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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 작가 전재은 실로 쓰는 일기
천과 바늘과 실로 광목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처럼 ‘그곳’에 숨은 기억을 현재화하는 그가 ‘실로 쓰는 일기’.

박공지붕이 근사한 분당의 빌라가 살림집이자 작업실이다. 전재은 작가 뒤로 실을 한 줄 한 줄 이어 작업실 안 실타래를 표현한 ‘In the Studio’ 시리즈, 엄마의 장롱 속 서랍에서 비롯된 ‘A Wardrobe with a Diary’ 시리즈가 놓여 있다.

전재은 작가는 숙명여자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회화와 섬유 오브제 작업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2020년 이길이구갤러리에서 일곱 번째 개인전 <사적인 장소들>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습니다. 2017년, 2018년 공예트렌드페어와 상하이 아트페어, 뮌헨 국제 수공예 박람회 등에 참여했으며 각종 섬유 크래프트 도서 출판, 기업과 전시 협업 등을 진행했습니다.

기억, 지워내기와 새기기
천장으로 벽으로 그림자가 일렁이는 오후, 장롱 서랍을 열면 배시시 분 바른 ‘그녀’-엄마의 실, 바늘, 헝겊, 브로치-가 있었다. 가슬가슬함과 온기로 다가오던 단순한 것들, 그 사물은 손금과 실핏줄 하나하나를 깨우며 온몸에 젖어들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읽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에 ‘장롱과 서랍’이란 글이 있었다. “그녀가 장롱 서랍을 열 때마다 원피스, 브로치, 마젠타 색종이로 싸여진 천들, 작은 상자, 그리고 그 상자를 열면 그녀의 꿈, 심장의 조각같은 것들이 빛나고 있었다.” 마음속에 그 구절들이 고요하고 격렬히 쌓였고, 그는 이 구절에 밑줄 긋고 필사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불러냈다. 실제 경험과 상상의 경계를 오가며 그만의 이야기를 쓰고, 그걸 다시 캔버스에 실과 바늘과 헝겊으로 그렸다. “제 작품 속 장소는 존재하지 않거나 오래된 과거의 어떤 장소, 혹은 지금 이곳이죠. 저는 캔버스 위에서 경험을 지워내고 다시 새기는 작업, 드러내고 감추는 일을 반복하니까요. 그 시절에서 현재의 나를 찾는 것일 수도, 무명씨의 사소한 역사를 찾는 여정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불러낸 삼각 시멘트 계단, 격자무늬 창문, 숨바꼭질 은신처가 된 옷장, 옥상에 있던 원기둥 모양의 물탱크…. 실의 바늘땀이 지나간 길에 그는 어떤 암호를 심어두었을까. “생은 유한하며, 사물도 현상도 항상 변하잖아요. 변하지 않는 장소에 있던 것들, 그것의 빛남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very old drawer’, mixed media on canvas, 38.5×45cm, 2021
바늘과 실로 그리는 회화
그 작업의 시작은 머릿기름 바른 바늘로 이불 홑청을 시치던 할머니의 기억이다. 풀 먹인 홑청을 차악 펴고, 바늘로 듬성듬성 호는 그 일은 마술적이기까지 했고, 노매딕 아트 같았다. 바늘과 실 한 타래 가지고 어떤 사물도 꿰매던 할머니처럼 그도 20년 넘게 바늘과 실 한 타래만 가지고 어디로든 떠나 그림을 그리게 됐다. 회화를 전공한 그가 캔버스 대신 천을, 물감 대신 스티치 작업을 택한 것은 바느질의 고요함, 단순함, 예리함 때문이었다. 캔버스와 붓이 구현하던 회화성을 바늘과 실이 충분히 대신하리라 믿었다.

“천을 여러 겹 겹치고, 그 위에 여러 종류의 미디엄(젯소 같은)을 올렸다 갈아내고, 물감을 올리고, 다시 낙서처럼 긁어내고… 이걸 반복해야 제가 원하는 표면, ‘흔적’처럼 보이는 표면이 만들어져요. 그 위에 바느질한 오브제를 붙이고, 바늘땀으로 수놓듯 면을 만들고, 물감으로 레이어를 덧칠해요. 모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에요.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는 일처럼 말이 죠. 물감, 실, 섬유가 한 화면에서 어떻게 잘 머물고 어우러질 수 있는지 많이 고민했어요. 많이 망치고, 그림을 그만둘까 싶을 정도로 좌절하면서.”


“바느질한 오브제를 붙이고, 바늘땀으로 수놓듯 면을 만들고, 물감으로 레이어를 덧칠해요. 모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에요.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는 일처럼 말이죠.”





색색의 실타래, 옷감, 바느질 도구, 패턴, 재봉틀, 물감, 그에게 영감을 주는 책, 그 책에서 골라낸 구절을 적은 종이 쪼가리, 오너먼트 시리즈를 목에 매단 마네킹, 가족의 사물까지 이 집은 그의 ‘바느질 회화’를 돕는 사물로 가득하다. 아래 사진 속 시집의 밑줄 그은 문장에서 <행복> 11월호 표지 작품 ‘사적인 장소들’이 시작되었다.
천을 콜라주하고 실로 도톰하게 드로잉하자 화면은 부조 작업이 되었다. 평면과 입체 사이를 서성이는 작업은 ‘오너먼트 시리즈’로 이어진다. 회화 작품의 일부를 뚝 뗀 것 같은 작은 조각 을 목에 걸고 다니다가 자연스럽게 전시로 이어졌다. 건축 구조물처럼 입체적이고, 색면 추상처럼 단순한 오너먼트 시리즈는 전재은 작가의 상징적 작품이 되었다. “오너먼트를 목에 걸친 채 산이나 바다, 도시를 여행하던 컬렉터들이 세계 곳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죠. 그들이 여행한 그 장소가 갤러리가 되고, 오너먼트의 집이 되더군요.”

‘night bosque’, mixed media on canvas, 117×91cm, 2021
언어를 모으다
11월호 표지 작품 ‘사적인 장소들’은 그가 사랑하는 이제니 시인의 시 ‘풀이 많은 강가에서’에서 시작된다. ‘풀이 많은 강가에 너는 서 있다’ ‘어머니는 머리가 하얗고 기도를 한다’ ‘바람’ ‘풀과 풀 사이의 거미줄’ ‘조약돌’ ‘물방울’ ‘강가’ ‘풀이 많은 강가에서 너는 조약돌과 물방울과 풀벌레와 어머니와 나란히 함께 흐른다’에 밑줄 긋고, 그걸 필사하고, 그 단어들을 결합해서 그만의 새로운 문장을 만든다. 바로 언어를 모으는 일이다. “책을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오래된 장소를 묘사하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있어요. 그 장소에 등장하던 어머니, 꽃 같은 것도 함께. 내레티브보다 장소를 묘사하는 문장에 끌려요.” 그가 모은 언어는 종종 캔버스에서 뒤집힌 채, 낙서처럼 쓰여 있다. 표지 작품 ‘사적인 장소들’에 거꾸로 쓰인 ‘very old yard’처럼. 그 암호 같은 문장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꽤 크다. 순간(한때)을, 장소(집)를, 관계(삶)를, 부재(소멸)를 낡은 스웨터의 보푸라기처럼 그려내는 전재은 작가. 그의 그림은 결국 기억을 통해 ‘없음’을 표현하려는 게 아닐까. 그 그림 앞에선 누구나 깨금발로 담 안을 들여다보듯 제 기억을 들여다보고 싶을 것이다.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박찬우 작품 문의 이길이구갤러리(02-6203-2015)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1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