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점, 점, 점 이어진 실이 있다. 실은 한 겹 한 겹 쌓이고 얽혀 한 필의 면이 된다. 그 면은 바느질이란 행위를 통해 ‘몸’이라는 결코 표준화될 수 없고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신체에 걸맞은 입체인 ‘의복’이 만들어진다. 기하학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점, 선, 면(평면) 그리고 입체’까지의 조형적 단계가 모두 규방 공예인 길쌈과 침선에 담겨 있는 셈이다. 2016우란기획전은 규방 공예로 대표되는 직물, 옷감을 다루는 의依 문화에 집중하며 ‘규방’ 문화의 현재적 가치를 조명한다.
삼베, 명주, 목화 등 날것의 자연 소재가 사람 손을 거쳐 일상생활에서 활용 가능한 용품이 되는 규방공예. 전시 공간 ‘프로젝트 박스 시야’의 특성을 십분 살려 블랙 박스와 조명을 활용한 설치 방법으로 개별 전시품이 더욱 집중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1, 2 정희승 작가의 사진 작업. 3 삼이 실이 되는 과정, 삼베 실타래는 보성삼베랑 작품. 4 방정순 여사의 천연 염색 실과 자수, 그리고 여사가 직접 키운 누에고치.
먼저 인간 생활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의복은 실용적 측면뿐 아니라 출생부터 죽음까지 삶의 여정을 반영한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입히는 배냇저고리는 그 고름을 길게 하여 아이의 장수를 기원하고, 말년의 수의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일종의 의식으로 죽음을 상징한다. 특히 자수의 경우 장식성과 더불어 치성致誠과 염원의 가치를 더하는데 부귀, 장수, 길상을 상징하는 모란, 연꽃, 불로초, 석류, 봉황, 학 문양의 도안을 주로 쓴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선’인 곡선으로 대표되는 규방 공예의 조형미는 보통 한복의 배래, 버선코, 한옥 처마 단 등 한국미와 손맛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실과 실을 느슨히 부여잡은 모습은 자연이 만든 ‘현수선’과 꼭 닮아 있으니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자연의 질서인 그 곡선을 우리는 입고, 지닌 것이다. 조형적 특성은 침선, 즉 바느질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누비를 보면 일정한 땀이 장식이 되고 기능이 되어, 옷이 지니고 있는 기능성을 더욱 배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의 적삼에서 기인한 누비는 남은 천을 잇고 덧대어 옷감을 강고하게 한 기능과 반복적이면서도 집중해야 하는 바느질이라는 행위가 지닌 수행적 특성을 두루 보여준다.
명하햇골의 천연 염색 과정.
이번 전시는 방정순(전통 고창 자수 전수자), 심영미(매듭 기능 전승자), 이귀숙 (전통 누비 이수자), 보성삼베랑(麻狂 이찬식 대표), 나주 사회적 기업 ㈜명하햇골 (최경자 대표), 경기도 양주 무명마을 메루지 등 공예 장인과 권두영(미디어 아트), 박승순(사운드), 윤지원(영상), 정희승(사진), 힐긋(공간) 등의 시각예술가가 참여한다(상주 함창명주박물관,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협력). 곡선과 직선, 평면과 입체라는 조형성이 공존하면서도 교차하고 기능과 정성, 일상과 수행을 넘나드는 규방 공예의 예술적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전통 장인의 작업 과정과 결과물을 현대 시각예술가의 영상과 사진, 사운드 작업과 협업해 재해석했다.
전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우란문화재단 내 공연장인 프로젝트 박스 시야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공간 특성상 벽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없기에, 공간 중앙에 ‘규방’의 공간성을 상징하는 구조물을 구성. 긴 직사각형 공간의 지루함을 상쇄하고자 전체 축을 사선으로 틀어 전시 동선에 따라 디스플레이한 전시품과 중앙의 구조물이 중첩되는 다양한 풍경을 제공할 예정이다. 선이 강조된 프레임을 이용해 최소한의 ‘집’이란 정보를 주어 관람객은 선에서 면을, 혹은 공간을 연상할 수 있다. 전시는 9월 21일부터 10월 22일까지.
Interview 우란문화재단 장윤주 큐레이터
공예, 입고 먹고 쓰는 것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
과거 여성들이 실잣기, 길쌈, 침선 등 가정 경제, 즉 치산治産 활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온 모습을 통해 규방 공예가 지닌 생산성은 물론 전통 공예의 미감과 조형성, 생활 방식, 정성의 가치를 묻는 전시 ‘펼치고(平) 짓는(立) 규방’. 설치 작업에 한창인 장윤주 큐레이터에게 자세한 전시 정보를 물었다.
Q 전시 참여자를 보면 공예인과 협력 작가로 구분되어 있다. 실잣기, 길쌈 등 전통 방식을 사진, 영상, 사운드 등 첨단 방식으로 구현한 것이 낯설면서도 인상적이다.
공예품은 애초에 쓰고 활용하기 위함이지 전시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이러한 공예품을 잘, 혹은 새롭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는 환기의 작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손맛과 정성, 온기를 가장 잘 전하는 방식은 일상속 체험이다. 이러한 체험과 경험을 전시장에서 할 수 있도록 사진, 영상, 사운드의 장르를 결합한 것이다.
Q 구병준, 김지연, 이정혜 대표 등 협력기획자를 찾는 리서치부터 전시의 시작이라고 할 만큼 협업이 중요했다고 들었다.
구병준 협력기획자는 디자인 및 공예를 소개하는 다양한 활동과 더불어 한국의 마지막 소규모 공장들과 협력해 그들이 지속적으로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상품을 개발하고 유통하는 프로젝트를 해왔다. 김지연 협력 기획자는 공예 장인들의 공예품을 소개하는 다수의 전시를 기획한 바 있다. 공예품을 단순히 시각적으로 디스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공예품의 정수를 보여주는 다양한 시도, 즉 촉감과 소리 등의 감각을 공예 전시에 적용했는데, ‘공예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고자 하는 취지와 맞닿아 있었다. 소생공단 이정혜 대표의 경우 규방 공예 분야 공예인을 소개하고, 공예인과 협력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했다. 협력기획자 모두 길쌈 및 자수, 누비 장인들 리서치를 위한 지방 답사부터 협력 작가 신작 제작까지 많은 부분을 함께 진행했다.
Q 우리나라 공예와 디자인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
최근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는 젊은 디자인 혹은 공예가들 중심으로 수공예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꼭 전문인이 아니더라도 취미 활동으로도 늘어가고 있는 추세인데, 위빙weaving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길쌈에 대한 관심은 그렇지 않다. 전통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디자이너, 공예가들의 관심이 더욱 적극적으로, 더욱 높아지길 바란다.
Q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는?
보성삼베랑에서 전시를 위해 삼베 두 필을 구입할 때의 에피소드가 있다. 전시 설치 일정상 전시품인 삼베를 하루라도 빨리 운송하고 싶은 욕심에 당장 서울로 가져가겠다고 어른신께 독촉했더니, “곱게 키운 자식이니, 단장해서 내보내야 한다”며, 며칠 시간을 달라고 말씀하셨다. 한 올 한 올 쌓아 올려 만든 삼베 한 필을 대하는 태도가 나부터 달라져야 함을 느꼈다. 전통은 촌스럽고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입는 것, 먹는 것, 쓰는 것을 소중하게 대하는 태도로 생활하는 것이 바로 요즘 사람들이 원하는 ‘가치 있는 삶’, 웰빙을 행할 수 있는 방법 아닐까.
우란문화재단은…
‘창의적 인재들의 역량을 키우고,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단체’를 설립하고자 했던 故 우란雨蘭 박계희 여사(워커힐 미술관 설립자)의 뜻을 이어받아 ‘문화 인재 육성과 문화 콘텐츠 개발 및 확장 지원을 통해 건강한 문화 예술 토양 확립’을 목적으로 2014년에 설립했다. 2015년 <나누는 상, 담는 그릇> 전시를 시작으로 우란기획전을 선보였으며, 2016년 밀라노 국제 전람회 한국 공예 전시를 후원했다.
전시 문의 우란문화재단(070-7606-6688)
- 2016 우란기획전 <평립 平立, 규방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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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첫 전시 <나누는 상, 담는 그릇>을 통해 우리 고유의 식문화를 소개한 우란문화재단이 두 번째 기획전으로 규방 문화의 현재 가치를 묻는 전시 <평립平立 ; 규방의 발견>을 개최한다. 공예품뿐 아니라 ‘만들기’와 ‘만드는 사람’ 그리고 ‘만드는 과정’을 대하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 수공예의 의미와 노동의 가치를 되새겨볼 수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