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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성고등학교 25기 동창 네 명의 B급 감성, A급 인생
개그맨 이경규,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 풍월당 박종호 대표, 일맥문화재단 최성우 이사장.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구축한 네 명의 50대 남성이 근 40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부산 동성고등학교 동기 동창인 이들은 “네가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왁자하게 웃었다.

(왼쪽부터) 일맥문화재단 최성우 이사장, 개그맨 이경규 씨,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 풍월당 박종호 대표.

청와대 앞길, 지어진 지 80년 된 보안여관을 전시와 공연이 열리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 일맥문화재단 최성우 이사장은 본인을 ‘여관 주인’이라 칭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은 ‘학원 주인’이고, 풍월당 박종호 대표는 ‘음반 가게 주인’이다. 이경규 씨는? 그야 개그맨이지. 넷은 부산 동성고등학교 25기 동창이다. “경규와는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고, 5년 전쯤 한 동창에게 주은이가 엄청나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강의를 정말 끝내주게 하더군요. 종호도 근사한 공간을 운영하고 있었고요. 그렇게 연락하고 다시 만나게 되었죠.” 

최 이사장과 손회장, 이경규 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주은이랑은 짝이었어요. 늘 옆자리에 앉았죠.” “아니다, 그때 우린 온 순서대로 앉았지.” ‘손사탐’으로 불리던 스타 강사 출신으로 온라인 교육 기업 메가스터디를 창립한 손주은 회장은 40년 전의 일을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럼 우린 늘 맨 뒷자리에 같이 앉았으니까, 만날 지각했다는 이야기가 되나?(웃음) 공부 잘했던 주은이와 달리 경규와 난 조례가 끝나면 분위기 흐리지 말라고 다른 반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죠. 그래도 점심시간과 종례 시간엔 꼭 원래 자리로 복귀했어요.” 개그맨 이경규 씨가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로 최 이사장의 말을 받는다. “가라니까 간 거죠, 뭐. 수업 시간 끝나면 친구들 보고 싶어서 다시 왔고.” 한국 유일의 클래식 음반전문점 풍월당을 운영하며 오페라와 클래식 음악 관련한 글쓰기와 강연을 겸하는 박종호 대표는 이과생이라 셋과 반이 달랐다. 고등학교 동기 동창 네 명의 40년 만의 만남은 풍월당에서 이루어졌다. 매장을 두리번거리다 박대표에게 “여긴 클래식만 있나?”라고 어색하게 묻는 이경규 씨에게 손주은 회장이 핀잔을 주듯 말한다. “니는 검색도 안 하고 왔나?” 왁자한 웃음과 함께 잠시 어색했던 분위기가 일순 날아간다.



“고2 때 처음으로 꿈이 생겼습니다. 목사가 되는 것이었지요. 겨울방학 내내 부흥회를 다녔습니다. 그냥 가서 기도만 드린 건 아니었어요. 예배 전에 사람들 앞에서 찬송가 부르고 분위기 띄우는 일을 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찬송가 부르고 이야기하고 있으면 황홀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요즘 1만 5천 명 앞에서 강연할 때 느끼는 바로 그 기분이지요. 공부보다 그게 훨씬 재미있었죠.”_ 손주은

B급 학교의 낭만
이들의 모교, 부산 동성고등학교는 공부 못하기로 악명 자자한 학교였다. 박종호 대표가 대뜸 ‘똥통학교’라고 말할 정도. 손주은 회장이 교육 전문가답게 “우린 평준화 3기라 그전과는 달랐다”고 선을 긋지만, 학생은 몰라도 선생은 지독하게 못 가르쳤다는 말엔 고개를 끄덕인다. 최성우 이사장이 말을 보탠다. “간혹 동성고 동창을 만나면 공유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거칠지만 솔직하고, 그 속에 따뜻한 구석도 있지요. 우리 넷을 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분야는 다르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서로 공유하는 감성이 있어요. B급 감성이랄까요?” “일본에 ‘B급 고메gourmet’라고 해서 저렴하고 맛있는 서민음식이 한창 유행했습니다. 그런 정서가 있지요. 같은 부산 출신이라도 명문이던 부산고, 경남고 출신과는 다를 겁니다.” 박종호 대표의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별난 구석이 있는 학교였습니다. 학기 초에 선생님이 ‘우리는 한 번도 명문대에 학생을 넣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공부는 니들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지요. 수업 시간에 성적 안 좋은 학생을 한 반에 몰아 넣은 것도 성적을 내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겁니다. 교사 대부분이 지독하게 못 가르쳤습니다. 수학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애들은 수업 안 들어도 된다’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였지요.”

명문이 아닌 학교에서 이들은 패배감에 빠지는 대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신명나게 놀았다. 손주은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성공한 친구의 공통점이 있다. 야간자습이 행복했던 아이들과 야간 자습이 지겨워 미친 아이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 후자는 경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수업 끝나자마자 아이들 끌고 담 너머 중국집 가서 빼갈 한잔 하던 친구가 경규였지요. 그래도 종례하기 전엔 꼭 들어왔지만요.” 이경규 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놀았습니다. 힘이 넘치던 시절이었지요. 이불 가져와서 저녁때 밖에서 놀고, 종례가 끝나면 학교에서 잤어요. 학교에서 허락했거든요. 교실 바닥이었지만, 집에 안 들어가도 되니 좋았죠.” 박종호 대표는 응원단장 이경규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학교에 배구팀이 있었는데 노상 지는 게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응원은 재미있었어요. 경규가 응원단장이었으니까요. 여성부 시합을 할 때도 달리 할 일이 없던 우리는 남아서 응원을 했습니다. 경규는 강팀이던 경남여고나 남성여고 대신 우리처럼 만날 지기만 하던 한일여상 배구팀을 늘 응원했어요. 당시 서수남ㆍ하청일 씨가 광고하던 한일자동펌프 CM송을 소리 높여 부르면서 말이죠.(웃음) ‘소외된 자, 약자를 위하다니 정말 훌륭하지 않은가!’ 그때 생각했죠.” 이경규 씨는 친구들 이야기에 겸연쩍어하긴커녕, 감상하듯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천천히 아래위로 끄덕인다. TV를 통해 익숙한 바로 그 모습. 응원단장 이경규를 높이 평가했지만, 박종호 대표는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학교가 지독하게 싫었던 그의 낙은 오직 음악이었다.

“음악 선생님이 피아노를 전혀 못 쳤습니다. 음악 시간에 반주자로 피아노를 치던 내게 연습할 수 있도록 음악실 열쇠를 빌려줬죠. 거기 전축이 있었는데, 시간만 나면 음악 틀어놓고 음악실 긴 의자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면 밖에서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거기 있던 시간 말고는 학교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때도 공연 보느라 바빴지요. 주말엔 공부한다고 말하고 서울로 공연 보러 가곤 했습니다. 아침에 출발해서 4시쯤 서울역에 도착하면 대학로에서 연극 한 편 보고, 세종문화회관 가서 공연 보고, 밤차 타고 내려왔지요. 역전 아리랑호텔에 투숙객인 양 들어가 로비 화장실에서 씻고 등교했습니다.”



“ 서울 출신이 부럽진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바다 너머가 궁금했지요. 항구를 떠나는 배를 보며 그 배가 향하는 곳이 늘 궁금했습니다. 배에 적힌 마르세유, 함부르크 등 먼 나라의 도시를 동경했어요. 어릴 적 부산이 아닌 서울에 살았다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이렇게 강하지 않았겠지요.”_ 박종호

손주은 회장의 학창 시절 역시 남다르다. “사실 여기 있는 친구들도 잘 모르는 이야기일 겁니다. 고2 때 처음으로 꿈이 생겼습니다. 목사가 되는 것이었지요. 겨울방학 내내 부흥회를 다녔습니다. 그냥 가서 기도만 드린 건 아니었어요. 예배 전에 사람들 앞에서 찬송가 부르고 분위기 띄우는 일을 했습니다. 물론 고등학생이 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사정사정해서 겨우 한 번 했더니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나중엔 초청받아 갔을 정도였지요. 사람들 앞에서 찬송가 부르고 이야기하고 있으면 황홀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요즘 1만 5천 명 앞에서 강연할 때 느끼는 바로 그 기분이지요. 공부보다 그게 훨씬 재미있었어요. 고3이 되어선 이러다 대학 못 가겠다 싶어 예비고사 전 6개월 동안 새벽 4시까지 공부하고 하숙집가서 두어 시간 자고 등교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도 주말엔 철야 기도를 했지요. 전국학생연합회를 조직해서 행사한답시고 학교를 며칠 빠지겠다고 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선뜻 허락한 일도 있었습니다.

저희가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을 참 잘 만났어요. 경규와 성우도 그분이 담임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신나게 놀지 못했을 거예요.” 최성우 이사장은 그때 어찌나 즐겁게 놀았는지 고등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가도 더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말한다. “멋도 엄청 부렸습니다. 남포동 양장점 가서 체크무늬 셔츠와 바지를 아래위로 맞춰 입기도 했죠. 경규는 거기에 흰색 칼 구두까지 신었고요.(웃음)” “하루는 흰 구두를 신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못 신게 하더군요. 이틀 동안 그냥 맨발로 다녔습니다. 버스도 맨발로 탔어요.” 그런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이경규 씨는 그저 즐거웠다.



“ 부산은 놀기엔 정말 끝내주는 도시였습니다. 광안리 백사장에 교복 묻어두고 팬티 바람으로 바다에 들어가 수영 한참 한 뒤에 툭툭 털고 집으로 가곤 했지요. 동시 상영하는 극장도 많았고요. 초량동에 살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 주부터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갈 계획이에요.”_ 이경규

국제도시의 넘치는 에너지
“넘치는 젊은 에너지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출한 거였지요. 이렇게 네 명이 모이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공통의 정서를 확인하고 싶었어요. 우리 모두 명문은 아니었지만 자유로웠던 B급 학교에서 체득한 B급의 건강한 에너지를 자양분 삼아 잘 승화해 직업으로 연결시켰어요. 경규는 국민 모두가 아는 스타인데도 대중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요. 개그맨이지만 정작 하고 싶은 건 영화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손주은 회장은 스타 강사 출신으로 한국 최대 규모의 온라인 교육 기업 메가스터디를 설립했지만 사교육 무용론을 말하고, 박종호 대표는 풍월당에서 자신의 강연을 듣는 주요 고객인 ‘청담동 사모님’의 잘못된 태도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업계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었고, 지금도 그 정상에 있지만 제 ‘고객’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반골 기질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고등학교 때 우리 데모한 것 생각나나?” 손주은 회장의 말에 모두 무릎을 치며 박장대소한다. “돌 던져서 학교 유리창 다 깨고 그랬지. 그런데 데모를 왜 했더라?” 이경규 씨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이럴 때 답을 아는 건 늘 손주은 회장이다. “이사장 사위가 체육 교사였는데 월권을 했지요. 아침 조회 때 교장 훈시하고 나면 갑자기 단상에 올라 마무리를 꼭 자기가 했어요. 그것도 상스러운 욕을 섞어서 말입니다. 참다 참다 3학년이던 우리가 예비고사 끝난 후 행동에 돌입한 거죠.” 

에둘러 말하지 않고, 거칠지만 따뜻한 속내는 비단 동성고등학교 출신뿐 아니라 부산 사람의 공통된 기질일 것이다. 1970년대 중반, 넘쳐흐르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했던 것 역시 이들만이 아니었다. 부산이라는 도시 전체가 그랬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최 이사장은 당시를 이렇게 정리한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니던 때가 부산이 한창 성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산업이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바뀌는 단계였고, 그 중심에 부산이 있었습니다. 활력이 넘쳤고, 당시 앞서 있던 일본 문물도 가장 빨리 들어왔어요. 부산은 그야말로 국제도시였습니다.” 이경규 씨는 역시 노는 이야기다. “놀기엔 정말 끝내주는 도시였습니다. 광안리 백사장에 교복 묻어두고 팬티 바람으로 바다에 들어가 수영 한참 한 뒤에 툭툭 털고 집으로 가곤 했지요. 동시 상영하는 극장도 많았고요. 초량동에 살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 주부터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갈 계획이에요.” 하지만 연기를 공부하던 대학 시절엔 부산 출신이라는 게 죽도록 싫었다. 사투리 때문이었다. “진지한 장면에서 내가 입만 열면 관객들이 웃었습니다. 대학 4년간 매일 신문을 소리 내 읽으며 죽을힘을 다해 간신히 사투리를 고쳤는데, 군대를 경남 창원으로 갔어요. 말짱 도루묵이 된 거죠.” 손주은 회장은 그때 이경규 씨를 다시 만났다.

“같은 부대에 있었어요. 어찌나 반갑던지! 하지만 경규의 말과 달리 저는 부산 사투리 덕을 많이 봤습니다. 강세를 문장 앞에 두는 억양 덕에 청중이 집중하기에 좋습니다. 경규도 아마 덕을 본 부분이 있을걸? 종호 너도 강연할 때 그렇지 않나?” 박종호 대표는 쉽게 긍정하지 않는다. “나는 사투리 별로 안 쓰는데.(웃음) 부산에선 공연이 잘 열리지 않았으니 그건 아쉬웠지만, 서울 출신이 부럽진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바다 너머가 궁금했지요. 항구를 떠나는 배를 보며 그 배가 향하는 먼 나라가 늘 궁금했습니다. 배에 적힌 마르세유, 함부르크 등의 도시를 동경했어요. 서울에 살았다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이렇게 강하지 않았겠지요. 뱃사람들이 보수동 헌책방에 버리다시피 팔고 간 외국 잡지를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부산엔 뱃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초량동엔 세 집 건너 한 집 정도는 뱃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없는 집의 어머니는 춤추러 나갔고, 집집마다 사연이 참 많았지요.”



“ 우리가 고등학교 다니던 때가 부산이 한창 성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산업이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바뀌는 단계였고, 그 중심에 부산이 있었지요. 활력이 넘쳤고, 당시 앞서 있던 일본 문물도 가장 빨리 들어왔어요. 부산은 그야말로 국제도시였습니다.그런 부산이 내게 준 게 있다면 잡탕찌개 같은 하류 B급 문화의 감성입니다.”_ 최성우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이들의 행복
B급 감성으로 A급 인생을 사는 50대 중반의 네 남자. 이들 인생에서 지금은 어떤 시기일까? 최성우 이사장은 노화에 대해 생각하고 변화하지 않는 가치를 지키려 한다. 손주은 회장에겐 인생을 다시 점검하는 시기. “젊은 세대를 가르치며 돈을 벌었으니,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습니다. 청년 창업을 지원하는 공익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박종호 대표 역시 다음을 생각한다.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강의할 수 있을까요? 전체를 조망하는 시각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 싶습니다. 풍월당도 큰 전환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경규 씨는 10년 후에 지금보다 훨씬 더 웃길 수 있을 것 같다. “많은걸 내려놓을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은 성적인 농담을 잘 못하지만 그때가 되면 정말 거침없이 웃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엔 105세 노인이 오래 사는 법에 대한 강연을 합니다. 그 자신이 콘텐츠가 되는 거지요.” “경규 같은 개그맨이 현장에서 오래 살아남는 것 자체가 큰 사회적 공헌입니다.”

박종호 대표의 칭찬에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이경규 씨. “처음 방송국 들어갈 때 내가 성공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요. ‘지금 하는 코미디를 싹 다 없애고 새로운 걸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처음엔 잘 안 됐지만요.(웃음)” 각자 생각하는 ‘행복’에 대해 묻자 이들의 반골 성향이 다시금 고개를 든다. 박종호 대표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고, 손주은 회장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을 행복으로 놓는 건 너무 쉬운 결론이란다. 최성우 이사장은 누군가에게 행복은 다른 누군가에게 불행일 수 있지 않느냐고 되묻고, 이경규 씨는 먹고사느라 행복 같은 걸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고 답한다.

지난 40년 세월 이야기를 나누기에 세 시간 남짓한 인터뷰는 턱없이 부족했다. 저녁 식사할 곳을 상의하던 그들, 풍월당 스태프 중 누군가 요즘 ‘핫’하다는 모던 한정식을 내는 레스토랑을 제안하자 이경규 씨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린다. “거기 야금야금 나오는 데 아냐?” 손주은 회장도 질색한다. “그걸로 밥이 되겠어? 김치찌개나 먹으러 가자고.” 개개인이라면 모르겠지만, 함께 모인 이들에겐 그쪽이 더 어울려 보였다. 오랜만의 만남이지만 금세 10대 시절로 돌아간 네 친구.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며 근황을 주고받는 이들의 웃음소리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50대 중반, 네 남자의 고단한 서울살이가 간데없다. 풍월당의 시작부터 박종호 대표와 함께 일한 최성은 실장은 박 대표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을 처음 보았다고 말한다. 행복이란 빤한 말엔 손사래를 쳤지만, 간만에 웃고 떠드는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메이크업과 헤어 노은영 장소 협조 풍월당

 

글 정규영 기자 사진 한상무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