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왔다. 대기가 끓어오르고, 그림자가 짙어졌다. 여름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뒤라스의 소설을 읽던 어느 여름을 기억한다. 아름답고, 덧없는 계절이었다.
다음주에 비가 온다고 예보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뜨겁고 건조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올여름은 나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더위에 약한 나는 여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여름은 언제나 강렬한 감각으로 기억되 는 계절이다. 찬란한 색깔들, 팽창하는 냄새들. 여름엔 길거리에 자리 잡고 앉아 토마토나 자두 같은 것을 파는 노파 앞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뙤약볕 아래 앉아 있는 그녀의 건강이 염려되는 탓도 있지만 짧은 대화를 나누며 여름의 햇살을 품은 향기로운 열매를 사 먹는 일이 그 자체로 내게 여름의 소소한 기쁨인 까닭이다.
한여름,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부엌, 고소하고 짭짤했던 간장비빔국수와 차갑고 새콤하던 김치말이국수, 찬물에 밥을 말아 먹을 때 할머니가 늘 곁들여 먹게 하던 풋고추와 오이지, 호박잎쌈과 양배추쌈, 찐 옥수수, 그리고 오이소박이. 오이의 색이 연하고 가시가 돋아 있는 부분을 특히 좋아하는 나를 위해 할머니는 내게 상을 차려줄 때면 오이의 그런 부위만 일부러 골라 담은 그릇을 내 앞에 놓아주곤 했다.
할머니가 나를 키우며 거둬 먹인 것은 아주 많았다. 그 때문인지 나의 식성은 할머니의 것을 많이 닮았다. 예를 들면, 냉면에 대한 사랑 같은 것. 지금은 평양냉면이 대중적으로 유행하고 있지만, 그러기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평양냉면을 사랑했는데, 그건 아마도 이북 출신 할머니가 냉면을 유달리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달 전 어느날, 평양냉면을 먹으러 갔다고 하자 친구가 나에게 평양냉면의 모든 것을 다룬 책이 있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평양냉면이 유행을 하고 많은 사람이 즐겨 먹게 되면서 그것을 파는 식당이 서울 곳곳에 생겨난 건 좋지만, 할머니와 즐겨 가던 단골 냉면 가게의 음식 가격이 점점 인상되고 여름마다 터무니없이 긴 줄을 서야 하는 건 조금 씁쓸하다.
점점 더워지고, 불을 가까이하는 일이 고역이 될수록 최소한으로 가열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게 될 것이다. 내가 음식을 먹고 만드는 일을 귀찮아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를 초대해 대접할 정도로 근사한 음식을 만드는 걸 매우 싫어하는데, 그건 우선 그럴듯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내게 없고, 내가 레시피를 따라 조리하는 순서를 지키거나 계량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요리를 할 때의 나는 무척 즉흥적인 사람이 된다. 완벽한 요리를 해내기보다는 혼자서 식재료를 다듬고 맛을 상상하며 이것저것 시도하는 게 좋다. 나는 여행을 가면 어느 나라에서든 식료품점과 시장에 들르고, 낯선 향신료나 소스를 사는 걸 즐긴다. 여러 대륙에서 사온 그것들을 잔뜩 쌓아놓고 내 나름의 방식대로 조합하는 것이 즐겁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요리에 대한 내 태도는 자유분방함에 가깝다. 나는 내 부엌이 축제의 장이자 이완의 공간이 되길 소망하지, 과학 실험실이 되길 원하지는 않는다. 내게는 음식을 먹는 행위가 삶의 크나큰 기쁨인 까닭에. 경계도 질서도 강박도 없는 장소, 그곳이 나의 부엌이다.
매해 여름의 부엌엔 민트와 바질 화분을 둔다. 나는 몇 년 동안 고수를 키우려고 노력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수확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고수를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무척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베트남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게 되면 늘 “고수를 넉넉히 주실 수 있나요?” 하고 묻지만, 식당에서 주는 고수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향이 강하지 않고 밋밋하다. 고수를 듬뿍 넣은 쌀국수를 먹으며 나는 여러 해 전 처음으로 베트남 여행을 갔던 어느 여름을 떠올린다. 내 식대로 살기 위해 본가를 떠난 후, 처음으로 떠난 여행. 그곳의 허름한 노천에서 사 먹은 저렴하지만 국물이 매우 진하던 쌀국수, 뜨겁던 여름, 알아들을 수 없던 언어, 눈부시던 바다, 하얀 모래밭, 온전히 나인 채로, 혹은 나를 잊은 채로.
이 여름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나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는 이 여름 역시 어떤 식으로든 기억해내고, 이 시절에 대해 기록하게 될 것이다. 이 헛되고 헛된 인생에, 모든 기억이 왜곡되고 흩어질 그 어느 날, 남는 것은 오직 감각뿐일 것이다. 먼 훗날 이 여름이 틀림없이 지금, 여기 존재했다는 걸 증명해줄 ‘그 맛’을 미리 상상해보는 일의 특별한 즐거움.
섬세하고 우아한 문장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백수린 작가의 여름 부엌을 상상하게 됩니다. 낯선 언어와 이국적 향기를 품은 향신료, 소스로 즐거움이 듬뿍 담긴 레시피가 펼쳐질 것만 같습니다. 자유분방한 요리 취향을 소개한 백수린 작가는 2011년 단편소설 ‘거짓말 연습’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습니다. 소설집 <여름의 빌라>가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제45회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 음식 에세이 나의 여름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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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2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