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크업 성지안 | 헤어 최서형
결국 사막을 건너는 건 용맹한 사자가 아니다. 오직 낙타만이 사막의 국경을 넘는다. 모래바람 속에서 터득한 것, 굼뜨게 발을 옮기는 방식만으로 사막을 횡단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생을 살아내는 중이며, 거기서 맛본 인생의 쓰고 달고 매운 맛을 책 두 권에 담아낸 강주은이라는 사람. <내가 말해 줄게요> <강주은이 소통하는 법>, 나온 지 좀 된 책을 나는 점자책 읽듯이 짚어 내려갔다. “살아보니 그러그러하더라”라며 감싸는 듯한 그의 글에 흔들렸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난 생각했다. 순수, 외로움, 아름다움… 삶에는 이렇게 시로서만 말할 수 있는 게 있듯 엄마의 끼니, 아내의 아침 10시, 여자의 양말… 삶에는 이렇게 구어체로만 말할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라고. 스무 해 넘게 한국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미끌대는 그의 한국어로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여기서 에일리언이었다고요”
알고 보니 그는 일하는 여성이었다. 2003년부터 서울외국인학교에서 대외협력이사와 부총감으로 13년, 2017년부터 홈쇼핑 <강주은의 굿라이프> 호스트로 4년, 그사이 코리아 외국인학교재단 사무총장·미국상공회의소 이사로도 일했다. 남편이 오해와 오명 속에서 부침을 거듭할 때도 출렁대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여성으로 살았다. 그러나 시작은, 만화방창의 20대를 종일 남편 입에 맞는 밥맛 연구하는 ‘주부(잠깐 사전을 찾아보길. 우리가 그동안 폄훼한, 이 좋은 단어를)’였다. “나는 그때 완전히 에일리언이었다고요. 나라도 바뀌고, 여태 공부한 것도 다 내려놓고, 한국말은 제대로 못 하고, 아는 사람도 없고, 남편은 국민 배우이고(강주은은 ‘박태수’와 ‘대발이’에 열광하지 않고는 청춘 축에 끼기 어렵게 만든 대스타 최민수의 아내다)…. 하루 종일 장 보고, 여기저기 물어보고, 책을 봐가며 질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한국 사람 밥맛을 찾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내밀면 남편은 ‘이 맛이 아닌데’ 그래요. 나는 그때 ‘여성의 지옥에 왔구나’ 싶었어요.”
1993년 미스코리아 캐나다 진으로 한국에 오기까지 그는 토론토 깊은 숲을 뛰놀고, 10년 넘게 피아노를 친 캐나다 여자아이였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치의학대학원을 준비하던 그는 미스코리아 결선 무대에서 에스코트 역할로 만난 배우 최민수와 불벼락 같은 사랑에 빠졌다. 만난지 세 시간 만에 손을 잡고 “프러포즈를 하겠습니다. 앞으로 주은 씨가 나를 위해 살았으면 좋겠어요” 했다는 일화를 뒤로 이듬해 결혼했다. 그 후 10년, 멈추지 않는 신발을 신은 것처럼 바삐 살림하고, 두 아이 낳고, 내조했다.
10년 전업주부 생활을 끝내고 갖게 된 첫 번째 일, 바로 서울외국인학교의 대외협력이사였다. 사진을 찍은 이날은 강주은의 생일이라 임원들이 꽃다발과 파이 선물을 건네며 축하해주었다. 사진 제공 열린책들
‘나는 주부 하는 인생이구나’
“시어머니를 1년 넘게 모셨는데, 당뇨 환자를 위한 밥을 또 만들어드리고, 남편의 일이 없을 때는 삼시 세끼에 간식까지 챙겼어요. 그때 스물세 살이었어요. ‘아, 여기서 나는 일하는 인생이 아니구나’ ‘주부 하는 인생이구나’.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요, ‘내 인생 가장 큰 도전이 내 앞에 왔구나. 일단은 이거라도 잘해야겠다. 공부를 해야겠다. 이게 인생 공부구나. 이게 일이구나’ 생각했어요.” 가위 눌리는 것 같았을 텐데 말이다. 누구는 그대로 하루를 구덩이에 가두고, 누구는 하루를 숫돌처럼 가는 걸까. “한국은 0 단위가 너무 많아서 은행 일도 한참 배워야 하고, 회계사님과 오가면서 남편 수입도 관리해야 하고. 매니저가 ‘형님께 무슨 계약서가 들어올 거예요’ 하면 그 관리도 해야하고. 공인 옆에서 사는 너무 독특한 생활이었어요. 누가 가르쳐준 건 하나도 없지만요, 하나하나가 배움이 된 거예요. 그냥 둘 수도 있었지만 하루하루 배운 걸 그 다음 날에 써먹었어요. 그렇게 주부 생활 10년 만에 서울외국인학교 대외협력이사 자리에 이력서를 냈어요.” 누구에게나 있는 삶의 줄거리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있는 삶의 디테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은아, 난 다른 건 몰라도 살아오면서는 진실을 빨리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는 제일 잘 맞았어”라고 말하는 남편 최민수. 그에게서 아내 강주은도 많이 배운다. 사진 제공 열린책들
“많은 사람이 일을 하면 좋겠어요”
“학부모 자격으로 2년 동안 학교 기념품 창고를 관리하는 봉사 활동을 했는데, 전임 대외협력이사가 ‘그 일 처리하는 것만 봐도 시도해도 될 만하다’라며 이력서를 넣어보라 했어요. 이력서에 쓴 거라고는 미스코리아 출신인 거, 10년 피아노 친 거, 그리고 10년 동안 한 연예인을 위해서 살아온 거예요. 다만 남편 덕분에 방송·인터뷰·대통령 접견까지 다양한 자리에 참석해봐서 누구를 만나도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다고 강조했어요.”
이후 13년 동안 그 비영리 교육 재단에서 일하며 서울시와 함께 용산의 국제학교를 설립하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학교 기부의 토대도 마련했다. 학교 설립 1백 주년 기념행사도, 1년에 세 번 출간하는 잡지 발행도 했다. ‘사정이 생기면 내가 바로 투입되어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접시 거두는 일, 쓰레기 정리까지 선 긋지 않고 일했다. 서울외국인학교에 몇 달 먼저 들어온 인턴 직원에게 “선배님”이라 부르며 배움을 구했고, 이후 홈쇼핑 <강주은의 굿 라이프>를 진행하면서는 ‘내가 제일 어린 학생이라는 생각’으로 스태프를 대했다. “어디서든 제가 상사라고 생색낼 시간이 없었어요. 배워야 할 것,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으니까!” 되짚어 생각하면 이런 게 상식常識 아닌가. 그동안 상식을 흘려 넘겼기에 우린 이런 상식적 삶 앞에서 멈칫하게 되는 거다.
“그 긴 시간을 돌아보니 제대로 인정받은 적 없지만, 응원이나 인정이 없어도 나는 괜찮아요. 나 자신을 스스로 인정할 수만 있으면 돼요. 삶에서 일을 한다는 건 중요해요. 많은 사람이 일을 하면 좋겠어요. 계속 단련할 것이 필요해요. 어떤 곳에 내가 필요하고 내가 기여하고 있다는 것, 세상에 나의 생각·에너지·노력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에 집중하면 인정받는 것에 급급하지 않게 돼요.” 단번에 통하면서도 오래 곱씹을수록 계속 우러나오는 그의 이야기. 자기로부터 출발해 자기에게 도달해본 사람의 말은 결국 자기로부터 출발해 타인에게도 도달한다.
10대 후반, 아버지가 다니던 화학 기업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일화―점심 식사 영수증 하나를 제출하지 않은 회사 대표를 찾아가 “회계팀에서 알려준 매뉴얼대로라면 승인할 수 없으니, 영수증을 제출하셔야 해요”라 했다는―가 <강주은이 소통하는 법>에 나온다. 그 글 끝에는 “규칙 앞에는 모두 공평한 것이 기본”이라는 명제가 달린다. 이 책의 ‘들어가는 말’에 이런 글이 있다. “일할 때의 나 역시 내가 누군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맡게 되는 위치와 책임, 역할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그에 맞는 태도와 행동을 취해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이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많은 이를 위해 우리가 본질적이고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희생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가장 저버리기 쉬워 더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 ‘기본’ ‘본질’ 아닐까. 기본을 아는 이에게서 발견한 이야기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려면 상상력이 필요해요. 그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다고 상상해야 해요. 그 자리에 누가 있을까? 그 사람은 뭐라고 말할까? 그 공간에 들어간 것처럼 비주얼 플래닝을 해보죠.”
“실패에 매력을 많이 느껴요, 괜찮아요”
2017년 시작한 홈쇼핑 방송 <강주은의 굿라이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프로그램인데도 팀 내 존재감 ‘꼴찌’로 첫 방송을 촬영했다. “말도 로봇처럼 하고, 카메라를 보는 것도 어색했고요. 어떤 물건에 관심이 쏠리는지도 모르고, 모든 멤버가 저보다 어리지만 다 선배이고요. 방송 모니터링을 하면서 나오는 말은 ‘내 말에 힘이 없어. 이치에 맞지 않아!’였어요. 그런데 그 방송을 4년 넘게 했단 말이죠. 이게 내 목표가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포레스트 검프> 같은 이야기 아니에요?” 그는 올해 CJ와 다섯 번째 재계약을 했다. 이 방송 덕분에 남편보다 세금을 더 많이 내는 집안의 가장家長이 됐다. “얼마 전 첫 녹화했던 방송을 봤는데, 그 시절의 내게 말해주고 싶더라고요. ‘주은, 걱정하지 마. 4년 뒤에 너는 훨씬 더 잘하고 있을 거야.’ 불안하던 저를 안아주고 싶었어요. 제 마음에는 확실히 그런 정신이 있어요. 지금 더 잘해낼수록 과거의 부족하던 부분을 채워서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죠. 그러면 그때 실패의 아픔이 많이 줄어들어요. 실패에 매력을 많이 느껴요.”
새벽 기도에 다니는 할머니들처럼 평온한 저 얼굴 그리고 깊은 생각. 그는 대체 신께 무슨 봉사를 하여 저런 상을 얻어낸 걸까. “예닐곱 살쯤 단풍 보러 캐나다 북쪽으로 가서 내가 한 이야기가 있대요. ‘엄마, 멀리 보면 정말 아름다운데 숲속에 들어가면 개미도 있고 더러운 것도 많잖아. 인생도 비슷한 것 같아.’ 이 아이는 좀 다르다, 엄마가 생각하셨대요. 교회가면 우리 식구만큼 행복한 가족이 없다고 하는데 들여다보면 그게 또 아니에요. 어느 집이든 그래요. 생활 전선에서 바쁜 초창기 이민자 부모 아래서 나는 통역자였어요. 엄마한테는 완전히 엄마를 위한 사람, 아빠한테는 완전히 아빠를 위한 사람, 두 분에게 각각 특별한 위로를 건네는 거예요. 나는 인간이 얼마나 약한지를 어릴 때부터 느꼈어요. 그래서 두 분이 가족 안에서 만족을 느끼도록 애썼어요.” 일찌감치 삶을 바라보는 원근법을 스스로 터득한 사람, 세상 누구든 애환의 무늬는 다를 바 없다는 공감을 알아챈 이의 이야기다.
나만 이상한 사람과…
“나만 이상한 남편과 사는 게 아니구나!” 외치던 그는 결혼 28년 차가 되어서야 “남편과 한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고 말하는 단계에 ‘겨우’ 이르렀다. “남편은 제게 꼭 필요한 재료이지만 제가 원하던 재료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제가 원하던 이상적 남자를 만났으면 오늘의 행복을 누리지 못했겠죠. 남편을 통해 제가 상상도 못 하던 저의 많은 재료가 드러났으니까요.”
그가 남편과 소통한 첫 번째 방법은 “나는 바보야. 잘 이해가 안 가. 내가 많이 부족해”라고 먼저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남편의 말소리, 표정, 설명이 달라졌다. 그 이야기를 <내가 말해 줄게요>에 썼다. “내가 생각하는 배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표현과는 너무 달라서 몰랐던 거예요. 이 남자의 배려를 조금 더 일찍 알아챌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거예요.” 남편과 소통하는 데 첫 번째 터닝 포인트가 됐다는 ‘민수의 아침’이라는 만화(<내가 말해 줄게요> 중)를 찾아보시길. 밤샘 촬영을 하고 돌아온 남편이 그 만화를 보고 아내를 깨워 울며 사과했다. 물론 행동 변화가 단번에 시작되진 않았지만 첫 단추가 꿰어졌다. 그리고 지금 이 부부에게선 겨울의 고뇌도, 여름의 희락도 함께 받아내며 산 어른들의 사랑, 그것이 보인다.
“산책길에 조그만 고양이 먹이 같은 과자가 있길래 반려견에게 한두 알 먹여봐도 괜찮지 않겠나 했더니, 남편이 ‘고양이가 먹을 게 얼마나 있다고. 그냥 그거 둬. 그 아이도 먹어야지’ 해요. 아이의 마음이 이런 것이죠. 내 남편에겐 그게 있어요. 그 투명성이 가끔 너무 멀리 갈 때도 있지만, 그 면모가 오히려 내게 자극이 돼요. 계산이 빠르고 세속적이고 눈치도 잘 보는 나에 비해 남편은 그걸 안 해요. 이렇게 다른 둘 사이에서 밸런스를 다시 찾아가는 거죠. ‘그래! 이 먹이가 누구 건데! 까만 고양이 거지!”
가족을 이루며 경험한 것, 일하는 여성으로 경험한 것, 그 안에서 찾아낸 것은 ‘강주은다운 소통의 기술’. 그 이야기를 엮어 책으로 펴냈다.
그가 낸 두 권의 책은 사실 ‘소통’에 관한 이야기다. 첫 번째 책 <내가 말해 줄게요>가 가족 간 소통을 자신의 진솔한 가족사를 통해 전했다면, <강주은이 소통하는 법>은 일을 둘러싼 소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두 책은 하나의 메시지로 연속된다. “사회는 과일 샐러드예요. 나는 사과이고, 당신은 오렌지예요. 모양도, 인기도 비슷해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껍질 까는 법부터가 너무 달라요. 오렌지와 함께하려면 오렌지와 이야기하는 법을 알아야 해요. 그게 아주 중요해요. ‘나는 지금 과일 샐러드 안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갖는 것, 이게 소통의 기본이라고 생각해요.”(<강주은이 소통하는 법> 중) 집 안 어딘가에 붙여놓고 삶이 헝클어질 때마다 곱씹어보고 싶은 말이다.
이런 것도 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려면 상상력이 필요해요. 상대가 어떤 이야기를 한다면 그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다고 상상해야 해요. 어떤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 공간에 내가 들어가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건 뭘까? 어떤 소리가 날까? 그 자리에 누가 있을까? 그 사람은 나를 보고 무슨 말을 할까? 등등 마치 실제로 그 공간으로 들어간 것처럼 비주얼 플래닝을 해보는 거죠.”(<내가 말해 줄게요> 중) ‘상대방’ 자리에 남편, 부인, 아이, 직장 동료 등을 치환하면 소통의 법칙이 보인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무런 거리가 없다면, 모든 것이 투명하다면 그건 축복 대신 형벌이다. 마음속 미움과 죄를 어떻게 다 감출 것인가. 사람 사이의 심연이 그 미움과 죄를 삼켜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소통이란 건 그런 까닭으로 태어난 것일 터다. 그리고 삶에는 이렇게 구어체로만 통하는 이야기가 있다, 분명.
- <강주은이 소통하는 법> 쓴 방송인 강주은 내가 말해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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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처럼 자기로부터 출발해 타인에게 도달한, 세상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어서 더 좋다. 자기로부터 출발해 자기에게 도달한 사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거기서 소통의 기술을 말하는 사람, 강주은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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