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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화백 40년 동안의 환희
지난 9월 24일 제주도 한림읍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김창열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행복>은 미술관 개관을 즈음해 평창동 자택에서 김창열 화백을 만났다. 물방울 그림이 가득한 작업실에서 백발에 흰 수염, 흰 셔츠 차림의 노대가老大家는 아무렇지 않게 농담하듯 죽음을 이야기했다.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 여덟, 미수米壽를 앞둔 김창열 화백. 물방울의 배경에 한자를 써넣은 것은 어린 시절 그에게 천자문을 가르친 조부의 영향이다.
작가가 부재한 작업실은 기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평창동 김창열 화백의 자택 지하에 널찍하게 자리한 작업실엔 그가 없었다. 작게는 짜고 바르기를 반복해 색색의 유화물감이 여러 개의 작은 탑처럼 굳은 낡은 팔레트부터 그 개수를 세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작품이 그려진 엄청난 규모의 캔버스 더미까지, 그곳엔 대가의 작품 세계와 지난 수십 년 세월의 더께가 한데 충적되어 있었다. 1998년부터 20년 가까이 김 화백의 조수로 일해온 신중태 씨는 물감탑에 감탄하는 사진가에게 “제가 처음 여기 왔을 때부터 있던 팔레트입니다. 선생님은 물건의 위치를 잘 바꾸지 않으시거든요”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크기와 모양, 재질과 색상이 제각기 다른 그 수많은 캔버스에 모두 물방울이 있었다.

(왼쪽) ‘회귀’ 연작의 바탕으로 만들어놓았을 법한, 한자가 빼곡히 쓰인 종이로 겉을 싼 나무 박스 안에 캔버스 두루마리가 가득 쌓여 있다. (오른쪽) 차곡차곡 정리된 크고 작은 캔버스를 굳이 들추지 않아도 그 안엔 크고 작은 물방울이 그려져 있으리라. 
김창열 화백은 지난 1972년부터 40년 넘도록 물방울을 그려왔다. 그림속 물방울은 자신을 비추는 빛과 그림자를 통해 그 아래 바탕이 되는 재질과 색, 문자를 투명하게 드러내고, 또 굴절한다. 평론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이우환 화백은 이 물방울에 대해 “물질과 환상을 겹침으로써 새로운 시각적인 것을 제시했다. (중략) 물방울 하나는 기쁨도 주고 설움도 주고 어떤 추억이나 기억도 되살려준다. 우리는 영롱한 물방울 속에서 또 다른 환상도 본다”고 평했다. 그런 그의 물방울 앞에선 누구나 상념에 잠기게 마련이다.

김창열 화백이 수십 년간 짜고 바르기를 반복해 팔레트에 그대로 굳은 물감 탑. 팔레트 밑에 깔아놓은 신문은 10년도 더 된 것이다. 
유배 생활의 종착지, 제주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물방울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자택 다른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김창열 화백이 작업실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여덟. 나는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질문을 해야 했고, 노대가老大家는 생각을 정리하는듯한 “음…” 소리와 함께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답은 완결된 문장으로서 명확했고, 시종 유쾌한 웃음이 함께했다.

Q 건강은 어떠십니까?
골골하지요. 그래도 운동 삼아 수영도 하고, 손주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Q 이번 미술관 건립을 위해 제주도에 주요 작품 2백20여 점을 기증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여든여덟인가? 곧 죽을 테니까.(웃음) 내가 6ㆍ25 사변 때 제주도에 1년 6개월 동안 있었어요. 내가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단 말이에요. 그런데 제주도의 풍광이 프랑스 남부와 닮았어. 산천이 아주 수려합니다. 제주에서 이중섭 화백도 만나고, 훌륭한 사람을 많이 만나 어울렸지요.

김창열미술관 상설 전시실 전경. 정면으로 ‘물방울 삼부작’(1998)이 보이고, 왼쪽 작품은 ‘회귀’(1989), 오른쪽은 ‘해체’(1985)다.
Q 미술관은 가보셨습니까? 어떠셨나요?
공간이 조금 좁기는 하지만, 그만하면 아주 마음에 들어요. 모양새가 아주 단단합니다.

Q 선생님께 김창열미술관은 어떤 의미입니까?
화가가 미술관 하나를 지어 받는다는 건 스님이 절간 지어 받는 거와 같은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답을 망설이는 나를 보며 잠시 웃던 김 화백은 탁자 위의 차를 마시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 9월 24일 개관한 김창열미술관은 제주 한림읍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자리한다. 4990m2 대지에 지상 1층, 전체 면적은 1587m2 규모다.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홍재승(아키플랜)은 김창열 화백을 여러 번 만나 설계 방향을 상의했다. “‘내 작품의 수장고, 나의 무덤과도 같은 공간’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일반 미술관의 밝은 분위기와는 달라야 했습니다. 신전과 같은 경건한 분위기를 의도했습니다.” 짙은 회색으로 콘크리트 벽을 칠한 미술관의 형태는 한자 ‘돌아올 회回’를 닮았다. 천자문 위에 물방울을 그려 넣은 김 화백의 ‘회귀’ 연작에서 영감을 얻은 것. 물방울 형태를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대신 미술관 한가운데 자리한 중정에 물을 담은 연못을 만들고, 바위에 물방울 형태 유리를 올린 설치 작품 ‘삼신’을 그 안에 넣었다. 중정으로 들어오는 빛에 연못과 바위 위 물방울이 함께 반짝인다. 개관식에 참석한 김창열 화백은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긴 이국 생활이 유배 생활과 다름없어 종착지가 있으면 했는데 그게 제주가 되었네요.”

회回 자 형태로 지은 건물 가운데 빈 중정에 연못을 만들고 바위 위 물방울을 형상화한 설치 작품 ‘삼신’을 두었다.
격변의 시대를 거쳐 세계로
김 화백은 제주를 ‘제2의 고향’ ‘마음의 고향’이라 말한다. 그 이유를 묻자 대뜸 “여자들이 아주 예뻤어. 내가 반한 여자가 여럿이었지요”라며 웃는다. 김 화백은 시시때때로 농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하지만 진짜 고향에 대해 묻자 이내 표정이 바뀐다.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해방 후 월남했다. 가지 못하는 고향을 그는 눈물이 나서 말하기가 힘이 든다고 했다.

Q 고향인 평안남도 맹산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제주도 풍광이 수려하지만 내 고향 산천보다는 모자라는 점이 있습니다. 산속엔 호랑이가 살았고, 벌판에 있던 동굴엔 도적패가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장마가 지는데, 시뻘건 물이 바다처럼 흘러 내려갔지요. 옛날이야기 속에 있을 법한 신비로운 고장이었어요.

Q 고향이 그립겠습니다.
난 늘 고향을 살아요. 머릿속으로는 늘 고향을 생각하면서 그림 그리고 삽니다.

Q 그림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십니까?
소학교 다니던 시절, 지금 나처럼 생긴 할아버지 한 분을 봤어요. 나보다 수염이 더 길었지.(웃음) 아침 등굣길에 애들이 모여 있는 데 가보면 그 할아버지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꽃이나 나무를 그려 그걸로 밥값과 숙박료를 대신했지요. 그 영감님을 동경하지 않았나싶어요. 그리고 중학교 때는 도서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책을 봤어요. 다빈치도 수염이 아주 멋있잖아요? 그림도 잘 그렸지만 다방면으로 아주 만능이었지요. 그 책을 본 게 아주 결정적이었어. 그때부터 그림 그린다고 스케치북 가지고 돌아다녔지요.

Q 한학을 공부하신 할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장남으로 태어나서 법률 공부해서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야지, 그림을 그린다니 그 무슨 소리냐!” 이런 내용의 편지를 아주 많이 보내셨지요. 그래도 다빈치에게 푹 빠져 있던 나는 ‘그림으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했습니다. 화가가 된 것도 할아버지 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붓을 쥐고 그으며 천자문 쓰는 연습을 할아버지 아래서 아주 열심히 했지요. 신문지가 새까맣게 될 때까지 했으니까. 결국 할아버지가 나를 만드셨어요.

Q 월북 화가로 최근 복권된 이쾌대 화백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우셨습니다.
이쾌대 선생님은 내 유일한 그림 선생님이에요. 아주 훌륭한 교육자였고, 성실한 화가, 좋은 남편, 아버지였지요. 6ㆍ25 사변 때, 이북으로 가버렸지만요. “손에는 운동이라는 게 있어. 그 운동을 어떻게 강약을 주고 흐름이 있게 해서 그리는가가 중요해”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Q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그 격변의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혼돈의 세기였어요. 뭐가 뭔지 모르게 세상이 돌아가고,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이 없어지고, 하여간 참 끔찍한 세상이었다고. 서울대 미대에 들어갔는데, 3학년 때 전쟁이 났습니다. 나는 미술가인데, 미술가가 갈 데가 어디에도 없었지요.

해방 이후 김창열 화백은 공산당 치하의 고향을 뒤로하고 월남했다. 예술의 근원인 고향을 떠났지만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우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는 등 화가의 꿈을 이어간 그는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 남겨져 갖은 고초를 겪었다. 치안국에 있던 친척의 제안으로 응시한 경찰 시험에 합격한 그는 임지를 제주도로 정했다. 당시 제주의 산 중엔 빨치산이 숨어 있고, 해안가 마을에는 피란민이 몰려 살았다. 그는 계용묵, 옥파일, 박재식 등 문인과 교류하며 <백록담>이라는 동인 시집을 내기도 했다. “악 소리치며 붉엇을 꽃 너 동백이여”라는 글귀로 시작하는 ‘동백꽃’이라는 시는 시대에 휩쓸려 빨치산이 될 수밖에 없던 또래 청년에게 바치는 헌시였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김창열 화백은 경찰을 그만두고 박서보, 정창섭등과 함께 젊은 미술가의 협회인 현대미협을 창립했다.

Q 김환기 화백의 주선으로 1966년 미국으로 떠나십니다. 그 전에도 파리 비엔날레 등에 계속 작품을 출품하셨지요. 조국 밖의 세상을 꿈꾸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동양은 서양 때문에 망했다고 여겼어요. 그중에서도 한국엔 아무것도 없었지요. 출구는 외국에 나가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있으면 질식사할 것 같았지요. 그런 시대였습니다.

Q 미국은 어떠셨어요?
미국은 내게 새로운 별과 같았어요. 하지만 나는 그때 영어를 못 했거든. 그래서 미국 생활이 참 힘들었습니다. 대접도 많이 받았지만 그만큼 잃은 것도 많았어요.

Q 그곳에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만나셨지요. 그의 10주기인 올해, 감회가 남다르시겠습니다.
백남준은 봉이 김선달이에요. 그 사람은 봉이 김선달이야. 라우션버그, 재스퍼 존스 등과 한패가 되어서 전후 세계 미술을 움직였지요. 백남준 씨는 한국인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런 데 나만 알았지. 그이에게 “당신, 봉이 김선달이지?” 이랬다고. 그렇게 친해지고 나선, 내가 파리로 간 뒤에도 우리 집에 와서 머무르곤 했어요.

Q 그러면 백남준 화백은 어떻게 답하던가요?
“그래, 나 김선달이야!” 하면서 껄껄 웃었지.(웃음)



제주 김창열미술관
빛과 그림자, 그리고 윤회

진입로 쪽에서 바라본 김창열미술관 정면. 건축가 홍재승은 관람객이 마치 신전에 다가가듯 작품에 접근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설계했다. 
김창열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홍재승은 물방울을 직접적으로 건물 형태에 반영하기보다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 그림을 통해 표현한 철학을 고민했다. “설계를 위해 작품을 연구했는데 ‘모든 것이 돌아온다’는 불교 윤회 사상과 맞닿아 있더군요. 그래서 전체적으로 돌아올 회回를 닮은 형태를 떠올렸습니다.” 관람객은 시작과 끝이 따로 없이 순환하는 회랑을 따라 미술관 내부 공간을 이동한다. 건물 한가운데 비워둔 중정엔 연못을 만들어 물에 반사된 빛을 통해 그림 속 물방울을 비추는 빛과 그림자를 표현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도 ‘빛의 중정’. 경사진 입지 덕에 옥상면을 통해서도 미술관으로 진입할 수 있는데, 건축가는 비워둔 옥상 공터를 다양한 문화행사를 위해 활용하길 바란다.
설계 홍재승, 오태훈, 최수연(아키플랜 종합 건축사 사무소) 진행 팀원 박주연, 김설이, 조영우, 이헌녕(현상 설계) 김민기, 이강희(실시 설계)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용금로 883-5 문의 064-710-4150, kimtschang-yeul.jeju.go.kr


그림 속 물방울은 자신을 비추는 빛과 그림자를 통해 그 아래 바탕이 되는 재질과 색, 문자를 투명하게 드러내고 또 굴절한다. “스님들은 물방울의 의미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미 다 아시더라”는 김창열 화백. 스며들지 않은 채 캔버스에 영롱하게 고정된 물방울을 보면 자연스레 찰나와 영원의 관계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물방울이라는 환희
미국 뉴욕에서 팝아트라는 유행에 압도당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충분히 펼치지 못한 김창열 화백은 1970년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파리에서 약 15km 떨어진 팔레조Palaiseau의 낡은 마구간에 아틀리에와 거처를 마련한 그는 이곳에서 미래의 배우자 마르틴 질롱을 만났고, 마침내 물방울의 모티프를 떠올렸다.

Q 그 시절 파리는 뉴욕과 어떻게 달랐습니까?
뉴욕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어요. 동료 작가끼리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크 로스코가 파리에 살았다면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작업만 열심히 하면 작가가 긍지를 갖고 살 수 있었지요.

Q 무수히 받은 질문이겠지만 다시 한 번 여쭤봅니다. 왜 물방울이었습니까?
그런 질문을 여러 번 받는데, 매번 조금씩 다르게 대답했던 것 같아요.(웃음)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좀 어려워요.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나름대로 추출한 물질이니까. 나는 마구간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수도가 없었어. 동료 조각가가 만든 플라스틱 물통에 물을 길어서 식수도 하고, 세수도 하고 그렇게 살았지요. 어느 날 아침이었는데, 마구간 안으로 햇볕이 들어왔어요. 그때 돈이 없어서 캔버스 대신 마대를 썼는데, 마대 뒷면에 물이 튄 걸 봤단 말이에요. 거기에 빛이 비치는데 엄청난 환희를 느꼈어요. 그게 물방울과의 첫 만남이었지요.

1972년 파리의 권위 있는 초대전 <살롱드메Salon de Mai> 전시에서 처음으로 ‘밤의 행사’라는 물방울 그림을 출품한 그는 이듬해 첫 개인전에서 30점의 물방울 작품을 전시했다. 거장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는 전시를 감상한 후 방명록에 “페르피냥Perpignan역(달리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일컬은 프랑스 남부의 기차역)처럼 장엄하다”라는 메모를 남겼다. 파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이후 김창열 화백은 서울과 도쿄, 뉴욕, 베를린, 토론토 등 전 세계 주요 갤러리와 미술관 전시를 통해 자신의 이름과 작품을 알렸다.

Q 물방울을 이렇게 오래 그릴 줄은 모르셨지요?
내가 어딘가 모자란 사람입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면서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하던 거 하다보면 어떻게 좀 물건다운 게 되겠지’ 정도로 생각하며 계속 그렸어요. 지루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요. 달마대사가 면벽을 9년 해서 도를 깨쳤다는데, 나는 40년을 물방울만 그렸는데도 도를 못 깨닫고 지금도 마누라한테 고함지르고 그래요. 달마대사는 죽고 난 뒤에 정신을 남겼지만, 나는 살아 있는 동안에 미술관 하나 지어 받았으니까 이만하면 된 것 아닌가?

Q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물방울 그림을 봤을 텐데요,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으십니까?
어린아이가 엄마와 같이 그림을 보러 왔다가, “야, 이거 눈물 같다”라고 이야기한 게 기억에 남아요.

Q 예술가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왔을 때! 화가가 제일 기쁜 순간이 그거겠지요. 작품 그리면서 계속 행복했습니다.

Q 최근 작업에서 바뀐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기가 좀 빠졌겠지 뭐.(웃음) 미수米壽를 앞두고 자신의 이름이 붙은 미술관 개관을 맞이한 화백께도 더 이루고 싶은 꿈이 있을까요? 없어요, 이제. 곧 죽어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을 해.(웃음)

역시 농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모두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 김 화백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 작업실 밖으로 사라졌고, 사진가가 촬영 장비를 정리하는 동안 잠시나마 다시 물방울 앞에섰다. 그림 속 영롱한 물방울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캔버스 대신 보는 이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제주 김창열미술관에선 내년 1월 22일까지 개관전 <존재의 흔적들>이 열린다.



글 정규영 기자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