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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낳은 패션 디자이너 배용 즐겁게 일하니까 늘 청춘이지요
한국의 패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배용. 그는 부산이 낳은 예술가다. “합리성을 지향하는 서울은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는 뉴욕과 닮았고, 섬세한 감각을 추구하는 부산은 파리의 오트 쿠튀르 문화와 비슷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패션 디자이너 배용의 해운대 부티크는 앞으로도 수십 년간 건재할 철옹성 같다.

부산 해운대 부티크에서 만난 패션 디자이너 배용.

고백하건대 30대 후반인 나는 디자이너 배용이란 이름이 친숙하지는 않다. 하지만 1980~1990년대 월간 <멋>을 애독하며 트렌디한 멋을 좇아 20~30대 청춘을 보낸 세대라면 그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부산 특집을 준비하는 <행복> 팀에 “부산에 간다면 배용 선생님을 만나야지요.” 단번에 추천해준 사람은 우리나라 1세대 패션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그제야 과거 1980~1990년대 여성 잡지를 뒤적여보니, 거의 매달 패션 화보를 장식하는 의상 디자이너의 이름에 디자이너 배용이 있었다.

1 패션 잡지 <보그>가 주최한 <한국 패션 100년> 전시에 출품한 배용 디자이너의 작품들. 서구적 보디라인을 강조한 비즈 장식 리틀 블랙 드레스는 고객의 소장품을 빌린 것. 2 실크, 비즈, 스팽글을 다루는 그의 탁월한 솜씨를 볼 수 있는 이브닝드레스. 
“당시에는 내부에 화보 팀이 따로 있을 정도였어요. 한 달에 잡지 두세 개를 찍는데, 그 작품마다 다른 스타일을 선보여야 했기 때문이죠. 적어도 6~12페이지 정도를 진행하고 더 멋진 장소에서 찍기 위해 해외 촬영도 참 많이 다녔어요.” 디자이너 배용 역시 가장 뜨거운 청춘을 보낸 그때를 미소 지으며 회상했다.

(왼쪽) 1981년 문화홍보부의 지원으로 파리에서 패션쇼를 연 것을 시작으로 매년 해외에서 쇼를 선보였다. (오른쪽) 직접 일러스트를 그려 넣은 1978년 패션쇼 초대장. 
“맨 처음 해외에서 쇼를 연 것은 1981년도 파리 프레타 포르테입니다. 그때는 저 개인적으로 한 일이 아니고 문화홍보부가 한국의 외교, 홍보 차원에서 지원한 거지요. 몇 년 후에는 뉴욕으로 직접 진출했습니다. 파리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요령이 생기다 보니 왜 해외로 진출하고 뭘 해야 하는지 깨달은 거죠. 그래서 1985년에는 한국패션협회를 창립했어요. 당시 디자이너 이용렬 씨가 회장을 하고 저를 비롯해 세 사람이 부회장을 맡았죠.” 그가 언급한 한국패션협회는 바로 오늘날 서울을 세계적 패션 도시로 성장시킨 원동력, 서울패션위크의 모태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패션도 삶의 중요한 요소라고 인식 하지만, 그때만 해도 사치나 허영의 영역으로 오해와 천대가 공존하던 척박한 시절이란다. 그런데 이 고릿적 얘기 같은 이야기가 고작 30여 년 전 일이라니 얼마나 한국의 패션 산업이 숨 가쁘게 진화해왔는지! 

“<주간 경향> <선데이 서울> 같은 주간지에서나 가끔 패션 기사가 나왔어요. 당시엔 전문 모델도 드물어서 주로 배우들과 화보 작업을 했지요. 1984년에 최초의 패션 전문 잡지 월간 <멋>이 창간하고, 1990년이 지나서야 <엘르> <보그> 등 해외 라이선스 패션 잡지가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비로소 한국에서 패션 산업이 박차를 가하며 꽃피웠지만, 동시에 홍보 마케팅 팀을 조직적으로 갖춘 해외 패션 대기업이 한국에 진출하면서 상대적으로 국내 디자이너가 점차 소외받은 건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부티크를 운영하고, 한국의 패션 발전을 위해 협회 일도 앞장서던 배용은 13년 전부터 해운대 부티크만 남긴 채 다른 일은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숨 고르기’ 였으리라. “어느 순간 조금씩 회의가 들었어요. 외부 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 내 본업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디자이너로서 이제 창작 활동에만 전념하자고 결심하고 다른 활동을 접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예술가로 돌아와 고향인 부산에서 디자이너의 삶을 살아온 디자이너 배용.

1980년대관에서는 그의 전매특허인 패치워크 코트 두 벌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의 대중적 활동이 그리웠던 이라면 반가운 행사가 있었다. 최근 서울역에서 열린 <한국 패션 100년> 전시에서 그의 의상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그가 출품한 작품은 그의 시그너처 작업인 패치워크 코트 두 벌과 비딩 드레스 두 벌. 전시 오프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다녀간 디자이너 배용을 그다음 날 부산 해운대 부티크에서 만났다.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 맞은편에 자리한 배용 부티크. 1996년 이후 20여 년간 이 자리를 지켜온 랜드마크로, 건물 내 아들이 운영하는 카페도 맛 좋기로 유명하다. 

편안하고 아늑한 배용 부티크 내부. 실제로 한편에 티 테이블을 마련해 고객이 여유 있게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했다. 

디자이너 배용의 부산 해운대 부티크에 들어서면 예술 작품과 의상을 매치해놓은 디스플레이 때문인지 마치 갤러리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Q 1980년대 컬러 패치워크를 선보인 것도 그렇고, 현재 부티크의 의상에서도 다채로운 색상이 인상적입니다. 색을 잘 다루는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단번에 느꼈습니다.
색채학을 따로 공부하기도 했고,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색감에 관심이 많지요. 그런데 패션에서의 색감은 미술적 색감과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로 이론적 색채학을 따르는 사람은 단순하게 단정 짓지만, 패션에서 색은 정말 복합적 의미를 함축하지요.

Q 예를 든다면요?
미술 이론으로 검은색은 분명히 수축색이지만, 색이 무겁기때문에 살찐 사람이 입었을 때 강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브라운 계열을 입는 게 부드러운 이미지를 주는 방법이죠. 흰색의 경우, 무조건 팽창되느냐? 흰색은 가난한 색이기도 합니다. 너무 마른 사람이 입으면 더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러한 색의 느낌은 또 질감에 따라 달라집니다. 빨간색도 소재에 따라 정열적으로 보이거나, 고급스러워 보이거나, 혹은 천박하게 보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입는 사람의 심리, 느낌, 나이, 시대적 감각 등에 따라 항상 유동적인 게 패션의 색채랍니다.

Q 옷을 디자인할 때 또 염두에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입는 사람의 몫을 남겨두는 겁니다. 여백을 남긴다든지, 색을 단색으로 그대로 둔다든지 일부러 디자인을 100% 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액세서리가 있을 테니 그것을 착용할 수 있는 공간까지 고려하는 거지요. 전부 표현하면 기성복이 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저는 기성복을 만들고 있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맞춤복을 입은 듯한 느낌을 주고자 합니다.

Q 수십 년간 함께해온 고객도 많을 텐데, 주로 어떤 분인가요?
처음 1970년대에는 교사나 공무원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는 직업여성이 옷을 제대로 입고 멋을 냈지요.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반대가 됐어요. 오히려 주부들이 멋을 내요. 직장인은 비싼 돈을 주고 옷을 사려 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부는 자기 존재감을 표현하기 위해 제대로 된 옷을 입으려고 하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옷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데 더 적극적으로 투자한다고 생각합니다.

Q 서울 고객과 부산 고객의 차이가 있나요?
차이가 있습니다. 서울 고객은 프레타 포르테 스타일로 대량으로 나와도 질보다 가격을 우선시하며, 합리적이고 트렌드에 민감합니다. 부산 고객은 무엇보다 질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소재와 바느질이 얼마나 우수한지, 아직도 맞춤복 요소를 깐깐하게 봅니다. 특히 부산 토박이의 경우 굉장히 오트 쿠튀르적이지요.

지난 2010년, 40주년을 기념해 진행한 패션쇼 런웨이 모습. 
Q 지금도 매년 쇼를 진행한다고 들었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연말이면 늘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3백50여 명 정도 초대해 쇼를 했는데, 이제는 전형적 컬렉션처럼 모델이 워킹하는 식의 쇼는 지양합니다. 재작년에는 갤러리를 빌려 전시 형식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요. 제가 해외에 갈 때마다 빈티지 다리미를 사 모으는데, 그러한 소장품을 함께 전시했지요. 지금은 이 부티크 3층에서 고객 70여 명만 초대해 살롱 쇼를 하고 있습니다

Q 일반적으로 은퇴할 나이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죠.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것이 재미있고 성취감도 있어요. 또 한 번도 쉬어본 적 없이 해온 일이기 때문인지 다른 생각은 전혀 안 들어요. 숙명이죠.

Q 디자이너로서, 지금의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하는 아쉬움은 없나요?
전혀! 요즘 태어났다면 이렇게 못 되었을 거예요. 하하. 진로 상담을 원하는 학생이 많이 오는데, 저는 “너무 디자이너만 되겠다고 집착하지 마라”고 이야기해줘요. 지금은 유학파도 많고 실력 있는 경쟁자가 너무 많아요. 대한민국패션경진대회에 매년 심사 위원으로 참석했지만, 살아남은 친구들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해줄 수가 없는 현실이 안타깝죠. 그렇게 더 열악해진 상황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누군가가 세계적 디자이너로 성장해 선배들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는 날이 오겠지요?

Q 어떤 디자이너로 기억되길 바라나요?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보다, 나 자신이 떳떳하게 살아왔는가를 더 생각합니다. 옷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질문할 때 “내 전부를 바쳤어”라고 답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늘 즐겁게!



글 강옥진 기자 사진 이기태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