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가라!” 최신 파일 오디오 플레이어를 들여놓으면서 외친 감탄이다. 녹음 스튜디오의 퀄리티를 그대로 담았다는 MQS 사운드는 훌륭했다. 첫 곡은 에런 코플런드Aaron Copland의 ‘보통 사람을 위한 팡파르’다. 새로운 시작엔 그에 걸맞은 의식까지 곁들여야 제격 아니던가. 섬세함과 강력함이 교차되어 섞인 울림은 앉아 있는 방의 공기마저 술렁였다. 치밀한 밀도의 매끄러움이 귓전을 스치고 묵직하고 단단한 저음은 가슴을 짓눌렀다. 이전에 없던 새로움은 실력으로 무장하게 마련이다. 70년 된 진공관의 불빛은 따뜻한 온기를 잃지 않는다. 디지털이 풍기는 날카로움과 현란함을 덮는 안정의 모습이다. 50년 넘은 탄노이는 세월의 더께마저 아름답다. 쌓인 먼지와 변색의 오염마저 음으로 바꾸는 악기의 자질이 있기 때문이다. 첨단과 과거가 어울려 내는 변주는 대단했다. 감탄과 감동은 아끼지 말아야 잘 사는 방법이다. 놀랄 때 놀라고 감동의 양은 아껴선 안 된다. 깜짝 놀라는 건 누구나 한다. 까~암짝도 모자라 화들짝 놀라야 제대로 된 감탄이다. 처박아두고 잘 듣지 않던 음악에 가슴이 벌렁벌렁해져야 감동이다. 한 짓이라곤 있던 앰프와 스피커에 고작 새로 산 파일 플레이어로 음악을 틀었을 뿐이다.
요즘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공간이 늘어났다. 이태원, 신사동, 양재동, 멀리 파주까지. 주인장의 성격만큼 다른 오디오 기기로 들려주는 음악은 특색 있다. 빈티지에서 최신 오디오를 넘나드는 선택의 스펙트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주인장의 공간과 오디오는 살아온 시간의 이력을 그대로 담은 존재의 흔적이라고 할 만했다. 흘러나오는 음악에서 숨어 있는 순정이 읽히고 오디오의 폼에서 확신의 고집이 드러난다. 오디오는 곧 인간이었다. 집채만 한 스피커의 위용에 놀란 게 아니다. 궁극의 스피커가 내는 음의 완결에 도취되었을 뿐이다. 원하는 음이 나올 때까지 멈추지 않았던 시도와 반복의 결과는 대단했다. 다가서면 멀어지고 잡았다 하면 본색을 드러내는 신기루 같은 음이다. 진공관을 구하기 위해 온 세상을 뒤졌다. 필요한 전깃줄을 깔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벽을 뚫었다. LP 플레이어의 정확한 침압을 재기 위해 오차가 없는 저울까지 구했다. 음이 차이가 났다. 원하는 음이 나올 때까지 해볼 수 있는 짓은 반복했다. 주변의 소란함을 피하기 위해 남들이 잠든 깊은 밤 홀로 앉아 스피커와 마주했다. 홀로 새벽을 맞은 어느 날 그토록 바라던 음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평생 이어온 열정의 시간은 기어코 궁극의 황홀감을 맛보게 해주었다.
멋진 인테리어를 한 작업실을 찾았다. 공간에 놓인 오디오는 금속 광채로 빛나는 자그마한 앰프였다. 허공에 뜬 듯한 느낌이 들만큼 접지면이 작은 스피커는 온통 새까맣다.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오디오를 선뜻 주목하지 않았다. 아끼던 위스키 한 잔을 따라준 주인장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음악 한번 들어볼래요?” 시큰둥했다.ECM ‘닐스 페테르 몰베르Nils Petter Molvaer’의 CD를 들려줬다. 작은 몸체가 내는 음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날 선 칼이 풍기는 서늘한 질감의 음이 공기를 일렁였다. 공간을 꽉 채우는 듯한 공기의 밀도감이 온몸으로 다가왔다. 음악은 분명 자그마한 오디오에서 나오고 있었다.
주인장은 공간의 분위기를 해치는 어떤 것도 들여놓지 않았다. 작은 오디오는 결코 작지 않았다.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안목의 선택에 혀를 내둘렀다. 오로지 오디오만을 위한 곳도 있다. 신사동의 한 건물 전체가 오디오를 들여놓은 방이다. 음악만을 듣기 위해 오디오가 필요하지 않다. 오디오란 오브제이기도 하다. 음악이 흐르는 공간이 얼마나 큰 풍요의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증명한다. 벽면엔 피아노와 같은 광택의 스피커가 놓였다. 몇 단으로 쌓아둔 앰프가 보이지 않는다. 기기의 존재는 가리고 음악만을 위한 비주얼도 가능해졌다. 어둑한 조명으로 감싼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대결이 아닌 이완의 감정으로 즐기는 오디오는 독특하고 신비로웠다.
한때의 열정이란 식기 마련이다. 젊어서 오디오에 관심 없는 사람도 드물다. 지식인의 교양과 현학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음악이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나 역시 오디오는 차라리 로망이었다. 하지만 점차 관심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좋아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대는 동안 세월은 흘러가버렸다. 더좋은 음질과 간편함으로 무장한 스마트 기기의 위력은 대단하다. 머리에 뒤집어쓴 헤드폰으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음악 세계가 펼쳐졌다. 과연 우리는 거추장스럽게 보이는 오디오를 걷어차도 좋은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제 오디오는 필요하지 않다. 컴퓨터의 사용으로 연필과 만년필 쓰는 이들이 줄어든 것처럼. 하지만 반전은 지금부터다.
디지털의 편의를 맛본 이후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다. 편의와 바꾼 즐거움과 감각의 깊이가 문제다.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처럼 제가 한짓의 기억이 남지 않는다. 음악을 들어도 감탄과 감동의 깊이가 사라진 지 오래다. 과잉의 선택에서 오는 혼란도 유쾌하지 않다. 진득하게 오디오를 한 이들이 결국 더 많은 걸 얻었다. 불편을 감수하고 아까운 시간을 쏟아가며 아등바등했던 행동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았을 테니까. 인간은 세상의 크기로 보고 익숙해진 자극과 반응에 더 익숙하다. 천둥소리와 피부에 닿는 빗줄기의 강도는 잊는 법이 없다. 오디오는 실물의 감각을 충실하게 재현해주어 소중하다. 슬금슬금 예전의 오디오로 음악 듣는 이들이 늘고 있다. 유럽에서 늘어나는 비닐 레코드 숍의 수만 봐도 안다.
오디오를 한다는 건 이제 축복이다. 선택의 즐거움과 만지고 보이는 실물의 가치가 더 짙게 다가오기때문이다. 음악의 감동이 기기의 존재로 증폭되면 오디오 자체가 음악이 된다. 아직도 섭렵하지 못한 오디오가 널렸다. 터프한 근육질의 마초과부터 섹시하고 요염한 미인 오디오까지. 오디오는 그저 듣기만 하는 게 아니다. 하는 거다.
글을 쓴 윤광준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마당>과 <월간 객석>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했다. 사진만큼 오랜 시간 천착해온 또 하나의 분야는 ‘오디오’. 오디오야말로 현대 과학이 만들어낸 인간의 심성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요, 좋은 오디오로 듣는 음악은 피가 통하고 따뜻한 체온이느껴진다고 설파한다. 2001년 오디오에 바친 인간의 열정과 이야기를 담아낸 <소리의 황홀>을 출간했으며, 40년 이상을 오디오와 뒹굴며 산 경험을 다양한 칼럼으로 소개하고 있다.
- 소리가 나를 치유한다_ 여는 글 지금 ‘오디오’ 하라
-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