법으로 꽂힌 책, 그만큼 나이 든 지류 보관함, 간단한 작품 촬영을 위한 세트… 그 사물들이 기억하는 몇십 년의 시간이 층적운처럼 쌓여 있었다. 햇살을 등진 채 포크에 잉크를 묻혀 그리고, 3×5m짜리 캔버스에 사다리 타고 매달려 그리고, 마당 한 귀퉁이에서 도르래를 옮겨가며 거대한 목조 조각을 만들고…. 그도 몇십 년의 시간을 그 자리에서 층적운처럼 쌓여 있던 것 같다.

그리고 문호리 도로변에 조각 작품처럼 놓여 있는 문제의 그 빨간 건물 ‘오사’. 최근에 화가 서용선의 작품 전시와 아카이브 목적으로 지었다는, 일정 부분은 출판사 ‘연립서가’를 운영하는 조카의 사무실로 쓴다는 그 건물은 아주 묘했다. 정면에서 보면 19×19m짜리 납작한 정사각형 건물인데, 몸을 조금만 움직이면 두께 7m짜리 두툼한 직육면체가 된다. 좀 더 지나서 바라보면 다시 평면이 되어버린다. 

아, 그러고 보니 정사각형은 확실하지만 정육면체는 아닌 건물이다. 거대한 박스를 밑에서 올려다보면서 그린 듯한 그 건축물은 바로 평면적 입체와 입체적 평면 사이에 존재하는 그의 그림을 빼다 박았다. 높이 2.2m 규격의 가늘고 긴 거푸집으로 만든 격자 패턴은 그의 도시화 속 격자무늬 같다. 게다가 암적색에 가까운 그 색! 이 건물의 이름도 빨강이다. “그의 그림에서 비롯한 익숙한 공간지각과 이미지에 대한 비틀기는 이 건물의 설계 방향이 됐다”(월간 8월호 기사 중)는 건축가 정의엽의 설명처럼 이 건물은 ‘건축이 된 회화’와 다름 없다.


작업실과 작품 수장고 등으로 쓰는 건물 몇 동은 1995년부터 2012년까지 건축가 김광현이 설계했다.
“제 작업을 하면서부터 끊임없이 공간을 개선하려고 노력했어요. 다른 걸 포기하더라도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쪽으로 최선을 다해보자 했죠. 한 화랑이 절 지원해서 중국에 갔는데, 레지던스로 쓰는 건물이 전에 중국 공산당이 선전용 책을 인쇄해서 쌓아두는 창고였어요. 한 백 평짜리 창고가 야전 천막촌처럼 늘어선 규모에 놀랐고, 그 거대한 창고 안에서 중국 작가하고 단둘이 서로 벽 보며 작업해야 하는 것에 놀랐죠. 만주의 고구려 산성에 올라서도 비슷했어요. 고구려인이 산꼭대기에다 방어 진지를 치고 중국과 맞서던 그 광막한 역사를 우린 잊었구나, 우리 교육은 이렇게 왜소한 감각만 강요했구나…. 공간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력을 깨달았죠.

그래서 무리해서 건물을 짓고 공간을 개선해왔어요. 사실 이 이야기는 위험스러운 면이 있죠. 많은 예술가가 악조건 속에서 작업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젊은 작가, 어려운 작가일수록 그런 꿈을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사실 빨간 건물 ‘오사’는 튀어요. 빨간색도 익숙한 벽돌의 붉은색이 아니에요. 제가 직접 조색한 콘크리트용 스테인을 덧바른 건데, 더 원초적인 붉은색 덩어리로 보이고 싶었어요. 흉측하다는 이, 좋다는 이 반반인데 그런 위험을 알면서도 ‘낯선 지각적 경험’을 주고 싶었죠. 논란이 돼볼 필요가 있는 거지.”

고승처럼 내가 사는 방을 내 마음의 적멸보궁으로 삼는 마음은 아니겠지만, 공간 또한 예술가가 열망한 세계의 표현이란 걸 그 빨간 건물이 웅변한다.


오는 11월, 문화비축기지에서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제로 한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1923년 전남 신안군의 암태도에서 일어난 소작농들의 쟁의를 벽화, 입체 작품, 영상 등으로 재조명할 예정이다. 지금 한창 그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그의 예술은 빨강인가
이번 전시 제목은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이다. 오르한 파무크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 따온 것이라는데, 작명이 심상치 않다. 전시를 기획한 아트선재센터 김장언 관장이 주목한 건 소설 속 오스만튀르크 궁정화가들의 음모와 배반이 아니다. 소설 속 궁정화가들은 서양에서 전파된 원근법 원리에 반발한다. “일상 사물과 사람을 실감나게 본뜨는 원근법 앞에서 그동안 우리가 그려내려 한 신과 권력은 어떤 의미가 있나.” “일상을 묘사하는 신세계가 신의 존재 같은 본질을 파고드는 그림보다 우선이라면 굳이 그림의 깊이나 의미를 따질 필요가 있나.” 4백여 년 전 오스만튀르크 궁정화가들의 고뇌는 역사와 신화, 인간의 삶과 죽음, 지리산과 맨해튼 지하철 풍경이 뒤엉킨 서용선의 예술과 그 문제의식이 맞닿아 있다.


오는 11월 문화비축기지에서 전시하는 암태도 소작쟁의 벽화를 한창 작업 중이다. 그 뒤로 그의 어마어마한 작업량을 엿볼 수 있는 무수한 캔버스가 놓여 있다.
“처음 그림을 시작했을 땐 절대적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으로 소나무를 누가 봐도 놀랄 만큼 사실적으로 그렸어요. 1년 동안 이파리 하나하나 호흡을 멈춰가며 그리다 그만 기절해 바닥에 쓰러졌어요. 그때 깨달았죠. 지금 이 순간에도 자라나고 바람에 흔들리는 이 무한한 존재를 그리려면 나도 무수히 흔들려야 하는구나. 그때부터 역사도, 인간도, 신화도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콴튬 메카닉스라 하죠? 분명히 눈으로는 물이고 산이지만 그 속의 세포, 분자, 원자에는 어떤 공통분모가 있잖아요. 내가 그동안 바라본 역사도 국가주의적 역사로만 볼 게 아니라 어느 개인의 역사, 가계의 역사처럼 더 확대해서 들여다봐야겠구나, 이거야말로 역사관의 확대구나 생각했죠.

그래서 1987년부터 시작한 게 ‘단종 시리즈’예요. <조선왕조실록>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실패한 사람 단종의 이야기를 지역에 남은 설화나 전설을 채집해가며 그 이야기에 생명을 주고 싶었죠. ‘도시 시리즈’도 비슷해요.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 하는 것만 권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도시에서 이탈하지 않으려 좇는 유행, 시대감각 이런 것이 또 다른 권력이겠구나 싶었죠. 이데올로기의 역사가 아니라 삶의 역사가 그림에 담길 수 있겠다 싶었고요.”


작업실 건물에 질서 정연하게 자리한 입체 작품.
어디서도 근거점을 찾기 힘든 그의 그림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그림에 이야기가 너무 많다, 문학적이다”는 비판을 들었고, 사람들은 그 그림의 부류를 ‘역사화’ ‘도시화’로 뭉쳐 불렀다. “제게는 역사적 사실보다 이야기 자체가 중요했어요. 문학적 접근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이 문제는 이야기를 문학과 역사로 구분할 수 있나 하는 문제로 이어져요.”(작품집 <서용선 2008→2011> 중)

맙소사! 알 듯 모를 듯 강물처럼 이어지는 그 이야기 끝에 내가 매번 묻지 못하던 질문 “왜 그립니까?”에 대한 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림은 편협한 매체예요. 세계는 3차원적 깊이를 지니는데 그림은 그걸 고정하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그게 그림의 존재 이유죠. 그림은 세계의 흐름을 하나로 압축해 표면화하거든요. 세계를, 인간을 이미지로 재현해본다는 건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에요. 누군가 남의 행동을 따라 하며 동질성을 갖는 것, 그건 생명의 본능이거든요. 실제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 사람도 삶 속에서 그렇게 자기를 표면화해야만 존재할 수 있고요.”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 중인 전시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 왼쪽 그림은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정치인으로 신분을 바꾼 군인들을 그린 '정치인'(1984), 그옆 그림은 한일병합의 주역이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태프트의 초상을 그린 작품들이다. 9월 15일부터 회화와 입체 위주로 구성한 3부 전시가 진행 중이다. 사진 제공 아트선재센터.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바다제비는 겨울을 날 수 없는 법이다. 그가 아무리 예술을 이야기해도 예술 하지 않는 우리는 그 깊은 의미까지 꿰뚫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가 건넨 ‘표면화’ ‘관계’ ‘동질성’ ‘생존’ 등의 단어가 빨간 펜으로 칠한 듯 자국을 남긴다.

플라톤은 철인이 통치하는 이상 국가에서 화가와 시인을 추방했다. 화가는 참된 실체가 아닌 감각적 사물만을 모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미술이 이상 국가로 타임슬립한다면 그는 추방당할 것인가? 그가 그려온 것은 참된 실체일까, 감각적 세계의 단면일까? 나는 아직도 그 답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름다움의 끝자리에 놓인 건 결국 인간의 얼굴, 인간의 도시라는 걸 그의 그림이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빨갛게!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박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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