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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시인 시처럼 극처럼, 낭독을 즐기는 삶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 현대시를 이어갈 젊은 시인 1순위, 한국어로 쓴 시집 중 보전해야 할 한 권이라니! 이런 유난한 찬사를 들으며 국내 순수 문학계에서 보기 드문 시집 판매량을 기록하고 보스턴 리뷰가 세계 젊은 시인 20인으로 지목한 김경주 시인을 만났다. 나무 그늘 아래서 비파와 수금 소리에 글의 영감을 받을 줄 알았더니, 호나우두처럼 85분의 인생을 땀 흘리며 달려야 겨우 5분의 영광을 얻는다는 시인이 들려준 연극 같은 삶의 이야기.

누구도 시 낭독에 관심을 갖지 않던 2000년대 초반부터 좋은 사람들과 모여 시 낭송과 낭독을 즐겨 해온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이 봄, 거창하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언급하지 않아도 이따금 알을 깨고 나오고 싶은 마음의 투쟁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왜 봄이 와도 설레지 않고, 내일에 무감각하며,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대충 마무리되는가? 일상이 답답해지면 누구나 지금 처한 세상을 깨고 나가고픈 본능이 꿈틀거린다. 삶이 콧노래가 되고 충만한 기분으로 내일을 고대하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서!

김경주 시인에게 올해는 인생에서 가장 눈부신 봄처럼 보인다. 지금껏 그가 깨뜨리고 나온 세계가 몇 겹이나 되었는지 이참에 귀 기울여 들어보니 더욱 그렇다. 천재성 한 방울에 용기 네 방울, 부단함 다섯 방울을 넣어 혼합하면 동년배보다 세 배쯤 더 넓은 우주로 나아간 듯한 그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을까?누구나 시인처럼 살 수야 없겠지만, 시인의 목소리에서 알을 깨고 나갈 힌트몇 가지를 얻었다. 그는 자신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볼 줄 알 때라야 그 사람의 인생이 흐뭇한 시가 되고, 작가의 작품이 깊은 문학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봄이 완연해지면 열두 살에 내가 다니던 통영의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보아야겠다. 나에게서 벗어나 나를 바라보고, 그 느낌을 기록하고, 소리 내어읽어보리라. 자신을 보는 이 거리는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나오고, 그리하여자존감이 충만해질 때라야 우리는 유머를 갖게 된다고 한다. 그래, 사람은 살아온 만큼 살아가는 거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는 자기와의 거리 찾기를 김경주 시인은 ‘자기 대상화’라는 문학적 기법으로 설명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거리를 설정하라
“모두 글을 쓸 수 있지만, 위대한 작가의 글이 그처럼 위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은 조금 떨어져 자신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에요. 나와의 거리를 만들 줄 알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죠.” 열두 살 즈음 김경주 시인은 전라도 어느 지방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군인이었다가 형사 반장이 된 아버지 때문에 유랑 악단처럼 수없이 전학을 다녔고 가정에서도 안정을 찾을 수 없던 그는 친구를 만나는 대신 혼자 만화방에서만화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오후에는 혼자 학교 운동장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사과를 먹으면서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나는 것을 보곤 했다. 사람 친구보다 만화책 같은 사물 친구를 사귀는 게 헤어질 일이 없어 훨씬 낫다는 내적질서를 스스로 세우던 열두 살의 기억.

그러다 광주의 학교로 전학 가서는 기계체조반에 들어가 운동을 열심히 했다. 중고등학교 내내 만화책과 기계체조와 어울렸고 공부와는 친할 환경이 없었으니 자연히 대학 입학은 어려웠다. 그래서 신문 배달을 하다 뒤늦게 군에 다녀온 스물다섯, 그때 그는 전주에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살면 평균치도 못 누리는 삶을 살다가 소멸해버리겠구나 하는 걱정이 제대 후부터 들었어요.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찾아 눈을 돌려보니 연극하는 친구들이 보였어요. 지방 폐교에서 극단 활동을 했는데, 말도 안 되는 그 무모한 열정에 묘한 자극을 받았죠. 그래서 ‘내친김에 이 친구들과 함께 뒹굴어보자’ 결심했고 배우, 연출,엑스트라 등 닥치는 대로 했어요.”

선배들은 그에게 연극을 하려면 시를 알아야 하고 예술의 어느 촌각에든 반드시 시가 있으니 시를 꼭 읽으라고 일렀다. 연극과 시 공부는 한 몸이라니! 어떻게든 시를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어려운 시집을 갖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읽었다. “시를 50장씩 써도 제가 쓴 시를 보여줄 사람이 없었어요. 너무 답답하면 114에 전화를 걸어 제 시를 읽어주기도 했습니다. 무언가를 독학하는 건 그만큼 외롭고 힘들지만, 알고 보면 충분히 독학이 가능한 게 글쓰기예요. 독서 안에서 이루어지니까요. 수없이 읽고 또 읽으면 비슷한 작품 사이에도 미묘한 글쓰기의 차이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매일 오직 시만 생각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괴물스럽다’고 혀를 내둘렀지만, 그는 스물일곱에 당시 최연소로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와 시상식을 한 다음 날 도망치듯 인도로 떠났다. 시를 쓰는 건 좋았지만 갑자기 시인으로 불리는 건 왠지 두려웠던 혼란의 스물일곱. 그러나 3개월도 안 되어 괴질에 걸려 돌아왔고 등단한 지 몇 달도 안 되어 다시 지방의 백수가 되었다.“그때 갑자기 어릴 때 살던 곳에 가보고 싶었어요. 저 혼자 ‘김경주 생가 체험’이라고 부르며 살던 집과 학교를 찾아다녔죠.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라 재미있었어요. ‘거미는 자신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 없다’라는 시도 그때 썼죠. 거미는 수도 없이 많은 집을 짓지만 자신이 버린 집에는 절대 다시 돌아가지않고 남이 지은 집에도 살지 않아요. 자기 것을 반드시 자기가 또 짓죠. 그제야 문학은 굉장히 구체적인 삶의 순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나를 보는 ‘거리’가 있어야 남과 교감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어린 시절엔 누구나 자신만 아는 코 묻은 철학과 인생의 무용담이 있지 않은가. 시인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확인하면서 그간 지적 오만에 가득 차 있던 자신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예술의 자원은 위대한 작가의 작품이 아닌 바로 자신의 소박한 인생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감행한 탈출이었다

쓸모없는 일을 열심히 해보라
“20대 초반에 무얼 하며 살까가 고민이었죠. 주위를 보면 남이 쓸모 있다고 말하는 걸 열심히 한 사람은 나중에 쓸모없어지더군요. 그러니 나는 아예 남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일을 열심히 해보자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오히려 삶에 설렘이 생겼어요.”

남 보기에는 영 쓸모없던 스물일곱 백수의 생가 체험은 이제부터라도 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강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 대신 영어를 독학했다. 하루 열네 시간씩 영어 공부를 해서 토플 점수를 받았고, 1년 만에 영어 점수와 논술 점수만으로 원하는 대학에 모두 수시 전형으로 합격했다.그중에서 단과대 수석으로 2년 장학금을 받은 서강대 철학과에 진학했다.스물여덟 살에 신입생이 되었으니 공부가 얼마나 재미있던지, 부전공, 복수 전공도 없이 오직 철학 하나만 독파했다. 어린 동기들은 경제학이나 신문방송학 같은 쓸모 있는 학문에 열을 올렸지만 그에게는 쓸모없는 철학이 가장 설레었으니까. 주말에는 경마장에서 경마 신문을, 아침에는 지하철에서 신문을 돌리고 야설, 무협지, 자서전 대필, 번역 등 닥치는 대로 생계형 글쓰기를 하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하며 학업을 계속하던 시절이었다.


새 떼를 쓸다

찬물에 종아리를 씻는 소리처럼 새 떼가
날아오른다

새 떼의 종아리에 능선이 걸려 있다
새 떼의 종아리에 찔레꽃이 피어 있다

새 떼가 내 몸을 통과할 때까지

구름은 살냄새를 흘린다
그것도 지나가는 새 떼의 일이라고 믿으니

구름이 내려와 골짜기의 물을 마신다

나는 떨어진 새 떼를 쓸었다

_시집 <고래와 수증기> 중에서



“먹고살기 위해 글을 썼지만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잊지 말아야 했죠. 그 때부터 희곡을 쓰고 있는데 극단에서 비용은 받지 않아요. 조명이나 무대 일을 하고 돈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극작가라고 돈을 받을 수 없고, 저한테 시와 연극은 제가 글 쓰는 이유를 확인하는 실존적 글쓰기니까요.”

어떻게 글을 써야 호응을 받는지 그 비법을 터득해 대학 졸업 전에 국내 대기업에 카피라이터로 취직해 고액 연봉을 받았고, 한 해에만 글쓰기 대회 수십 곳의 상을 휩쓸 만큼 상업적 글쓰기에 달관했다. 그럼에도 그는 등단한 지 6~7년이 지나도록 첫 시집을 내지 못한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의 신세가 아니던가. 그래서 ‘모든 것을 멈추고 이제 내 글을 쓰자!’라고 자신에게 선언하며 대기업을 퇴사했다. 그렇게 해서 2006년에 드디어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가 세상에 나왔다.

윤동주, 한용운 같은 시인의 서정적 시가 정통이라고 생각한 문학계는 자연친화적 감성 대신 도시 변두리의 아스팔트 키즈 감성으로 시를 쓰는 그에게‘미래파’라는 수식어를 붙여 경계했다. ‘위험하리만큼 천재적 시인, 한국 문학을 바꿀 시인’이라는 날이 선 호평이 쏟아졌다. 독자의 반응도 대단해서, 그의 첫 시집은 기형도 시인의 시집 이후 국내 최대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의 의지로시집을 절판시켜 살 수 없던 4년의 기간까지 더하면 아마도 기형도 시인의 기록을 뛰어넘을 것이다. 참으로 생산성 없는 일로 20대를 허송세월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쓸모없는 것을 해야 쓸모 있어지더라’는 20대 초반 자신의 믿음대로 살다 보니 몇 년 만에 한국 문화 예술계의 강력한 핵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출판사가 자신을 포함한 인기 작가의 책만 남기고 실용서 위주로 편집 방향을 틀자 첫 시집과 첫 여행 수필집을 스스로 절판시켰다. “제 책을 제가 살 수 없는 잔혹한 시기를 만든 엉뚱한 용기를 낸 것이죠. 현대사회의 악은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에요. 처음에는 작가가 수익성 위주의 출판 프레임 속에 녹아 있는 게 화가 나던 존재론적 외로움이었다면, 두 번째시집부터는 ‘전 세계에는 이렇게 시집이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은 왜 이렇게 시집을 안 볼까?’ 하는 외로움이 컸죠. 그래서 ‘두 번째 시집부터는 진정으로 시를 좋아하는 독자만 남게 하리라. 모세처럼 독자를 갈라보자’라고 마음먹고 낭독을 염두에 두고 시를 썼는데, 정말 절반의 독자가 떨어져 나가더군요.”

두 번째 시집 <기담>을 발표하자 정말로 독자는 반으로 갈렸고, 교과서적시에 익숙하던 평단과 대중에게서 ‘모국어의 파괴자’라는 극단적 비판까지 쏟아졌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는 방식을 알기 때문에 첫 번째 시집이 사랑받았으면 그 방식을 따릅니다. 하지만 ‘에라 모르겠다, 내가 언제부터 사랑받은 사람이었나’ 싶어서 시와 극은 하나라는 생각대로 내 나름으로는기하학적으로 시를 썼죠.” 그의 이런 생각은 우리나라에 시 낭독 문화가 자리 잡는 기원이 되었다.그가 이 쓸모없는 노력을 지난 10년간 계속하자낭독 형태의 부조리 연극이 늘었고, 글을 읽는 대신보는 것이 익숙한 디지털 사회가 되었어도 사람이 공간에 모여 입술로 시를 읽는 낭독 문화 또한 점점 더 뜨겁게 살아나고 있다

목소리를 내어 글을 읽어보라
“아무도 낭독 문화에 관심이 없던 2000년대 초반부터 시 낭독 모임을 했어요. 홍대 앞 이리카페에서 고향 친구인 가수 하림, 바이올리니스트, 인디 밴드 등과 모여 낭송과 낭독을 했죠. 우리나라에서는 배경음악을 깔고 출판 이벤트처럼 낭독회를 하지만, 유럽에는 50년, 1백 년 된 시 낭독회가 동네마다 열려요.10대 시절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까지 일평생 좋은 사람끼리 모여 시를 낭독하는 소규모 모임 말이죠. 그 옛날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작가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읽을 때 관객이 마흔여덟 시간 동안이나 들어준 문화도 있었죠. 그만큼 낭독 문화는 유럽에서 중요합니다. 시는 어느 시대에는 노래가, 어느 시대에는 정신이 되고 어느 시대에는 사상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요즘 사회에서 시는 왜 사람들의 노래가 되지 못하고 점점 소멸해갈까?그의 시극(poetic drama, 대사가 시의형태로 쓰인 희곡) 운동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했다. “시가 대중을 향한 공명은 상실한 것 같아요. 이를 회복하려면시를 쉽게 써서 노래 가사가 되게 하는 건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쉽든 어렵든 내 나름의 시를 쓰되 작가가 시를 쓸 때 가진호흡을 관객에게 돌려주는 것, 즉 라임을 통해 시를 들려주는 작업으로 바꿔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래서 그는 지난 10여 년간 시를 여러 형태의 공연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시 낭독회, 모노드라마, 뮤지컬 등의 시나리오 작업을 끊임없이 했다. 때로는 자신의 이름으로, 대부분 필명을 사용하는 섀도 라이터로 지금껏 수많은 희곡과 뮤지컬 시나리오를 썼지만 시와 소리에 대한 짝사랑은 마를 틈이 없었다. 그 짝사랑이 넘쳐 남이 만류하는 쓸모없는 일을 또 한 번 감행했으니, 잘하던 문예창작학과 교수직을 사임하고 다시 입시 공부를 해서 한국예술종합원의 음악전문사 과정에 지원한 용단이다. “1년간 준비해서 음악, 화성악, 영어 등의 실기 시험을 치르고 입학했더니, 저 외에는 전부 작곡과 출신이더군요. 음악을 떠나서 소리 자체가 얼마나 예민한 장르인가요? 노래가 될 수 있는 언어라는 건 얼마나 많은 파찰음과 마찰음, 조성의 체계까지 고민해야 하는가를 깨달았기에 열심히 음악을 공부해야 했어요. 5년 반 동안 침묵하다 쓴 책이 작년에 낸 네 번째 시집인 <고래와 수증기>예요. 노래 가사로 만든 것, 뮤지컬 대사가 된 것, 소규모 낭독회 모임에서 실제 낭독한 시 등을 모은 시집이죠.”

김경주 시인은 요즘도 대본을 쓰면서 배우의 목소리를 상상할 때 가장 즐겁고 설렌다. 시인의 호흡을 ‘소리’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독자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힙합 래퍼와 의기투합해 포에틱 저스티스, 즉 시적 정의라는 팀도 결성해 독특한 시극 운동을 벌인다. 또 홍대 근처의 소규모 공간에서 누구나 자기가 쓴 시 두 편을 가지고 와서 낭독하는 펭귄 라임 클럽도 11년이 넘게 하고 있다. “영미권 나라에는 포에트리 슬램이라는 문화가 있더군요. 그래서 제 명함에도 ‘포에트리 슬램 운동가’라고 썼어요. 낭독을 시어 자체의 비트와 라임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포에트리 슬램이에요. 가령 ‘니 파이를 먹고 싶을 땐 니 파이를 먹고 가고 죽은 시계를 차고 여행 가고 싶을 땐 죽은 시계를 차고 여행 간다’라는 시를 읽을 때 어느 부분에서 늘여 읽기와 당겨 읽기를 하는가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죠. 이런 방식은 낭독을 일종의 모노드라마처럼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요. 가면을 쓰고 낭독하기도 하죠. 이렇게 공연이 즐거우면 관객이 그 글을 보고 싶어 하고 시에 대한 친화력이 생겨요. 포에트리 슬램은 결국 시집을 읽게 만드는 운동이죠.”

시를 소리 내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경주 시인은 지금도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이 쓴 시를 읽어주고, 상대에게도 요청해 자신의 시를 남의목소리로 듣는다. 처음엔 쑥스럽다던 사람도 몇 번 소리내어 읽다 보면 “요즘은 왜 시를 안 읽어주니?”라고 되묻는 게 낭독의 매력이다. 누군가는 바쁘게 돌아가는 시대에 한가롭게 시나 낭독한다니 참 쓸모없다고 외면하겠지만, 직접 해보면 설렘을 느낀다는 게 많은 사람의 경험담이다.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러시아 초현실주의 작가 블라디미르 쿠쉬의 전시장에서. 그가 블라디미르 쿠쉬와 의기투합해 초현실주의라는 영역을 한국적으로도 해석해보고, 화가의 작품에 시를 곁들이고, 평론을 하고, 인터뷰도 한 이 전시로 현재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국에서 협업한 것을 계기로 올겨울 미국에서 그의 시집 출간에 맞춰 블라디미르 쿠쉬가 자신의 뉴욕 전시에 그를 초대했다.

설레는 일은 10년을 넘게 해보라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살았어요. 저는 취향이 다양할 뿐이지 특기는 별로 없는 사람이에요. 사회에서 사람들은 특기 위주로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데, 인생을 충만하게 사는 데는 오랫동안 함께 취향을 나누는 소규모 모임도 중요하죠.” 김경주 시인은 각종 쓸모없는 노력을 적어도 10년 이상 부단히 해오고 있다. 실력 없는 축구 모임의 대표도 12년째, 저마다 시를 써 와서 낭독하는 소규모 펭귄 라임 클럽도 11년째, 이름 없는 섀도 라이터로 희곡과 뮤지컬 대본을 써온 지도 십수 년째, 교수나 시간강사로(교수가 다시 시간강사를 하는 일은 매우 드물지만,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요즘 시간강사로 다시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강의도14년째, 세계 5백30여 개 지역을 다니며 소리를 녹음하는 여행도 20여 년째 하고 있다. 그 시간의 퇴적층이 방대하고 단단해서, 지난 10여 년간 그가 쓴 희곡만 해도 한 권의 책으로는 도무지 묶을 수가 없는 양이다. 그래서 올해는 그의 희곡이 네 권의 책으로 나뉘어 나온다.

여름에는 젊은 연극인이 모여 대학로와 홍대 앞 극장 곳곳에서 김경주의 희곡만을 공연하는 ‘소 귀에 경주 읽기’(가칭)라는 (시인에게는 몹시 쑥스러운) 연극 축제도 벌인다. 또한 세계 문화계의 주요 평단인 보스턴 리뷰가 그를 세계 최고의 시인 20인으로 지목해 미국에서 시집이 나온다. 한국 시인으로는 처음이다. 그래서 올겨울에는 미국 각도시에서 열리는 초청 낭독회에 그의 유랑 극단을 다 데려가 그들만의 포에트리 슬램을 보여줄 생각이다. 또한 뉴욕과 일본에서도 그의 희곡이 공연된다.

한 해에, 이제 갓 마흔에 이른 젊은 나이에 어떻게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자신이 설레는 일을 찾아 한결같이 해온 작가에게 지금의 영광은 찰나의 하이라이트에 불과하다. 마치 90분간 힘차게 뛰다가 한순간에 골을 넣는 축구 경기처럼 말이다. “축구 경기에서 메시나 호나우두 같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도 90분 경기 중에 공을 만지는 시간은 5분이 채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사람들은 그들의 하이라이트 순간만 기억하죠. 나머지 시간에는 모든 선수가 공평하게 공을 찾아서 필드를 부지런히 뜁니다. 공을 찾아 움직이는 이 85분이 결국 그 사람을 만드는 시간이죠.”

‘90분을 달려서 내 창작물을 경험한 독자와 관객이 단 5분이라도 다른 세계로 건너가게 하는 우정의 연대를 만든다!’고 생각할 때 시인의 마음은 비로소 충만해진다. 남이 뭐라든 간에 궁극의 쓸모는 바로 자신의 설렘이 아니던가. 그래서 시인은 오늘도 자신이 설레는 시극 운동을 열심히 한다. 시간강사라도즐겁게 강의를 준비하고, 랩처럼 시를 읊고, 가면을 쓰고 시를 낭독하며, 무중력 타이핑이라는 재미있는 글쓰기 교실을 열어 다른 사람이 시를 쓸 길도 내준다. 남몰래 밤새 글을 써서 세계 각종 공모에 보내는 일도 꾸준히 한다. 흡연하는 학생을 노인이 과감히 꾸짖을 수 있을 만큼 아직도 노인의 기백이 청청히 살아 있는 동네를 찾아 얻은 그의 작업실 서랍에는 아직도 남에게 보여주지 못한 시가 한 무더기나 들어 있다. 그러니 시인의 설렘은 마를 틈이 없다.

눈부신 봄, 당신의 삶에서 설렘을 되찾고 싶다면 당신을 설레게 하는 것을 기록해보라. 무중력에서 타이핑하듯 가볍고 즐겁게 써 내려간 그것을 당신의 목소리로 읽어보라. 그 순간만큼은 당신도 설레는 시인이다. 시는 우리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채 우리 삶에 깃들어 있다.

김경주 시인이 10년 넘게 해온 시극운동의 일환으로 <내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를 최근 발표했다. 올봄 ‘그런 말 말어’라는 작업 초기의 제목으로 무대에 오를 예정인 희곡을 통해, 시집처럼 멈춰 서게 하면서도 드라마처럼 다음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시극을 읽는 독특한 경험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김경주 #시인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글 김민정 기자 | 사진 박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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