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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안규철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
“미술이 어떻게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30년 동안 고민해온 개념 미술 작가 안규철. “예술은 예술, 삶은 삶”이지만, 그 안에서 접점을 찾는 게 그의 소명이라 여긴다. 평창동 언덕배기 작업실에서 달팽이처럼 느리고, 수공업자처럼 수고로이 그 답지를 적어간다. 그리고 ‘예술가가 사라지는 법’을 담담히 묵상 중이다.

번듯한 작업실 하나 갖는 게 소원이라던 미술가 안규철은 5년 전, 선배 화가가 쓰던 집에 우연찮게 들어와 1층 공간을 작업실로 꾸렸다. 그런데 꿈의 작업실을 얻고 나자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제 그는 작업실이 자기 예술의 종착점이자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라고 산문집 <사물의 뒷모습>에 썼다.
여러 번의 오후가 공기 사이로 쏟아진다, 할밖에. 온종일 그는 적막이 무장무장 쌓인 작업실에서 홀로 쓰고, 그리고, 깎고, 만든다. 느리고 성실하게. 달팽이걸음 같은 하루가 실상은 시간을 소금으로 바꾸는 고통의 과정이라 할지라도 외견은 자못 평화롭다. 20여 년 동안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원장, 부원장 노릇 하느라 하루 ‘30분짜리 예술가’로 살다가, 작년에 은퇴로 풀려난 후에야 얻은 평화다. 수십 년째 지키는 아침 식사 당번을 해내고는 곧장 작업실에 내려온다. 그러고는 온종일 성실히 움직이다가 불현듯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매우 비생산적 시간”을 맞는다. 그건 위무위爲無爲(“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하라”는 노자의 가르침) 같은 시간이다.

“대화가 갑자기 끊기고 낯선 정적이 흐르는 순간을 독일어나 불어에서는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 그림을 그리거나 나무를 다듬는 동안 재료들과 대화하고, 머리와 손이 대화하고, 왼손과 오른손이 대화한다. 이 말없는 대화가 끊기고 정적의 시간이 찾아올 때, 내 안에서 천사가 지나갈 때 사물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산 너머가 홍제동인, 평창동 언덕배기에 그의 집이 있다. 마당 있고, 가파르게 계단이 뻗은 집이라 철철이 건사할 곳도, 안팎으로 손볼 곳도 많다.
이 천사가 지나간 시간의 기록을 모아 그는 산문집 <사물의 뒷모습>을 냈다(BTS 리더 RM이 SNS에 이 책 속 ‘식물의 시간’을 공유한 후 ‘품절 대란’ ‘전주 대비 판매량 160배 상승’ 등의 뉴스 헤드라인을 양산했다. 몇 주째 베스트셀러 행진 중이다). “음, 홀로 앉아 무언가 생각날 때까지 있어보는 거예요.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내게 여백을 주는 거죠.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보다가, 달팽이 기어가듯 꾸물꾸물 써보다가, 그려보다가, 허공을 바라보다가…. 음,그런 찰나에 어떤 생각이 예고 없이 찾아와요. 이대로 끝인가 싶은 순간 섬광처럼 지나가기도 해요.”

그때 다가온 생각을 태양전지에 플러그 꽂은 것처럼 노트에 적어 내린다. 마음으로 묵힌 글은 조만간 그림이, 조각이, 설치 작품이, 영상이 된다. 그 때문일까?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만이 내게는 예술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시간”이라는 말이 단박에 이해가 된다.

그에게 떠오른 생각이란 것은 일상, 사물처럼 심심하고도 막막한 화두다. 인공 누액, 무뎌진 톱, 나사못, 옛날 사진… 한낱 작은 사물에 스민 시간을 들여다보고 기록한다. 머그컵을 앞에 두고 “타인에게 자기 내면의 온도를 전하는 것, 그러기 위해 부도체不導體가 아닌 특별한 그릇을 만드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일”이라 생각한다. 느티나무에서 마른 가지들이 떨어지면 “경쟁하는 가지들의 다툼을 중재하고 방향을 조정하고 잘못된 것은 미련 없이 쳐낸다. (…)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하고 잘라낼 것과 살릴 것을 정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쓴 글은 체로 거른 듯 정갈하고, 깊은 사유가 담겨 있다. 모름지기 누구든 글은 그 삶만큼만 쓴다. 글이든 무엇이든 모두 삶에서 나오는 법이므로.

현대문학상 수상자에게 수여하는 상패로, 그가 만든 작품이다.

“적당하게 부드러운 연필만, 늘 쓰던 것만 써요.” 2013년 전시에 내려다가, 마음에 안 들어 작업실에 둔 작품이다.

1990년 무렵 검정 구둣솔에 흰색 솔로 ‘죄’라는 글씨를 하나씩 심은 ‘죄 많은 솔’을 선보였다. 이번 <사물의뒷모습>전에서는 흰색 솔이 늘어나면서 ‘죄’가 자취를 감춘다.

이번 전시 작품 중 ‘나는 칠판이 아니다’를 연상시키는 칠판.

사물은 책, 세계는 책
꽤 알려진 일화가 있다. 학창 시절 과외 선생님이 그에게 줬다는 벌, 창문 밖을 내려다보며 보이는 모든 것을 설명하라는 벌 이야기다. “그것은 종이 위에 물감 대신 말로 풍경화를 그리는 일과 같았다. (…)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세상이 하나의 책처럼 읽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아홉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중) ‘사물은 책, 세계도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그의 생각은 이 무렵부터 싹텄을 터다. 알다시피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대표적 개념 미술가’로 불려왔다. 지뢰처럼 매설된 모순을 파헤치며, 삶과 세계에 대한 성찰을 질긴 언어로 표현하는. 작품이든 무엇이든 모두 삶에서 나오는 법이니, 그 삶의 연대기를 좀 풀어본다.

그는 보성고 미술 교사 전성우(전 간송문화재단 이사장, 간송 전형필의 아들)의 인도로 미술에 입문해 1970년대 서울대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공간> <계간 미술> 기자로 일했다. 남의 그림을 글로 풀어 쓰는 직업인이 된 그는 7년 동안 “양손잡이처럼 오른손과 왼손을 쓰는 상태”로 살았다. 기자 시절, 1980년대 민중미술을 주도하던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시대의 통각에 대해 발설하는 민중미술 작가들, “미술은 말이 아니라 형태”라는 모더니즘 작가들 사이에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고민했다. 1988년 서른세 살 늦은 나이에 프랑스를 거쳐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로 유학을 갔다. “68 운동으로 민주화를 이룬 독일, 민주화 항쟁이 불붙은 한국. 그 역사적 시차 사이에서 한국인이든 독일인이든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대상이 무얼까, 생각했어요. 역사도, 문화도 아닐 텐데…. 일상 사물은 공용어란 말이죠. 그때부터 사람들이 만든 물건을 책처럼 읽고, 그 안에 담긴 생각에 몰두해왔어요.”


그는 집과 방이라는 주제도 꾸준히 변주해왔다. 모형은 목수 공방 같은 이곳에서 직접 만든다.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에 쓴 글.

그동안 펴낸 산문집. 맨 위가 BTS 리더 RM이 SNS에 공유한 <사물의 뒷모습>이다.
7년 유학 후 구둣솔, 망치 같은 사물에 맥락과 의미를 부여하는 ‘오브제 조각’ 전시를 열었을 때 동료 작가들은 “저걸 조각이라고 하냐?”라며 비판했고,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상업 작가를 포기하고 미술관 전시, 프로젝트성 전시를 주로 열 때도 관람객으로부터 “이걸 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사물을, 세계를 책처럼 읽는 작업을 놓지 않았다. 온화한 가면을 쓴 대통령 세 명이 돌아가며 ‘국민 화합과 사회 발전’을 되뇌던 시절에도, 한강 다리와 백화점이 주저앉던 시절에도 그러했다. 다만 그전에는 ‘이것은 왜 이렇고, 저것은 왜 저렇지 않은지 생각해보시오’라며 개념적 사유로 소통하려 했다면, 점점 더 ‘누구에게나 있음 직한 감정’을 건드리게 됐다는 점이 다르다. 그의 관심사는 줄곧 ‘미술에서 언어를 회복하는 일, 구체적 현실과 미술의 관계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나무를 다듬는 동안 재료들과 대화하고, 머리와 손이 대화하고, 왼손과 오른손이 대화한다. 이 말없는 대화가 끊기고 정적의 시간이 찾아올 때, 내 안에서 천사가 지나갈 때 사물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개념 미술 작가가 “몸은 안 쓰고 입으로만 일한다”는 편견을 불식시키는 미술가 안규철의 공방. 그는 독일인 마이스터에게 나무 다루는 법을 배웠다. 한때는 마음속에 좋은 목수가 되는 꿈도 품었다.
집, 사소한 것들의 고고학
선배 화가가 지었으나 병으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난 평창동 집에 5년 전, 그의 가족이 들어왔다. 마당 있는 집은 그에게 ‘까다로운 약혼녀처럼’ 계속해서 요구 사항을 내놓았다. 꽤 오래 집주인의 관심을 받지 못한 집은 한동안 그의 아침 글쓰기도, 주말 서점 나들이도 방해했다. 직접 목수일도 칠도 미장도 하느라, 웃자란 잡초를 솎아내느라 도무지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곧 원래 생활로 돌아가리라 생각했으나, 결국 “집은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삶에 개입하는 인격적인 존재”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산마루의 호젓한 주택으로 말미암아 그의 생활 자체가 달라졌음을 받아들였다. “계단 난간의 촉감에서, 조금 낮게 걸린 욕실 세면대의 높이에서, 뒷마당 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는 20여 년 전 이 집을 짓고 산 이의 흔적을 헤아렸다. “집은 사소한 것들의 고고학”이며, “집은 내가 한참 뒤에 내가 모르는 어떤 이에게 전해질 편지 같은 것”이라고 <사물의 뒷모습>에도 썼다.

인생과 예술에 대한 생각을 담은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Ⅱ’. 손잡이가 다섯 개 달린 문에는 ‘kunst(예술)’, 손잡이가 없는 문에는 ‘leben(인생)’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그 사이엔 화분에 꽂힌 나무 의자가 있다. 저 문을 열 수 있을까? 의자를 다시 살아 있는 나무로 키울 수 있을까?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공구를 모으는 취미가 있고, 한때 목수가 되려 한 미술가는 1층 작업실에서 대패질·톱질을 하고, 목공 기계를 돌린다. “몸은 안 쓰고 입으로만 작업한다”는, 개념 미술가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는 일상이다. 이곳에 살며 그에게 한 발짝 떨어져 세상을 관조하는 태도가 더해졌다. 그렇다고 ‘대열을 벗어난 지난날의 도인’이 된 건 아니다. 이 집에 살며 나무니 풀이니 하는 것이 글과 작품에 등장할 따름이다. “어느 날 집 근처 계곡의 물소리를 듣다가 떠올렸어요. 빗물처럼 사람도 흐르다 머물고, 스며들며 한 세상 살고 있구나. 웅덩이에 머무는 동안 풀과 나무가 자라듯 사람도 머물며 자라고요. 그렇게 쌓인 생각을 글로 쓰다 2017년 국제갤러리에서 연 개인전 <당신만을 위한 말>에서 설치 작품 ‘머무는 시간’으로 발표했어요. 길이 360cm의 각목에 홈을 파서 공을 경사로에 굴려요. 굴러가다가 멈췄다가 끝내땅에 떨어지죠. ‘공이 굴러가는 짧은 시간이 삶이라면,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묻고 싶었어요.” 은퇴, 산 아래 마당 집, 자녀의 독립 등이 그를 좀 나긋하게 만들었으나, 세상을 향한 그의 혀는 뼈가 없어도 여전히 단단하다. 그 안에 빼앗길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눈 감고 비켜가지 말지어다’란 잠언 같은.

‘단결해야 자유를 얻는다’는 의미로 외투 세 벌을 붙인 작품 ‘단결, 권력, 자유’(1992년 작). 이번 전시에서는 아홉 벌로 확장했다.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밟히지 않는 이도, 밟지 않는 이도 없는 세상이다. ‘2/3사회Ⅱ’.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하루하루 무엇을 하기에 아직 은퇴를 하지 않는지 냉정하게 따져보는" 미술가 안규철.
인생+예술=인생, 인생-예술=인생
“내 삶이 곧 예술” “예술을 위해서 내 삶을 태운다”란 말이 멋지긴 하지만, 그의 말은 아니다. “인생에 예술을 더해도 그냥 인생, 인생에서 예술을 빼도 그저 인생”이 그의 말이다. 그는 예술과 인생 사이에서 어떤 접점을 찾으려 애써왔다. 1991년 유학 시절 제목을 지은, 그의 자화상 같다는 작품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Ⅱ’에 그 실마리가 보인다. 독일어로 ‘kunst(예술)’라 쓰인 문에는 손잡이가 다섯 개 달려 있다. 예술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다섯 가지 어려운 질문을 한꺼번에 답해야 한다. “예술은 인생보다 중요한가, 무얼 하길래 예술가인가, 매 순간 예술가인가, 한번 예술가이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가” 등이 그 질문이다. ‘leben(인생)’이 적힌 문에는 손잡이가 없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문을 열고 예술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다짐이다. 1991년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2021년에도 효력 발생 중이다. 낮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다. 예술도 그러하리라 그는 믿는다. 밤이 올 때까지 잠겨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예술가의 사유를 간추린 개인전 <사물의 뒷모습>이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를 위해 30년 동안 해온 작업 중 어떤 것이 아직도 유효한지, 흘러간 유행가처럼 잊힐 작업인지 매서운 눈으로 추렸다. 몇몇은 축소 모형으로, 몇몇은 보완하고 새로 제작했다. 미술가 안규철의 30년을 요약하는 작품이 부산 망미동에 부려져 있다. 누구의 생이든 브레이크란 없고, 각자 편도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실체를 향해 질주한다. 그가 그만의 실체를 붙잡고 몰두한 것처럼 우리도 골똘해질 때다. 자신의 심연과 마주서보고, 자신의 삶을 피동태 대신 능동태로 바꿔볼 30분. 그동안, 여러 번의 오후가 공기 사이로 쏟아질 것이다.


안규철 개인전 <사물의 뒷모습>

기간 7월 4일(일)까지
장소 국제갤러리 부산
문의 051-758-2239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박찬우 | 취재 협조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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