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우 작가는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에서 예술사를, 2008년 예술전문사를 마쳤다. <뒹굴뒹굴>(The Great Collection), <쌍 Pairs>(송은아트스페이스), <긴, 납작한, 매달린>(아트선재센터 프로젝트 스페이스), <물건 방식>(갤러리 팩토리), <사건의 지평선>(대안공간 루프) 등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은우, 홍범: 실내 Interior>(누크갤러리), <김도균, 이은우: 74cm>(누크갤러리) 등의 2인전, <아직 모르는 집>(아트 스페이스 풀), (문화역서울 284) 등에 참여했다.
신동엽 시인 식으로 하자면 ‘삼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가 마땅하지만 이은우 작가는 껍데기, 외피, 형식에 관대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붙든다. 가성비의 은총을 입은 시트지, 합판, 플라스틱 같은 것 말이다. 원목보다 합판에, 진짜 돌보다 플라스틱 바위에, 벽돌보다 시트지 같은 껍데기에 마음을 쓰며, 그 사물에도 삶을 대하는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모눈종이 위에 선을 긋고, 원을 그리고, 끌로 단면을 말끔히 절단한 시트지를 붙이고…. 그리하여 완성한 기계의 설계도 같은, 놀이동산의 평면도 같은 드로잉. 그 도형들은 종이 위를 벗어난 후 작가의 관절을 괴롭힌 노동 끝에 책꽂이인지 가림막인지 용도를 알아채기 어려운 입체 조각으로 변화한다. 의미 없음으로 무장한 외피의 의미 있음, 쓸모없음으로 무장한 껍데기의 쓸모 있음! 성실하게 완성한 그 형상 앞에서 그는 되뇔 뿐이다. “나는 이 물질세계에서 정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가구 같기도, 조각 작품 같기도 한 이은우 작가의 물체 중 하나. ‘물건 6(걔), The Object 6(Them)’, white oak·brass·billiard ball·iroko, 25×17.5×15cm, 2022
‘그리기 Drawing’ 연작(3월호 표지 작품을 포함한)은 모눈종이 위에 파스텔로 그린 기하 도형인 줄 알았는데, 비닐 시트(일명 시트지)가 주재료였군요!
시트지는 무척 재미있는 재료예요. 요즘엔 PVC를 직조한 것처럼 인쇄해 천의 질감까지 살린 것도 있어요. 그게 참 흥미로워요. 다 가짜잖아요. 이렇게 인쇄로 질감이나 형태를 흉내 내어 진짜인 척한다는 게 말이에요. 제 자신을 투영하는 것 같아서 감정이입도 되고요. 그래서 더더욱 비닐 시트지를 이죽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매일 아침 작업실에 오면요, 타이머를 맞춘 후 5mm 단위로 점이 인쇄된 몰스킨 수첩에 날짜를 쓰고 드로잉을 해요. 구도를 잡거나 하진 않고요. 점과 점을 잇는 직선이나 호를 하나 그리고, 그에 맞는 도형 하나를 완성하고, 스캔하듯 죽죽 기하 도형을 연결하고, 도형 사이에 시트지 조각을 올려보고, 색연필로 재질을 입히고…. 이게 하루를 시작하는 저의 루틴이에요.
그러고 보니 시트지를 칼로 자르는 게 아니라 조각하듯 끌을 대고 망치로 내려치던데요. 그렇게 해서 나온 예리한 선의 드로잉은 마치 부조 같기도 하고, 전기회로 같기도 해요. 아! 집 같은 형상도 보이고요.
맞아요. 저는 납작해 보이는 이 드로잉 시리즈가 입체 작업의 연장이라고 생각해요. 제게는 조각적으로 느껴지거든요. 그리고 이 드로잉에는 집이 많이 등장해요. 제가 집이 없어서 그런가, 하하. 저는 공간에 대해, 특히 실내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지난번 전시의 콘셉트도 ‘거실’이었으니까요. 거실은 사적 공간이자 다수가 이용하는 공동 공간이잖아요. 손님이든 친족이든 이웃이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 그 안을 채우는 다양한 물건에 관심이 많아요. 부모님이 오랫동안 집과 관련한 일을 해서 집에 항상 재료와 샘플이 넘쳐났는데, 그런 데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작업실 한쪽 벽을 차지한 ‘빨간 책장’, MDF·urethane paint, 206×30.5×187cm, 2016/ 2017. 그 안의 사물도 이은우 작가가 산업 재료의 물성과 쓰임, 규격, 양식 등을 재해석한 오브제 작업이다.
“사물이 담은 관념적 가치보다 외피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는 작가”라는 설명이 유달라 보였어요. 보통은 ‘외피=형식=본질이 아닌 것’이라고 소홀히 대하기 마련이잖아요.
제가 이 재료를 다루기 위해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어떤 업체를 찾아가야 하는지 깐깐하게 따지고 있더라고요. ‘색깔은 어떤 색? 무광 또는 유광?’ 이런 것도 꼼꼼히 살피면서 ‘아, 내가 작품으로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지금 따져 묻는 그 사물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그냥 이것 자체에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미술관에서 소장품을 다른 미술관에 대여해줄 때를 떠올려보세요. 미술사적 가치, 비평적 가치보다 어디 망가진 곳이 없나를 먼저 따져 묻게 되죠. ‘아, 어느 순간에는 예술도 물건이 되는구나, 어떤 형식으로 귀결되는구나’ 그런 걸 저도 느꼈어요. 그때부터 물질 자체에 관심을 가졌죠.
모눈종이에 선을 긋고 시트지를 붙인 이 드로잉은 실제로 나무나 스티로폼, 스틸 등을 이어 붙여 입체로 만들기도 하잖아요. 그 입체 작품은 단지 공간에 놓이는 장식품인지, 실용적 가구인지 정체를 잘 모르겠고요.
꽤 일찍부터 작가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범위의 작업을 했어요. 어느 순간 몸으로 좀 일해야겠다 싶어서 배운 게 목공이었죠. 그러면서 자연스레 가구를 만들게 됐고요. 사물의 관념과 가치보다 외피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미술이, 제 작품이 실제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막막함에서 출발한 거예요. 드로잉 작업이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저 친구들을 실제 만질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들 수 없을까 고민했죠. 그렇게 만든 입체 작품의 정체요? 제가 쓴 작가 노트가 있어요. “사물의 본질은 다른 사물과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그것이 상품인지 예술인지, 유용한지 유용하지 않은지는 그 사물이 어떤 문화적 제도와 관습에 근거하는가, 또 어떤 의도로 제작하고 어떤 범주의 사람이 소비하는가 등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취미로 목공을 하는 아저씨들은 월넛을 그렇게 좋아하고, 디자이너들은 자작나무 합판을 즐겨 쓰잖아요. 공사 현장에선 일반 합판을 쓰고요. 이게 그 사물의 문화적·사회적 위치겠죠. 저는 사물이 지닌 관념적 의미보다 그 사물이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유통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어요. 이런 관습적 용법(usage)을 찾아내고, 성질이 다른 사물과 결합해보고, 그게 제 작업으로 발전해나가고…. 이런 게 흥미롭거든요.
'탁자’, red pine, 40×120×60cm, 2017~2021.
“이은우의 작품은 디자인이 아니다, 조각이 아닐 수도 있다, 가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공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런 감상은 괜한 게 아니군요! 거슬러 올라가 2010년대 전후 작품을 보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던데요. 레닌이 제작한 대지주와 소농의 토지 소유 비율 그래프를 한국 장애인과 여성 등의 실태로 변주한 작품(‘무제’), 미국 전시정보국에서 촬영한 폭격 사진의 화염 부분을 캔버스에 옮긴 작품(‘어느 멋진 날 by owl’), 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매매가 3억 원의 전국 아파트 평면도를 크기, 실거래가 등으로 재배열한 작품(‘300,000,000 KRW, Korea, 2010’)….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나요?
스물몇 살 때였으니까요. 그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품고 있었죠. 그런데 미술에서 정치·사회적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 메시지가 무력해진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죠. 그건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미술 안에서만 공회전되는 이야기니까요. 그래서 기계적으로라도 시민으로서 나와 작가로서 나를 분리하기 시작했어요. 비로소 편안해졌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보다 제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게 됐죠. 그게 사물의 이야기였어요.
사물의 표준 규격, 쓰임새, 재료의 물성에 대해 탐구한 결과물인 ‘그리기 Drawing’ 연작, pencil·color pencil, adhesive vinyl sheet on graph paper, 30×21cm (A4), 2021~.
‘그리기 Drawing’ 시리즈에는 ‘가성비와 실용성 갑’인 시트지처럼 산업 재료를 주로 쓰지만, 입체 작업에는 진짜 나무, 철, 돌을 쓰잖아요. 입체 작업을 편애하나요?
아니요! 앞서도 말했잖아요. 저를 투영하는 사물인 시트지를 이죽거리고 싶지 않다고요. 그저 드로잉 작업이 너무 장식적이지도, 너무 엄격해 보이지도 않으면 좋겠다, 그 사이를 제대로 줄타기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입체 작업에 나무 무늬 시트지를 붙인다고 생각해보세요. 많은 이가 쓰는 나무 무늬 장판을 제가 작업에 쓰는 건 옳지 않은 일 같아요. 그걸 집에 깔아놓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떨까요? 그야말로 이죽거리는 거죠. 입체 작업에서도 스티로폼 같은 산업 재료를 쓰고, 당구공이나 골프공 같은 레디메이드를 적극 활용해요. 다만 ‘좀 덜 당구공처럼 보이게’ 표면을 갈아내거나 색깔을 칠하죠. 천연 재료와 산업 재료를 민주적으로 함께 놓고, 함께 바라봤으면 하거든요. 앞서 말했듯이 제 작업은 공예와 디자인 사이, 평면과 입체 사이, 외피와 가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일 같아요. 상충하는 가치 사이에서 ‘적절함’이란 걸 계속 찾아나가는 거죠.
- 조각가 이은우 사물의 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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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것, 고급스러운 것, 예쁜 것, 어려운 것에 대한 반항이나 양가감정 같은 게 있다”고 고백하는 이 사람. 그가 본질과 외피, 사물과 조각, 장식과 실용, 기능과 비기능, 미술과 디자인,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vs. 가짜’ 대신 ‘진짜 and 가짜’를 오가며 손에 꼭 쥐고 싶던 것은 무엇일까? 자신이 몰두하는 건 개념적 예술도 실용적 디자인도 아닌 물리적 실체일 뿐이라는, 이 어려운 이야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