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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조율 명장 이종열 "나한테는 조율이 무대 너머의 무대에서 완성한 작품이에요"
누구에게나 가장 뜨거운 절정의 시기가 있다. 어떤 일을 하든 열정과 힘과 기술이 생의 최대치에서 만나는 순간. 올해로 83세가 된 이종열 명장에겐 늘 오늘이 그때이다. 그의 조율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분명 더 아름다울 테니까. 매일 끊임없이 스스로 갈고닦는 조율의 시간. 조명도 박수도 없는 무대 뒤에서 홀로 고군분투해온 그 시간이 있기에 피아니스트와 관객은 최고의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너머의 피아노 보관실은 오직 이종열 명장을 위한 무대다. 그는 조율을 앞두고 언제나 말쑥한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맨 채 천천히 그 무대 안으로 들어선다. 명장의 조율은 그가 자신만의 무대에서 펼치는 가장 아름다운 연주, 매 순간 혼신을 다해 완성한 예술 작품이다.
어스름한 무대 위, 검은 비단처럼 매끄러운 그랜드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다. 조명이 켜지고 피아니스트가 뚜벅뚜벅 걸어 나오면 이내 묵직한 적요를 뚫고 울리는 피아노 건반 소리. 우리가 감상하는 공연은 보통 여기서부터다.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음악은 우리를 깊은 감각의 풍경 속으로 이끈다. 때로는 봄 햇살에 반짝이는 유리구슬같고, 때로는 거대한 폭풍우가 몰려오는 바닷가 같은 풍경.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마치고 일어서면 우리는 환호한다. 텅 빈 무대를 뒤로한 채 관객들도 웅성웅성 몸을 일으킨다. 우리가 감상하는 공연은 보통 여기까지다.

2003년 내한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공연은 다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고집스럽고 꼬장꼬장하기로 유명한 폴란드 거장이 모든 연주를 마친 뒤 낯선 이름 하나를 무대위로 끄집어 올렸기 때문이다. “완벽한 조율로 최상의 피아노 상태를 만들어준 미스터 리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시 2천4백 석을 꽉 채운 청중 앞에서 거장의 감사를 받은 노신사는 예술의전당 피아노 전담 조율사인 이종열이었다. “조율을 잘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면 피아노 고쳐주는 아저씨에 불과할 테지만, 나는 조율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지난해 말 출간한 <조율의 시간>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조율이란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중략) 아름다운 소리에 힘이 갖추어지면 조율사가 감동하고, 다음으로 연주자가 감동하고, 끝으로 청중이 감동한다.” 그러니 적어도 음악을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알아야 한다. 당신의 마음을 움직일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위해선 걸출한 피아니스트에 앞서 걸출한 조율사가 존재해야 한다는 걸. 이를테면 이종열, 현재까지도 국내에서 유일무이한 피아노 조율 명장이다.


풍금을 사랑한 소년
이종열 명장이 회고한 ‘생애 첫 조율’은 중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라북도 전주시와 완주군 사이의 작은 마을, 대대로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또래 아이들과는 좀 달랐다. 친구들이 공을 차며 뛰놀거나 냇가에서 붕어를 잡느라 정신없을 때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 뚝딱뚝딱 단소를 만드는 아이였으니까. 당시 그의 지상 최대 고민은 ‘어떻게 하면 단소로 서양식 칠음계를 낼 수 있을까?’였고, 이후에도 반음계까지 더한 단소를 개발하며 조금씩 ‘음을 조절하는’ 감각을 익혔다. 음악이 뭔지도 모르지만 소리 나는 건 다 좋았던 그때, 소년에게는 악기가 끼니보다 더 간절했다. 한 학교에 한 대밖에 없는 풍금을 직접 만져보고 싶었고, 브라스 밴드에 들어가 클라리넷도 불고 싶었다. 그러나 숫기 없는 소년은 그런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골에선 중학교만 나와도 많이 배웠다고 하던 가난한 시절, 그는 여덟 남매 중 장남이었다.

인생의 전환점은 고등학교 3학년 무렵 찾아왔다. 먼 친척을 따라 우연히 놀러 간 예배당에서 풍금을 마주한 것이다. 직접 만질 수 있는 풍금과의 만남,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몰래 예배당을 들락거리며 풍금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4부 합창곡을 연주하다 보니 어떤 화음은 소리가 괜찮은데, 어떤 화음은 좀 와글와글한 거예요. 다 똑같이 안정된 소리가 나게 할 순 없을까 고민하게 됐지요. 풍금은 리드가 진동해 소리를 내는 악기이니까 물리를 공부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이렇게 섣불리 단언하고 무작정 덤벼든 거죠.” 그때부터 교과서도 열심히 뒤지고 풍금 뒷부분을 이것저것 건드리기도 했지만, 어설픈손길 탓인지 화음은 점점 더 나빠졌다. 결국 그가 택한 마지막 방법은 전문 조율 서적을 구하는 것. 우여곡절 끝에 시내 서점에서 일본어 조율 서적을 주문한 그는 끈질긴 독학 끝에 기어이 예배당 풍금을 고쳐내고야 말았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조율을 업으로 삼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다. 그저 자신이 반주하는 풍금이 깔끔하고 정돈된 소리를 내게 하는 것, 그의 목표는 오직 그뿐이었다. 다만 제대 후 진로를 결정할 시기가 되니 도저히 풍금을 놓고 제약회사나 비료 공장에 다닐 마음은 들지 않았다(고등학교 때 화학을 전공했다). 그는 고민 끝에 결정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야겠다.’ 그날 이후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전주의 작은 풍금 수리업체에서 출발해 서울의 수도피아노사와 삼익피아노사를 거쳤고, 이후 프리랜서로 활동하다가 1980년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프리랜서 시절, 그의 조율에 반한 여러 유명 연주자들의 추천 때문이었다. 예술의전당으로 넘어온 지는 25년이 됐고, 3년 전부터는 롯데콘서트홀의 전담 조율사도 겸하고 있다. “롯데콘서트홀의 경우 처음 개관할 때부터 제의가 들어왔는데, 두 곳을 동시에 맡을 수는 없으니까 퇴짜를 놨지요. 그 후 1년 동안 피아노 연주자들로부터 불평이 끊이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사이 조율사가 여덟 명이나 바뀌었대요. 결국 1년 뒤 다시 내게 정중하게 부탁했고, 예술의전당 공연이 바쁠 땐 내 제자가 대신 가서 조율하는 조건으로 그 자리를 수락했지요.”

“자격증 하나 따면 다 되는 줄 아는 조율사들이 있다. 그런 조율사들을 붙잡고 열심히 강의했더니 그렇게 안 해도 세끼 밥 먹는 것은 똑같다고 한다. 그럴 때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조율도 제대로 하려면 완전히 미쳐야 한다. 미치지 않고 성공할 수 없다.” - <조율의 시간> 中

끝없는 조율의 시간
그가 조율사로 일한 지도 올해로 65년째. 그간 공연장 조율만 4만 1천 회가 넘고 가정집의 피아노 조율은 일일이 따질 수도 없을 정도지만, 이 여든셋의 노장은 여전히 조율하는 일이 즐겁다고 말한다. “재미있고말고요. 조율을 마친 뒤 원하는 소리가 탁 나올 때면 지금도 막 짜릿한 거 있죠. 성취감이 엄청나요. 피아노 조율이란 학문을 사랑하니까 자꾸만 깊이 들어가게 되는데, 그럴수록 한도 끝도 없이 새로운 세계가 열리더라고요. 그러니 지난 60여 년간 조율을 조금씩 더 잘하게 된 거지요. 작년보다는 금년의 내가 더 잘하고, 아마 내년에는 더 잘할 거예요.”

사실 조율이란 게 보통 체력과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 아니다. 평균 조율 시간은 두 시간 정도지만, 피아노 상태에 따라 다섯 시간이 넘게 걸릴 때도 있다. 이를테면 피아노를 새로 들이거나 피아노 속 해머를 새로 교체했을 때. “그럴땐 여섯일곱 시간쯤 피아노를 털어서 다시 만들어줘야 해요. 못된 피아노는 여덟아홉 시간, 경우에 따라서는 열다섯 시간도 걸리지요. 근데 여기 처음 오는 피아노는 전부 못된 거예요. 독일산 스타인웨이라고 해서 박스 풀어 무대에 탁 내놓으면 그냥 연주가 되는 게 아니거든. 소리 자체도 문제지만, 홀마다 성격이 다르니까 보이싱을 통해 그 홀에 맞는 소리를 만들어야 하지요. 지금 보관실에 있는 피아노 중 한 대도 지난겨울 점검 기간 동안 해머를 싹 바꾼 건데, 정상적인 소리가 날 때까지 조율하는 데만 50시간이 걸렸어요.” 그간 단 한 대의 새 피아노도 그냥 써본 일이 없지만, 무대감독 몇 명을 제외하면 그의 노고를 아는 이는 드물다.

“비싼 피아노라 역시 소리가 좋네” 이렇게들 말할 뿐이다. 게다가 조율은 비단 피아노와의 싸움만이 아니다. 그 한 번의 무대를 위해 오랜 시간 공들인 연주자들은 언제나 가장 민감한 상대. 덕분에 힘든 순간도 많았다. 그는 지난 60여 년 동안 1년에 한두 번씩은 조율을 그만두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조율사의 전문성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 자신의 실수조차 조율 탓으로 돌리는 몇몇 연주자 때문이다. “사람 상대하는 일이 가장 힘들어요. 그래도 가끔 피아노 소리가 정말 좋다는 얘기를 한마디씩 들으면 그동안 쌓인게 한 번에 풀려나가곤 하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피아니스트는 단연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그간 셀 수 없이 많은 거장의 공연에 함께했지만, 그중에서도 지메르만은 유독 까다로운 연주자였다. 본인이 조율 기술을 지닌 데다 자기 피아노를 끌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 정도이니까. 그런 완벽주의자 앞에서 긴장과 불안감을 잔뜩 안고 조율했으니, 그날 무대에서 받은 인사가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모든 박수는 연주자의 몫이잖아요. 그날을 위해 내가 무대 뒤 컴컴한 곳에서 혼자 땡땡거린 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요. 사실은 3분의 1씩이거든요. 피아노와 조율사, 그리고 연주자. 그런데 지메르만은 조율을 잘해준 조율사에게 그 몫의 박수를 나눠준 거예요. 지금껏 그토록 많은 조율을 했지만 연주자가 무대에서 조율사를 칭찬한 건 그때가 유일했어요.” 그가 고이 간직해온 사진첩에는 지메르만 외에도 무수한 거장이 자리했다. 라자르 베르만, 게리 올슨, 엘렌 그리모, 알리시아 데라로차, 파울 바두라스코다, 잉그리트 헤블러, 넬슨 프레이레, 막심 므라비차…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전설적 피아니스트들의 사진 위로 ‘동양 최고의 조율사’라든지 ‘경탄할 만한 피아노 조율’이라 적은 친필 사인이 가득했다.

지난해 말 이종열 명장이 출간한 책 <조율의 시간>은 오직 조율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지난 인생을 회고하며 묵직한 울림을 건넨다.
조율사로 살아간다는 것
“연주를 망칠 수도 있고 더 좋아지게 할 수도 있는 게 피아노 조율사의 역할이고 힘인데, 선생님이 조율해주시면 약간 피아노 음에서 빛이 나는 느낌이 들어요.” 지난해 말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앞두고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인터뷰를 통해 남긴 말이다. 음에서 빛이 난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명장에게 묻자 단번에 무릎을 쳤다. 실제로 매번 조성진의 공연을 준비할 땐 “음색을 또랑또랑하게 정말로 빛이 나는 것처럼” 만든다고 말이다. “피아니스트마다 그 사람이 지닌 소리가 있어요. 콩쿠르 때만 봐도 피아노 한 대 놓고 지정곡으로 연주를 하잖아요. 근데 어떤 사람이 치면 음이 밝고 화려한데, 어떤 사람의 연주는 뭐가 꾹꾹 누르는 것처럼 칙칙할 때가 있거든. 그 사람은 손에서 그 소리밖에 안 나오는 거예요. 참 신기하지요.”

사실 조율사도 사람인지라 실수할 때도 있다. 그도 그랬다. 대전시민회관에서 가브리엘 타키노의 피아노를 조율할 때 건반 가운데 지렛목을 빠뜨린 것 한 번, 호암아트홀의 피아노 어깨 부분에 약을 잘못 칠한 것 한 번. 65년 조율 인생을 통틀어 실수라고는 그렇게 두 번뿐이지만, 그때마다 식욕이 뚝 떨어지고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단다. “실수를 하고도 멀뚱멀뚱한 사람은 절대 발전이 없어요. 실수한 것에 대해 가슴 아프게 고민하고, 반성하고, 어떻게 해결할지 연구하고, 그러면서 한 계단 한 계단씩 쌓아 올라가는 거예요.” 그에게 조율이란 끝없이 펼쳐지는 학문의 세계, 매번 반성하고 연구해야 하는 세계, 그러니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해도 결코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세계다. “피아노라는 악기가 기계에 담긴 데이터대로 고르게 진동을 해주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사람의 귀는 데이터대로 진동을 안 한다는 것까지 감지해 다른 음들과 조화를 찾아줘요. 그러니 그 결과가 가장 아름다울 수밖에요.” 귀로 찾고 손으로 짚고, 그렇게 집중하다가 음이 딱 맞았을 땐 숨이 멎을 것 같다. “그 감각을 조율사가 아닌 사람은 몰라요. 조율을 정말로 잘해놓으면 귀신이 여기 붙은 것처럼 막 소름이 끼치는 그런 느낌이에요. 그러면 이제 아까워서 나는 더 못 치지요.”

그는 긴 인터뷰를 이어가는 틈틈이 예술의전당 내 여러 공연장을 비추는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빈 무대가 하나둘 채워지고, 연주자들이 리허설을 진행하는 모습이 차례차례 흘러나오는 화면. 그가 오늘 아침에 막 조율을 끝낸 피아노도 거기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밤, 새로운 연주자가 그의 손때 묻은 피아노로 공연을 펼칠 터이다. 그는 또 어떤 심정으로 그 무대를 바라볼까. “나한테는 조율이 작품이에요. 미술하는 사람에겐 그림이 작품이니까 그걸 걸어놓고 감상할 것 아니에요. 좋으면 전시하고, 아니다 싶으면 찢어버리고. 조율도 마찬가지예요. 다 해놓고 코드를 눌렀을 때 소리가 똥글똥글하게 피어오르면 나부터 감동하게 돼요. 내가 감동하면 피아니스트가 감동하고, 그럼 그도 기분이 좋아져 다른 때보다 더 연주가 잘되는 것처럼 느낄 테고, 객석에서도 피아노 소리가 예쁘면 관객들이 감동을 하겠지요. 그게 바로 조율이 주는 감동이에요.”


조율을 배우고 싶은 이에게
이종열 명장에 따르면 연주에 필요한 건반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 ‘조정’, 아름다운 음이 나도록 여러 방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정음’,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합한 것이 ‘조율’이다. 그는 조율사를 지망하는 후배들을 위해 이렇게 썼다. “조율 지망생은 기능상 결함이 없는 청각, 시각, 촉각을 가졌다면 평범한 조건으로는 합격이다. 여기에다 기계적인 소질이 있고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이면 중상위 합격선이고, 피아노를 잘 치며 예민한 음악적 귀를 갖추었다면 최상급이다. 기계적 소질이 없어 기둥에 못 한 개 박는데 자기 손가락을 몇 번씩 두들기는 사 람도 반복 훈련으로 조율을 배울 수는 있다. 다만 숙달 속도가 더딜 뿐이다.”

글 류현경 기자 | 사진 이정규 | 촬영 협조 예술의전당(02-58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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