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혼례도回婚禮圖, 비단에 채색, 37.9×24.8cm,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광연·강정일당 부부, 아내를 스승으로 여기며 살다
청계산 자락에 위치한 강정일당 사당.
진짜 멋있는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외모가 준수하고 잘생기거나 마음이 순순하고 따뜻한 남편? 경제적으로 능력이 대단한 남편일까? 내가 보기에 진짜 멋있는 남편은 자신보다 뛰어난 아내를 만났을 때 그것을 빨리 인정하고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 대표적 사람이 영·정조대의 여성 성리학자인 강정일당의 남편 윤광연이다. 그는 아내를 배려하고 존경하는 차원을 넘어 한평생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며 살았다. 아내 강정일당이 그의 학문이나 서당 일, 일상생활 등 거의 모든 것을 조언해주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윤광연은 아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한 가지라도 잘하는 것이 있으면 기뻐하여 격려하였고, 나에게 한 가지라도 허물이 있으면 걱정하여 문책하였다. 그래서 반드시 나를 중도의 바른 자리에 서게 하며, 천지간에 과오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비록 내가 우둔하여 다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좋은 말과 바른 충고는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겼다. 이 때문에 부부지간에 마치 엄한 스승을 대하듯이 했고, 조심하고 공경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매번 그대와 마주할 때는 신명을 대하는 것과 같았고, 그대와 이야기할 때는 눈이 아찔하였다.”
특히 정일당은 척독尺牘, 즉 짧게 쓴 편지인 일종의 쪽지를 남편에게 수시로 보냈다. 당시는 내외 분별이 엄격한 시대요, 남편이 바깥채에서 서당을 운영했기에 아내 정일당은 자주 척독을 보내 남편에게 조언을 하곤 했다.
“옛날 문중자의 의복은 검소하면서도 깨끗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의복은 검소하나 깨끗하지 않습니다. 검소는 당신의 덕이지만, 더러워졌는데도 빨지 않고 뜯어진 것을 제때에 깁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입니다. 삼가 잿물로 씻고 바느질해놓겠습니다. 낮잠은 기를 혼탁하게 하고 뜻을 해이하게 하며, 말을 많이 하면 원망과 비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술을 과음하면 성품과 덕을 손상시키고, 흡연을 많이 하면 정신을 손상시키고 거만함을 기르게 됩니다. 모두 다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아내 강정일당은 윤광연의 의식주뿐 아니라 낮잠이나 언어, 술, 흡연 등 생활 습관까지 세심하게 뒷바라지했다. 그래서인지 윤광연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가 남긴 글을 모아 문집을 간행했다. 또 주변의 이름난 문사들을 찾아다니며 서문이나 행장, 묘지명, 발문 등을 받음으로써 그 문집의 가치를 더욱 빛내려 했다.
추사 김정희·예안 이씨 부부, 한글 편지로 쓴 절절한 사랑
1829년 11월 26일, 멱남서당. 추사와 죽향의 소문이 아내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추사는 급히 변명하는 편지를 써서 아내에게 보냈다.
“지난번 길을 가던 도중에 보낸 편지는 보셨는지요? 그사이에 인편人便이 있었는데도 편지를 보내지 않으니 부끄러워 아니한 것이옵니까? 나는 마음이 심히 섭섭하옵니다. 그동안 한결같이 생각하며 지냈사오니 계속 편안히 지내시고, 대체로 별일 없고 숙식과 범절을 착실히 하옵소서.”
추사 김정희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 추사가 자신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은 아내에게 섭섭하다고 투정을 부리고, 집 밖에 나와 있어도 한결같이 당신을 생각하고 지냈다면서 아내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또 아내에게 ‘하옵니다’ ‘하옵소서’ 라는 극존칭을 쓰고 있어 놀랍다. 한마디로 추사는 학문이나 예술 분야에선 오만하고 까다로웠을지언정, 부부 사이에서는 대단한 애처가이자 인간적 면모가 물씬 풍기는 남편이었다.
“그사이에 다들 편안히 지내시고 대체로 별고 없으신지요? 어린것도 탈 없이 있는지 염려되옵니다. 여기는 아버님께서 병환이 있어 나도 3일경에 가다가 돌아와 약시중을 들고 있사옵니다. 오늘은 억지로 세수까지 해보려고 하시니 천만 다행이옵니다. 나는 편안하오며 집안일을 잊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선 다른 의심을 하실 듯하오나, 이실李室의 편지는 다 거짓말이오니 곧이듣지 마옵소서. 참말이라고 해도 이제 다 늙은 나이에 그런 일에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추사의 나이 43세 때 죽향과의 소문이 아내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급히 변명하는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다. 죽향은 평양의 기녀로 시를 잘 지었고, 난초와 대나무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양반들은 그녀의 시와 그림에 찬사를 보냈고, 추사도 그런 죽향에게 반하여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생기고 말았는데, 이실李室, 곧 이씨 집안으로 시집간 누이가 그 일을 추사의 아내에게 일러바친 것이었다. 그래서 추사는 아내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 부랴부랴 이런 변명 어린 편지를 써서 보냈다. 혹시라도 의심을 하고 있을지 모르나, 누이의 말은 다 거짓말이니 곧이듣지 말라는 것이다. 잠시 한눈을 팔았다가 아내에게 들켜 전전긍긍하는 여느 남성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평소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해서일까? 추사는 제주 유배 시절에 아내의 죽음 소식을 듣자 이러한 애도 시를 쓰기도 했다.
“누가 월하노인(남녀의 인연을 맺게 해준다는 전설의 노인)께 호소하여/ 내세에는 서로 바꿔 태어나/ 천 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나의 서러운 마음을 그대도 알게 했으면.”
유희춘·송덕봉 부부, 나를 알아주는 친구
<미암일기>는 미암 유희춘이 55세부터 죽기 전까지 약 11년에 걸쳐 쓴 한문 일기다. 1567~1577, 11책, 미암유물전시관 소장.
조선시대 이상적인 부부상은 지우知友, 즉 나를 알아주는 친구였다. 서로 말이 통하고 마음이 잘 맞는 친구 같은 부부가 되기를 원했다. 그 대표 부부가 바로 조선 중기 문신인 미암 유희춘과 송덕봉 부부다. 이들은 한평생 ‘별거 부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암이 수학이나 관직, 유배, 근친 등의 이유로 자주 집을 떠나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 ‘지우’라고 여길 정도로 금실 좋은 부부였다. 미암이 세상을 떠난 8개월 뒤에 덕봉이 곧 그를 따라갈 정도였다.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평소 끊임없이 시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다. 선조 2년(1569년) 2월이었다. 당시 미암은 외교 담당 부서인 승문원에 다녔는데,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숙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비가 눈으로 바뀌면서 날씨가 갑자기 무척 추워졌다. 송덕봉은 미암이 걱정스러워 새로 지은 비단 이불과 평소 입는 외투인 단령團領을 보자기에 싸서 보냈다. 뜻밖의 물건을 받은 미암은 대단히 감동해 임금이 하사한 술상과 이러한 시를 지어 보냈다.
<평생도> ‘혼례’, 비단에 채색, 53.9×35.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눈이 내리니 바람이 더욱 차가워/ 그대가 추운 방에 앉아 있을 것을 생각하노라/ 이 술이 비록 하품下品이지만/ 차가운 속을 따뜻하게 데워 줄 수 있으리.”
그러자 덕봉도 모처럼 시심詩心을 발휘해 화답 시를 지어 보냈다.
“국화잎에 비록 눈발이 날리지만/ 은대(승문원)에는 따뜻한 방이 있으리/ 차가운 방에서 따뜻한 술을 받으니/ 속을 채울 수 있어 매우 고맙소.”
그날 밤 미암은 엿새 만에 비로소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자신의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부인과 엿새를 떨어졌다가 만나니 반가웠다.”
이응태·원이 엄마, 관 속에 넣은 사랑의 편지
원이 엄마가 죽은 남편 이응태에게 보낸 편지.1586. 안동대학교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부부들은 소통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에 서로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 받았다. 대개 한글로 썼으며, 부부가 서로 존칭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부부 사랑이 진솔하게 담겨 있는 편지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16세기 후반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가 인상적이다. 원이 엄마는 조선 중기 안동시 정하동 고성 이씨 귀래정파 문중의 며느리. 남편 이응태는 결혼해 처가살이를 했다. 시집살이에서 벗어난 덕분에 두 사람은 평소에도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하며 다정다감하게 살았다. 이 부부는 서로 말이 잘 통해 밤마다 잠자리에 누워 수없이 많은 담소를 나눴다. 어떤 날에는 밤을 꼬박 지새우며 아침을 맞이하기도 했다. 밤이 새도록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그때마다 원이 엄마는 남편의 품속에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보소!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 그럼 이응태도 “둘이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말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응태는 서른한 살에 일찍 세상을 떠났고, 원이 엄마는 그 슬픈 마음을 한글로 구구절절 담아 관 속에 넣었다. 두 사람은 평소에도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할만큼 애틋한 부부 사이였다. ‘자네’ ‘하소’ 하는 동등한 호칭과 말투를 사용해 친구 같은 부부 생활을 했다.
“원이 아버지에게, 자네 항상 내게 이르되 ‘둘이 머리가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는 두고 자네 먼저 가시는가? 나와 자식은 누구에게 기대어 어찌 살라 하고, 다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 자네는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졌고, 나는 자네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졌던가?
함께 누우면 내 언제나 자네에게 ‘이보소!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 했거늘,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 자네 여의고는 아무래도 나는 살 힘이 없네. 빨리 자네한테 가고자 하니 나를 데려가소. 자네를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길이 없네. 아무래도 서 러운 뜻이 그지없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자네를 그리워하며 살려고 하겠는가.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이르소. 내 꿈에 이 편지 보신 말 자세히 듣고자 하여 이리 써서 넣네. 자세히 보시고 내게 이르소. 자네 내 배 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이 있다 하고서 그리 가시니, 배 속의 자식 낳으면 누굴 아버지라 하라 하시는고.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을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에 또 있을까.
자네는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러울까.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 자세히 보이고 자세히 이르소. 나는 꿈에 자네를 보려 믿고 있다네. 몰래 와서 보여 주소서.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이만 적나이다.”
조선에도 매 맞는 남자는 있다, 없다?
조선시대에도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하면서도 깊은 사랑을 나눈 부부가 많았다. 잔불로 사골을 푹 끓이듯이 은근하면서도 진한 사랑을 했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부부가 항상 낭만적인 사랑만 한 것은 아니다. 애절하게 사랑한 만큼 치열하게 싸우기도 했다. 우선 부부 싸움에도 시대적 차이가 있다. 오늘날은 주로 생활 방식이나 가치관, 성격 차이 등의 이유로 다투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남편이 집안일에 무관심하거나 외도 때문에 많이 싸웠다. 조선 중기 학자 오희문의 일기인 <쇄미록>과 문신 이문건이 쓴 <묵재일기> 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1596년 10월 4일, 아침에 아내가 나보고 가사를 돌보지 않는다고 해서 한참 동안 둘이 입씨름을 벌였다. 가히 한심스럽다.”_ <쇄미록>
“1552년 10월 5일, 아내가 지난밤에 해인사 숙소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물었다. 기녀가 곁에 있었다고 대답하니, 크게 화를 내며 욕하고 꾸짖었다. 아침에도 방 자리와 베개 등을 칼로 찢고 불에 태워버렸다. 두 끼니나 밥을 먹지 않고 종일 투기하며 욕하니 지겹다.”_ <묵재일기>
또한 믿기지 않겠지만 조선 중기만 해도 아내를 무서워하거나 ‘매 맞는 남편’이 의외로 많았다. 심지어 중종 12년(1517년)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매 맞는 사건이 한 해에 무려 여섯 건이나 발생해 조정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밤새도록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시고 들어오자 집에서 내쫓아 죽게 만든 이형간의 아내, 남편의 첩을 끌어다가 머리털을 자르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타한 홍언필의 아내, 첩을 두거나 기녀를 상대한 남편과 별거하면서 “일평생 그와 함께 살지 않겠다!”고 선언한 허지와 정종보의 아내, 남편이 여자 하인과 간통한 사실을 알고 여자 하인의 입을 돌로 쳐서 죽인 신수린의 아내, 얼굴이 추하게 생기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남편을 구박한 홍태손의 아내….
이 일들은 일반 평민층이 아닌 양반 사대부가에서 벌어진 것이었고, 임금은 그것이 모두 남편이 잘못해서 생긴 일이라면서 가볍게 처벌했다.
자료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자료
- 조선시대 부부는 어떻게 사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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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부부라고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시나요? 역사책과 소설, 사극에 비친 당시 부부는 엄격하게 내외 분별하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상대를 존중하고 애정을 느끼며, 다정하게 사랑을 표현한 부창부수가 많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며 애틋한 부부애를 나눈 남녀도 있지요. 아내와 사별하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리워한 사내도 여기 있습니다. 양성평등의 입장에서 아름다운 부부 사랑을 나눈 조선시대 부부 이야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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