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아 작가는 강원대학교 미술학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중국 천진미술학원 국화과에서 화조화 전공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두 차례의 개인전과 여덟 번의 그룹전에 참가했으며, 현재 강원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초여름의 촉촉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수국 꽃잎 한 장 한 장이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연꽃이 활짝 피어난 연못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오 리 커플의 깃털은 금방이라도 바람에 흩날릴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 다. 얼마나 가느다란 붓으로, 얼마나 오래 걸려 완성한 그림일까? 종이 에 그린 걸까, 천에 그린 걸까? 한국화를 전공한 정선아 작가는 대학교 2학년 채색화 수업 시간에 공 필화 기법을 처음 접했다. “공필화는 중국 당대부터 전해 내려온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초상화 기법으로 많이 쓰였어요. 무척 세밀하고 공이 많이 드는 그림이죠. 처음 공필화를 접한 그해 겨울방학에 친구들과 함 께 전시를 준비했어요. 그때 인물화를 그리며 공필화의 매력에 푹 빠졌 죠.” 정선아 작가는 졸업 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공필 화조화를 공 부했고, 지난해 말 두 번째 개인전 <그대의 계절>에서 꽃과 나무, 새와 곤충을 그린 화조화를 선보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화조화 중에서 공필화로 그려내는 화조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정선아 작가는 그 답을 작업 과정에서 찾는다. “세상에 꽃 그림은 정말 많잖아요. 화려 하고 눈에 띄는 기법으로 그린 화조화도 넘쳐나고요. 하지만 공필화 기 법으로 그린 화조화가 지닌 깊은 멋과 기품은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아 요. 비단에 조금씩, 천천히 색을 물들이는 과정이 정말 매력적이에요.” 정선아 작가가 공필 화조화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필수적이다. 먼저 소묘지에 아주 정밀하게 스케치를 한 후, 비단 을 붙인 틀 밑에 이 스케치를 받치고 선을 긋는 선묘 작업을 한다. 작품 크기가 클수록 이 작업을 한 번에 하기 힘들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스케 치해서 재조합하기도 한다. 채색 작업은 ‘분염’과 ‘조염’으로 나뉘는데, 분염은 명암을 넣는 것이다. 예를 들어 꽃을 채색할 경우, 바깥쪽에서 중앙(꽃술)으로 갈수록 더 진해지는 꽃잎의 색, 이파리의 더 진한 부분 등에 명암을 넣듯 색을 올리는 것이다. 그다음 ‘배채(비단의 뒷면에 채색 하는 작업)’를 하고, 앞면에 아주 담淡한 색부터 시작해서 계속 쌓아 올 리며 색을 만들어나가는 조염 과정을 거친다.
“이때 평붓으로 색을 씻어 내고, 마르면 다시 색을 올리는 작업을 해야만 한층 더 곱고 부드럽게, 깊이 있게 색을 물들일 수 있어요. 그래서 조염 과정 중 꼭 한 번 이상 씻 어내는 작업을 하죠.” 작가는 이러한 채색 과정을 수십 차례 반복한다. 맑고 연한 색의 무수한 중첩이 결과물로 탄생하는 것이다. “서양화처 럼 한 번에 제가 원하는 색을 만들어 캔버스에 바로 칠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담한 색부터 올리기 시작해 색을 입히다 보 면 어느 순간 원하는 농도의 빛깔이 나올 때가 있 어요. 그 순간 희열을 느끼죠. 간혹 배경색이 진 한 경우에는 염색한 천에 그린 거냐고 묻는 분도 있어요. 그만큼 색이 자연스럽게 보인다는 뜻이 겠죠?” 가로 50cm 정도의 소품을 완성하는 데도 1개월 남짓, 1m가 넘어가는 대작은 스케치하는 데만 3주가 걸리고, 완성하기까지는 거의 5개월 이 소요되기도 한다. 표지작 ‘홀리데이holiday’역 시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으로, 작가가 지 난해 여름 내내 개인전을 준비하며 바쁘게 지내 던 중 여행의 추억을 되새기며 작업한 작품이다. “캔버스에 아크릴물감으로 채색한 서양화가 화 려한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이라면, 비단에 물들 인 공필화는 봉숭아 물들인 손톱 같아요. 비단 에 조금씩 스미면서 층층이 쌓이는 색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그 깊이 있는 색감이 정말 좋아요.” 비단 공필화는 후반 작업도 중요하다. 변색이나 뒤틀림 등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표 구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 작품 한 점마다 짧 게는 2주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 배접 과정이 필요 하다. 정선아 작가는 이처럼 공이 많이 드는 까다 로운 공필화 작업이지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치 않고 좋아한 일이기에 앞으로도 그 정도 어 려움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지 않느냐며 활짝 웃는다.
‘그대에게’, 비단에 채색, 54.5×54.5cm, 2016
“앞으로 더 다양한 꽃을 그려보고 싶어요. 세상엔 수천수만 가지 꽃과 식물이 존재하니까요. 서양의 꽃을 공필화로 그리면 어떨지 궁금해요. 처음 저를 공필화의 매력에 눈뜨게 한 인물화도 다시 도전하고 싶어요. 서예를 배우려고 준비 중인데,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기대가 커 요.” 정선아 작가는 5월에 전주 부채문화관 초청으로 2인전을, 10월 중 순에는 인사아트센터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선보일 예정이다. 벚꽃 활짝 핀 나뭇가지에 올라앉은 새 두 마리, 여름 과일처럼 달콤하 게 피어난 수국, 한껏 늘어진 버드나무 이파리 아래 사이좋게 헤엄치는 오리 한 쌍…. 정선아 작가의 작품은 지금 당장 숲 한가운데 가져다놓 아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자연의 곱고 맑은 빛깔과 닮았다. 오래 곁에 두고 보고 싶은 사람처럼, 매일 아침 창밖을 내다보듯 저절로 시선이 향 하는, 그런 순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 덩달아 말 랑해진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