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 박 작가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코넬 대학교에서 순수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 소더비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한 후 서울로 와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16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한국과 미국, 영국, 벨기에 등 국내외 여러 갤러리에서 활발히 전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작업실에서 하루 10시간씩 꾸준히 작업에 매진한다는 젠 박 작가. 촬영을 위해 오늘만큼은 단장을 하고 작품 옆에 섰다.
그가 그리는 평편한 세상에는 사실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 존재의 연결성, 이리저리 얽힌 인간의 감정…. 첫눈에는 파악되지 않는 의미를 하나둘 발견하다 보면 평면의 그림이 입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레고스케이프Legoscape. 5년 동안 이어오는 연작의 제목이죠.
저는 순서에 맞게 조립해 질서 정연한 결과물을 낼 수 있는 레고를 좋아하고, 평생 도시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도시 속에서 안정감을 느껴요. 그리고 생각에 잠겨 몽상하기를 좋아하죠. 어릴 때 부모님이 제가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하실 정도로요. 지금도 여전히 일상에서 도피하고 탈출하는 꿈을 꿔요. 레고스케이프는 레고lego, 도시 경관cityscape, 도피escape 세 단어를 합쳐 만든 제목입니다. ‘젠 박’이라는 작가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럼 그림 속에는 당신의 유토피아 세계가 있나요?
제가 살고 싶은 집은 어떤 모양일지를 계속 탐험해보곤 합니다.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한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해요. 그래서 질서 정연하게 그린 그림 속에는 불안 심리도 담겨있고, 여러 요소는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 충돌해요. 당시에는 완벽하다고 생각한 작품도 시간이 지나면 의미가 또 바뀌어 있기도 하고요.
건물만 그리는 이유가 있나요?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바다나 산으로 떠나곤 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자연 속에서는 통제하지 못하는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불안해요. 건물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고 서 있으니 도시 속 질서에서 안정감을 느끼죠.
사실 젠 박 작가의 그림에는 사람이 한 명 등장한다. 건물을 바라보는 관찰자인 작가 자신. 그의 시선으로 본 빌딩을 재구성하기에, 세상 어딘가 실존하는 건물임에도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완성된다.
레고스케이프 작품은 어떤 과정으로 탄생하나요?
캔버스 작업 전에 먼저 컴퓨터로 밑그림을 그리는데요, 사진을 찍어둔 건물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추출해 외곽선을 따 단순화한 뒤 레고처럼 이리저리 조립해봐요. 콜라주를 하듯이. 스케일도 줄였다 늘렸다 하면서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 나올 때까지 수정하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과정이에요. 한 부분을 수정하면 전체를 동일한 비율로 다시 고쳐야 하니 무척 복잡하거든요. 제가 좀 완벽주의 성향이에요. 밀리미터까지 비율을 정확히 계산하며 작업하고, 프린트해서 보고, 또 수정하는 일을 반복해요.
하나의 건물이지만 작업하는 동안 아주 여러 번, 그것도 다양한 시각으로 보고 있군요. <행복> 3월호 표지 작품 ‘Legoscaped No. 7(Queens)’ 속 건물은 어디에서 처음 만났나요?
저는 뭔가 하나씩 좀 특이한 구석이 있는 건물에 끌리는 편이에요. 이 작품은 뉴욕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늘 보던 높은 빌딩인데요, 낮은 건물 가운데 있어서 혼자 비죽나와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요. 게다가 저는 차 안에서 이동하며 앵글이 아래에서 위로 향하게 사진을 찍으니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담기죠. 실제보다 왜곡된 기록을 보며 건물 형태를 구성한 뒤, 레고를 닮은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했어요.
“아파트들도 다 비슷하게 생겨 도시 풍경이 평범하고 삭막하다. 그런데 이 빌딩은 이상하게도 유독 매번 눈에 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자꾸 다르게 보인다. 이제 그곳을 지날 때마다 오늘도 또 달라 보이려나 은근한 기대도 하게 된다.” – 작가의 기록 中
‘Legoscaped XXIV_Reflection III’, acrylic on canvas, 170×170cm, 2021. 마천루 아래서 하늘을 바라본 듯한 느낌이 든다.
‘북촌’, acrylic on wood, 54×101×4cm, 2020.
‘Legoscaped No.8(Meat Packing District)’, auto paint on aluminum, 88×52×4cm, 2021
사용하는 색감도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접 조색한 색을 사용해요. 물감을 섞어 원하는 톤이 나올때까지 계속 시도해보는 거죠. 완성되면 이름도 지어줘요. 코로나19가 시작됐을 때는 ‘COVID’, 영화 <기생충>이 상을 받았을 때는 ‘OSCARS’. 이렇게 그때그때 일어나는 일로 작명하기도 했고, 지금은 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미국에서 많이 쓰는 이름 리스트를 뽑아 하나씩 붙여주고 있어요. ‘ISABELLA’ ‘ALANA’ 이렇게요.
작품마다 비슷한 계열의 색끼리 모여 있을 때도 있고, 상반되는 색이 붙어 강렬한 느낌을 줄 때도 있네요.
기분과 감정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서요. 코로나19로 느끼는 두려움과 그것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 지난 전시에서는 캔버스가 건물로 가득 차고, 사용하는 컬러도 강렬했어요.
3월 3일부터 시작하는 개인전에서 선보일 작품들은 이전과 사뭇 다른 느낌인 거 같습니다.
지난 전시를 마치고 이번 전시를 준비하기까지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려 많이 노력했어요. 마음을 비워내는 연습을 하다 보니 그림에도 여백이 생기더라고요. ‘Into the Void’라는 제목도 그래서 지었죠. 캔버스 가장자리에 빌딩이 서 있고, 중앙에는 하늘인지 마음속 여유인지 모를 빈 공간이 있어요. 색도 옅고 차분한 파스텔 톤을 주로 썼고요. 하지만 검고 진한 색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도 지금 평화롭고 잔잔해도 두려움이 영영 사라진 건 아니잖아요. 감정은 어딘가 침잠해 있죠.
두 눈을 감고 명상하려 한다고 머릿속 생각이 바로 비워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디선가 모여든 오만 잡념으로 머릿속이 더 버글거린다. 하지만 동요하지 않고 상태를 유지하다 보면 어느새 평정심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그렇게 이 혼돈의 시대에 적응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젠 박 작가는 과거 작업을 돌이켜보면서 재해석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회색빛이던 하늘을 푸르게 덧칠한 것. 코로나19로 인간의 활동이 줄어들자 미세먼지가 사라지며 공기가 맑아지는 걸 느끼고 그림에 반영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좋은 일이 있기 마련이라는 걸 생각하며 넓은 면적을 애써 다시 메웠다. 우리 역시 작가의 그림 속에서 유토피아를 찾을 수 있고, 디스토피아를 찾을 수도 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감정을 내밀히 비춘다.
작가와의 만남
젠 박 작가가 개인전 에서 작품을 직접 설명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마련합니다.
기간 3월 11일(금) 오전 11시~정오
장소 공근혜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삼청로7길 38)
참가비 1만 원
인원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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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젠 박 이제는 비워낼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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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면으로 건물을 세우고 자기만의 세상을 만드는 젠 박 작가. 캔버스 가득 건물을 빼곡히 세우던 이전 작품과 달리, 신작에는 건물 사이로 커다란 빈 공간이 생겼다. 오는 봄에 열리는 그의 개인전 이야기. 이건 두려움과 혼란 등 온갖 감정을 쏟아내 가득 채운 적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2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