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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라이프 멍 때리는 오후가 필요해

오래전 사진에 취미를 붙여 온 사방 천지를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던 시절, 강원도 영월에서 정선으로 넘어가는 동강 상류 마을을 지나며 조그만 점방 평상에 할머니 세 분이 가만히 앉아 있는 장면을 보았다. 도대체 무얼 보시는 걸까? 풀숲을 바라보는 건지, 멀리 개울 너머 산울을 쳐다보는 건지, 그도 아니면 그저 동공을 흐리고 반쯤 주무시는 건지…. 그 장면은 내게 문득 시간이 멈춘 모습처럼 다가왔다. 늦여름 매미 소리를 배경으로 느티나무 아래 할머니들은 정지 화면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사진으로 담기 그럴싸한 그림이라 멀리서 셔터를 가만히 눌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쪽 찐 머리 하얗던 조그만 할머니들, 얼마 남지않았을 인생, 금쪽같은 시간을 저렇게 멍하니 흘려버리는구나. 아까워라. 괜한 측은지심에 마음이 짠했다.

그런데 한편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멍하니 앉아 있지 않으면 저 할머니들, 무얼 해야 좋을까? 이 시간에 저렇게 조는 대신 어떤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을까? 밭을 매거나 양말을 깁거나, 그도 아니면 옥수수를 삶아야 하나? 아니면 고샅길이라도 걸어야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쓰는 걸까? 나중에야 알았다. 할머니들은 다른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멍하니 앉아 있는 게 가장 좋기 때문이라는 걸. 할머니들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순간을 붙잡고 있던 거라는 걸. 정지 화면처럼 보인 게 아니라, 실제로 시간이 정지된 순간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올해 우리 나이로 쉰 살이 됐다. 뜬금없이 나이를 밝히는 까닭은, 나이가 들면 삶이 조금은 심플해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일상은 점점 분주해지고, 생각할 것도 줄어들기는커녕 더 많아지고 복잡해지기만 한다. 살면서 번거로운 일은 어째서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 많아지기만 할까. 요즘은 가끔씩 그 장면이 떠오른다. 평상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할머니들! 내게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처럼 보이던 그 장면 속에서 사실은 그 순간 가장 농밀한 시간을 사용하고 있던 할머니들.

효율성이 추앙받는 멀티태스킹 시대를 살면서 우린 항상 주어진 시간 안에서 무언가 더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시간 낭비란 용납되지 않는다. 내 경우를 예로 들면 운전이 그렇다. 안전벨트를 하고 시동을 걸면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켠다. 항상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은 해야 할 것 같아서다. 우스운 건 이미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서 무심코 라디오 스위치를 다시 켠다는 사실이다. 운전 중에 라디오를 듣는 것은 기본, 신호에 걸릴 때마다 스마트폰을 습관적으로 집어 든다. 새로운 메시지가 왔는지, 아니면 SNS에 무슨 글이 올라왔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통근 시간은 하루 평균 두 시간. 언젠가부터 온전히 운전만 하는 일은 없다. 음악도 듣고 메일도 보고 메시지도 보낸다. 가끔은 이동중에 끼니도 해결한다. 이쯤이면 운전 시간을 지극히 보람 있게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본다. 진짜 그런가? 이게 과연 효율적인 걸까? 무슨 위대한 일을 하길래 이래야 하는 걸까? 분주하게 수선 떨며 단 하나에도 제대로 집중 못 하면서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차를 버리고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미팅에 갈 때도, 지인을 만나러 갈 때도 차를 두고 가능하면 택시를 탄다. 타면 버릇처럼 책을 꺼내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만 이제는 의식적으로 가만히 있어보려고 한다. 흔들리는 차에 앉아 창밖을 응시하는 시간, 실눈을 뜨고 가만히 멍 때리는 시간. 분주한 우리에겐 이런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이달에는 <행복>으로부터 친환경 차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친환경 차를 소개하는 대신 뚱딴지 같은 소리만 늘어놓은 이유가 있다. 세상에 진짜 친환경 차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전기차이건 수소차이건 하이브리드 카건 마찬가지다. ‘비교적 덜’ 반환경적일 뿐이다. 반대 의견도 있겠지만 이런 주제로 갑론을박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세상은 점점 환경오염에 민감해질 것이며, 자동차 기술은 그에 적합한 쪽으로 움직일 테니 우리가 굳이 애써 친환경 차를 찾아 헤맬 필요는 없다.

우리의 임무는 우선 공해 물질을 내뿜는 내 차의 필요 없는 운행을 줄이고 가끔 버스를 타는 일이다. 버스에 앉아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생각을 최대한 단순하게 유지한 다음 눈을 반쯤만 뜨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바로 그때가 고단한 하루의 퇴근길이라면, 강변도로 가로등 불빛이 강물에 어른거리는 금요일 저녁이라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글을 쓴 이경섭은 자동차 매거진 <모터 트렌드>를 비롯해 <이매진> <에스콰이어> 등에서 잡지 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콘텐츠 전문 회사 몽키랩(www.monkeylab.co.kr)에서 미디어 콘텐츠와 관련한 새롭고 신나는 일을 도모하고 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행복>에 연재한 ‘오토 라이프’ 칼럼을 이달로 마무리한다.




글 이경섭 담당 유주희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