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다이내믹함도 좋지만 가끔은 지역 도시나 시골의 한적함이 그리울 때가 있다. 다른 대륙으로 떠나기엔 시간도, 비용도, 심정도 부담스러울 때 나는 일본을 즐겨 찾는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 가도 내가 원하는 여행 조건을 대부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일본 곳곳을 가보았지만 도쿄 남서쪽에 자리 잡은 시즈 오카현은 이번이 초행. 시즈오카 현은 일본 혼슈 중앙부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곳으로, 풍광 좋은 후지 산과 일본 녹차의 50% 이상을 생산하는 녹차 산지로 유명하다. 도착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말차 젤라토로 이름난 ‘나나야’ 후지에다 본점이다. 말차의 함량에 따라 7단계로 나뉘는데, 가장 잘 팔린다는 7단계를 맛보았다. 쌉싸름하면서도 쓰지는 않고 뒷맛이 깔끔한 느낌. 이전까지 내가 먹은 건 진정한 녹차 아이스크림이 아니었다!
시즈오카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식재료는 바로 와사비, 즉 고추냉이다. 알싸한 풍미로 스시나 사시미와 환상의 궁합을 이루어 일본 음식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향신료다. 시즈오카 현의 이즈伊豆 반도가 바로 세계적 고추냉이 산지. 고추냉이는 깊은 산 속 그늘 아래 흐르는 맑은 물에서만 재배되는 예민한 채소인데, 이즈는 해안가를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이 산지일 만큼 자연환경이 1등급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즐겨 먹었다는 고추냉이의 매력을 세계 최고 산지에서 느껴보고 싶다면 시즈오카 시에 작년 11월 오픈한 ‘와사비노 헤소’를 방문할 것. 고추냉이 농장을 소유한 브랜드 다마루야에서 직영하는 레스토랑으로, 신선한 고추냉이를 활용한 창작 요리와 시즈오카산 유기농 채소와 해산물 요리를 맛볼 수 있다. 고추냉이는 잎부터 줄기, 꽃, 뿌리까지 버릴 것이 없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굵은 땅속줄기. 와사비노 헤소에서는 다양한 부위로 만든 요리는 물론 15~20cm 크기로 다 자란 싱싱한 뿌리를 상어 껍데기로 만든 전용 강판에 직접 갈아 그때그때 요리에 곁들여 먹을 수 있다. 실내 분위기 또한 모던하고 고급스러워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방문하기 힘들 정도로 핫한 식당이다.
1 전통과 명성이 있는 슈젠지 온천마을. 대나무 숲길로 조성한 산책로를 따라 찬찬히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숍과 식당, 여관을 만날 수 있다 . 2, 3 4백20년 역사를 지닌 도로로 전문점. 참마를 갈아 육수에 섞은 뒤 보리밥에 부어 먹는다
‘도로로’는 이번 여행에서 처음 경험한 맛이다. 마를 갈아 육수에 섞은 후 따끈한 보리밥에 부어 먹는 음식인데, 시즈오카에는 도로로 식당이 여럿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은 1596년 창업해 4백20년 동안 명성을 이어온 ‘조지야’로,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풍경 판화 ‘도카이도 53 풍경’에도 등장하는 유서 깊은 식당. 도쿄에서 교토로 가는 먼 길, 나그네가 도로로 한 그릇으로 피로를 풀고 쉬어 가던 주막 같은 집이었다. 지금의 주인은 14대째. 건물이 들어선 것도 3백50년 전, 에도시대의 생활상을 느낄 수 있는 푸근한 공간이다. 참마는 인근 스무 군데 농가에서 재배한 것을 받아서 사용하며, 가쓰오를 기본으로 육수를 내고, 미소시루를 끓여 함께 낸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한 입 들이마신 뒤 꼭꼭 씹으면 깔끔하고 고소하다. 두고두고 생각날 매력적인 맛이다.
문화적 볼거리에는 큰 기대감이 없던 이번 여행에서 방문한 ‘클레마티스노 오카’라는 복합 문화 시설은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듯 흥분을 안겨준 공간. 꽃, 미술관, 음식을 테마로 2002년 4월에 개장했다. 이탈리아의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의 멋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조각정원미술관을 비롯해 프랑스의 구상화가 베르나르 뷔페 미술관, 이즈 포토 뮤지엄, 이노우에 야스시 문학관이 어우러져 있다. 뷔페 미술관은 오카노 기이치로가 컬렉션한 뷔페의 작품 2천여 점을 소유한, 세계 제일의 뷔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과 교감한 후에는 일식당 테센과 이탤리언 다이닝 프리마베라, 이탤리언 캐주얼 다이닝 차오 차오, 허브티 카페 등에서 식사나 차를 즐겨도 좋겠다.
4 일본 온천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아름답고 다채로운 가이세키 요리를 맛보는 것. 긴류 소라 료칸의 저녁 세팅이다. 5 시즈오카는 세계 최고의 고추냉이 산지. 6 꽃, 미술관, 음식을 테마로 한 복한 문화 시설 클레마티스노 오카
이즈 반도로 향하다 보면 봉우리에 하얀 눈을 얹은 후지 산이 위용을 드러낸다. 후지 산의 자태를 감상하기에 최고 명당은 니혼 다이라 호텔 테라스 라운지인데, 로비에 들어서면 거대한 파노라마 창 너머의 드라마틱한 뷰에 탄성이 자동 발사! 정면에 후지 산을 마주하고 아래로는 스루가 베이가 펼쳐진 절경 앞에서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잊는다. 다음에 오면 모던하고 넓은 객실에서 후지 산을 이불 삼아 반드시 하룻밤을 쉬어 가리라 기약하고, 커피 한잔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시즈오카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건 뭐니 뭐니 해도 이즈의 유서깊은 온천지 슈젠지에서의 시간이다. 4백 년 전통의 료칸 아라이를 비롯해 모던하게 레노베이션한 긴류 소라 등 다양한 가격대와 콘셉트의 전통 여관이 모여 있다. 아늑하게 조성한 대나무 숲길을 따라 동네 한 바퀴 산책한 후 료칸에서 그림 같은 가이 세키 요리를 맛보고, 노천탕에서 온천을 즐기는 하룻밤! 나를 위한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사치는 없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여전히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시즈오카 여행이 리프레시가 된 것은 분명하다. 아쉬움을 남긴 버킷 리스트를 챙겨 들고 조만간 좀 더 여유로운 일정으로 시즈오카를 다시 찾을 것만 같다.
취재 협조 시즈오카 현 서울 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