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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디자이너 초청 전시 <Tactus : 촉각> 자연에서 얻은 패션,예술이 되다
서울디자인재단이 한국 패션 역사에서 디자이너 한혜자가 차지하는 의미를 반추해보는 전시를 주최한다. 2017 S/S 서울패션위크의 패션 문화 이벤트 일환으로 마련한 ‘명예 아카이브 전시’가 그것. 11월 9일까지 DDP 배움터 디자인 둘레길에서 열리는 전은 패션 디자이너를 넘어 아티스트 한혜자의 예술적 감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시 준비에 한창이던 ‘패션 거장’을 만났다.

청담동 작업실에서 만난 패션 디자이너 한혜자. 그녀는 1972년 브랜드 이따리아나Italiana를 론칭한 이래 파리, 뉴욕 등 세계 무대에서 쇼를 선보이고, 패션과 예술의 영역을 넘나들며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해 다양한 전시에 참여해왔다.
<저녁의 지층>, 1993 . 손이 닿지 않는 자연, 특히 빛과 바람, 물 등을 통해 무한한 변화를 보이는 광석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한 작품.
Q 오늘, 꽤 오랜만에 인터뷰하시는 거죠?
최근 4~5년간은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일을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와도 일부러 안 하고 푹 쉬었지요.

Q 어떻게 지내셨어요?
양평 문호리 시골집을 고치는 작업부터 텃밭도 만들고, 야생화로 마당도 꾸미고…. 자연과 더 가깝게 지내는 시간을 보냈는데 너무 행복했어요. 또 근처에 미술관 구하우스를 지은 구정순 대표와 여행도 많이 다녔고요.

Q 이번 명예 디자이너 아카이브 전시를 제안받고, 기분이 어떠셨나요?
그렇게 한 3~4년 정도 컬렉션도 안 하고 쉬고 있었는데도 초청을 해주니 감사했지요. 이 전시를 통해 그동안 내가 했던 작업을 총정리하는 계기도 되겠다 싶었고요.

1 , 2004. 가공하지 않은 원석의 매혹적 반짝임을 표현한 소재의 톱으로 스커트를 만들었다. 2 <그을린 시간>, 1996. 아크릴을 불에 그을려 만든 드레스. 3 <달에 취한 삐에로>, 2009. 쇤베르크의 오페라 <달에 취한 삐에로>에서 영감받아 그 시와 음악에서 느끼는 몽환적이고 탐미적 풍경을 형상화했다. 
Q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이 이번 전시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텃밭을 가꾸며 땅덩어리에서 나오는 것들, 흙이나 광물에 대한 애정이 더욱 드러났어요. 저는 워낙 재질 자체의 질감을 새롭게 만들어보는 걸 좋아하는데, 주로 자연에서 영감을 얻지요. 지층 속에서 화석이 된 투박한 돌, 반짝반짝 보석같은 광물질 등의 질감을 옷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좋아합니다. 맑은 물에 잠긴 자갈에 햇빛이 비췄을 때 물의 움직임에 따라 빛나는 모습이라든지, 바위에 낀 이끼 위로 이슬이 내린 모습 등 야생적 자연의 날것, 거칠고 가공되지 않은 원석 같은 소재에서 더 예쁜 것을 찾아내면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어요.

Q 그래서 전시 제목이 Tactus, ‘촉각’이군요!
그렇죠. 제 아카이브 중 그러한 철학을 담은 의상을 주로 선별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일상에서 입기엔 조금 힘든 의상도 많지요. 하지만 패션을 옷 이상의 예술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아트 투 웨어Art to Wear’라고나 할까요?

Q 작품 중 베토벤 소나타나 오페라 <월광> 등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도 인상적입니다.
음악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에요. 오페라를 배우려고 강의를 듣기도 했어요. 오페라의 경우 음악도 음악이지만 특히 무대와 의상을 관심 있게 봅니다. 실제로 연극을 하는 딸을 위해 무대의상을 만들어주기도 했고요.

,  2012. 스와로브스키 엘레먼츠와 협업한 작품으로, 빛이 흩뿌려진 도시 야경을 회화적으로 표현했다. 
Q 음악을 패션으로 표현하는 건, 결국 청각을 시각화하는 작업이 아닐까요?
그렇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 저는 패션 자체가 오감을 충족시키는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컬렉션을 준비할 때 단지 옷만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지요. 쿠바 음악에 빠져 있을 때는 마치 파도가 눈앞에 펼쳐지는 하바나 해안가에 자리한 어느 카페 같은 분위기를 무대로 연출한 적도 있어요. 자전거도 놓고, 강아지도 데려오고, 시가 피우는 외국인도 앉히고.

Q 와우! 패션쇼라기보다 한 편의 연극 같은데요?
<달에 취한 피에로>도 보면 재미있을 거예요. 이게 초대장 겸 팸플릿인데, 진공포장을 뜯으면 코 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오죠. 이걸 코에 끼우고 쇼를 보는 사람도 있었고요. 무대에서는 아코디언 연주자와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하고, 저글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빨강・노랑 색칠한 탁구공을 바닥에 뿌렸어요. 또 재즈 뮤지션 신광웅 씨를 초청해 파티 같은 쇼를 한 적도 있죠. 배우 강부자 씨가 출연하고, 가수 이은미 씨가 노래 부르는 가운데 드레스를 입은 모델들이 마치 파티장 가는 것처럼 캣워크를 걷는 거죠. 이런 식의 연극 같은 쇼를 좀 많이 하는 편이었어요.

Q 이번 출품작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네. 패션지 <보그>와 ‘패션 인 투 아트’라는 기획으로 전시했던 작품이에요. 디자이너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한 명 택해서 협업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저는 이용백 작가와 함께 했지요. 꽃에 가려진 군인들을 담은 영상 작품인 ‘Angel Soldier’ 아래에 수족관을 설치해 드레스를 넣었어요. 전쟁으로 인해 ‘깨져버린 결혼의 꿈’을 형상화한 작품이죠. 천장에는 이를 치유하듯 링거를 설치했고요.

(위) , 2016. 묵묵히 걸어온 패션 인생을 함께해온 물건을 한데 모은 작품. 가위, 재봉틀, 단추 등을 광목으로 감싸 하나의 설치 미술로 완성했다. (아래) , 1994. 자연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존재 중 하나인 이끼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끼에 맺힌 영롱한 이슬 위로 햇빛이 비치며 반짝이는 느낌을 표현했다. 
Q 그야말로 패션을 넘어 설치 예술이네요. 워낙 예술을 좋아하시나요?
제가 원래 순수 미술 화가가 꿈이었어요. 너무 바쁘게 살아와서 잊고 있었는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더군요.

Q 미술가가 아닌 패션 디자이너가 되신 계기는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웠어요. 그렇게도 미술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결국 진학을 포기해야 했죠. 그리고 어떤 것을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하니 옷 만드는 걸 배워보자는 마음으로 오리엔탈 양재학원을 다녔어요. 그런데 너무 재미있고 적성에 맞더라고요. 그림이나 다른 미술 작업을 접목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솔직히 마흔 살까지만 옷 만들고 그 이후론 아트 작업을 할 계획이었는데, 너무 사업이 잘돼서 놓지 못하고 지금까지 온 거예요. 하하.

Q 패션 비즈니스는 예술성과 상업성의 줄타기일 텐데, 그 균형을 잘 맞추신 것 아닐까요?
그 부분에서 행운이 따랐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내 디자인을 유니크하다며 좋아했지요. 일상과 차별화한 것에 많이 매료당하더라고요. 뭔가 조금 다르게 보이면서도, 또 제가 생각하는 제 옷의 장점은 입었을 때 편안하고 자연스럽다는 거죠. 옷이 단지 옷이라기보다 개성을 보여줄 수 있도록 독특함을 가미해야 한다는 게 저의 고집스러운 원칙 중 하나예요.

, 1995. 투명 아크릴 위에 와인 잔을 낚싯줄로 엮어 세상에 하나뿐인 드레스를 만들었다. 걸을 때마다 유리가 부딪치며 영롱한 빛과 소리를 낸다. 
Q 1970~1990년대 이화여자대학교 앞 선생님의 부티크 이따리아나는 워낙 상징적인 곳이었다죠?
그 당시 나한테 와서 웨딩드레스 맞춘 학생들이 지금까지 나를 찾아주곤 해요. “옷장을 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딸리아나 하나만 있다”고 해주는 말을 들을 때 행복하고, 감사하지요.

Q 이번 전시에서 관객이 이것만큼은 꼭 느꼈으면 하고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요?
패션 디자이너를 옷 생산 이상의 창의력을 지닌 예술가로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평생 노력해온 작업이지요. ‘패션 디자이너는 옷만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를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저만의 세계를 구축해왔어요.

Q 50여 년간 한길을 걸어온 비결이 궁금합니다.
별다른 건 없어요. 그저 좋아하는 일을 미친 듯이 하다 보니까 그 안에서 희열, 만족 같은 행복감을 느끼는 거죠. 어떤 디자이너로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사위는 나더러 ‘장인’이라고 하는데, 나는 “옷쟁이야!”라고 답하곤 하죠. 끝까지 옷쟁이질을 열심히 하고 싶어요!



작품 사진 제공 HANEZA

글 강옥진 기자 사진 이기태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