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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 작가 애증의 출장을 떠나는 예술가
프랑스의 철학가 질 들뢰즈는 노매드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베를린에서 서울로, 유럽에서 북미로, 북미에서 아시아로 20년 넘게 이런 노매드의 삶을 살아온 양혜규 작가가 5년 만에 서울에 왔다.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 ‘중간 유형’이라는 초복잡한 생각과 여행 가방 두 개라는 초간단한 이삿짐을 들고 온 작가의 애증이 담긴 출장 이야기.

리움 전시장 입구에서. 그의 작품 ‘소리 나는 인물’처럼, 관람객이 직접 착용하고 전시를 관람할 수 있도록 준비한 방울을 두른 양혜규 작가
오래전 영국 제국주의가 점령한 버마. 우리에서 코끼리가 탈출해 난동을 부린다는 신고를 받은 조지 오웰이 장총을 들고 코끼리 앞에 섰다. 이미 제정신으로 돌아와 태연히 풀을 뜯고 있는 코끼리. 오웰은 눈망울이 맑은 그 코끼리를 결코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백인 경찰이 코끼리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고 운집한 군중의 호기심에 부응해야 하는 오웰은 결국 방아쇠를 당겼다. 쉽게 눈을 감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코끼리. 조지 오웰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코끼리를 쏘다>에서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건 총을 맞은 코끼리인가, 방아쇠를 당긴 오웰인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로가 된 모렐은 좁은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면서 동료들과 아프리카의 들판을 달리는 코끼리 떼 이야기를 하며 버텼다. 손바닥만 한 방에서 넓은 초원을 떠올리려면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했지만, 신기하게도 그 노력이 그들을 생존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모렐은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에서 풀려나자 곧장 아프리카로 떠났다. 학살을 일삼는 식민 정부와 밀렵꾼에 대항해 코끼리를 지키기 위해서.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장편소설 <하늘의 뿌리>에서 모렐이 지키려는 코끼리는 초월적 상상력인가, 힘겹게 구원해야 할 동물인가? 양혜규 작가의 이번 전시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는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

‘상자에 가둔 발레’(2013/2015). ‘소리 나는 인물’(2013/2015) 여섯 점과 ‘바람이 도는 궤도 - 놋쇠 도금’(2013)으로 구성된 작품군으로 움직이면 소리를 내는 방울이 주재료다. 리움의 블랙박스 전시장은 연극 무대처럼 암막이 드리워져 있어, 배우 같기도 하고 기계 같기도 한 작품으로 마치 인형극 같은 전시를 연출했다. 
여행 가방 두 개의 삶
“저는 창고가 없는 작가예요. 얼마 전 얻은 작업실에도 깨끗한 책상만 있어요. 재료를 좀 사놓기는 하지만 남김없이 써서 싹 없어지고 싹 들어오죠. 작품을 쌓아두면 나중에 재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심리적으로 그게 싫으니 소유할 수 없어요. 자꾸만 발목을 잡고 무언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아서죠. 개인 짐도 없어요. 이번에 한국에 올 때도 여행 가방 두 개만 들고 왔어요. 그게 전체 이삿짐이었죠.” ‘노매드 작가’라는 언론의 화려한 수식은 양혜규 작가에게 멋일까 고통일까? 21년 전,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간 그는 베를린에서 살면서 작업하고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2009), 독일 카셀 도큐멘타(2012), 스위스 아트바젤 언리미티드(2014) 등의 국제 전시에 초청받았다. 개인전은 뉴욕뉴 뮤지엄(2010),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미술관(2011), 영국 테이트모던 더 뱅크 갤러리(2012),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현대미술관(2013) 등에서 열었고 싱가포르와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의 레지던스에서도 작업을 했다. 이력을 보면가히 세계라는 광활한 초원을 내달린 코끼리 같은 삶이 아닌가.

그러나 화려하게만 보이는 이 삶의 이면에는 외국 사회에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소수자, 한곳에서 살고 싶은 인간적 고통과 충돌이 숨어 있다. 노매드의 삶은 그에게 실제로는 고통이라고 한다. 작가라는 이름이 주는 수많은 여행과 출장의 특혜에 감사하지만, 보부상 같은 삶에 떨칠 수 없는 애증도 품고 있다. ‘뭔지도 모르는 예술이라는 것에 파우스트처럼 내 인생을 팔아넘겼는가?’라고 자책하지만 예술의 함정과 골탕 먹이기에 대항하려면, 그에게는 짐이 없어야 한다. 20년 넘게 여행 가방 두 개의 짐만 가지고 살아온 삶, 눈망울이 맑던 코끼리에게 과연 이것이 낭만일까 아니면 고통일까? 서울로 온 이후 베를린에는 남은 짐이 없고 새로 얻은 작업실에도 쌓인 짐이 없으니, 작년 여름 이후로 그의 거주지는 더욱 불분명해졌다. 그래도 세계 곳곳에서는 그가 아는 혹은 알지 못하는 그의 전시가 지금도 연거푸 열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비인간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현재 그의 일상에서 가장 실질적 공간은 ‘전시장’이다.

‘창고 피스’(2004). 창고가 없으니 작품을 전시장에라도 보관하려는 궁여지책으로 완성한 작품. 작가의 초기 작품 스물세 점이 미술품 운송 업체가 포장한 상태 그대로 운반용 팔레트 위에 쌓여 있다. 영국에서 첫선을 보인 후 여러 도시에서 전시되다가 2007년 <창고 피스 풀기> 전시에서 포장을 모두 풀어 각 작품이 공개되었다.
코끼리가 없는 세미 회고전
그의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과 컬렉터가 많아졌으니 자연스레 그에게 홈리스의 삶을 종용하는 초청과 출장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가는 이따금 스스로 중매쟁이가 된다. 시간을 감당할 수 없는 전시를 거절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저마다 연락해온 두 미술관의 전시를 중매해 시너지를 이루는 대형 전시로 연결해주는 식이다. 전시 도록을 컬래버레이션하고 국제 저널에 광고를 같이 낸 재작년의 글래스고와 브레겐 전시의 경우가 중매로 탄생한 커플이다. 이렇게 작가 스스로 뚜쟁이가 되면 애증의 출장에 대한 시간 배분의 어려움도 줄일 수 있다. 그렇게 비축해 얻은 시간과 공간의 규모가 큰 전시는 작가에게 ‘내면과 작업의 깊이를 키울 수 있는 기회’라는 기회비용을 지불한다. 덕분에 작가는 자신의 작업 세계에서 겨우 반걸음 혹은 한 걸음을 더 옮겨갈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 리움에서 개최한 개인전이 그런 경우예요. 짚풀이라는 새로운 소재에 6개월간 매달려 ‘중간 유형’(2015)이라는 결과물을 낳았습니다. 전시 규모를 키우는 건 재료에 해당할 때도, 리서치일 때도, 조형일 때도, 사유일 때도 있어요. 예를 들어 뮌헨의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 전시할 때는 리서치가 커서 리서치 안에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따라오도록 했어요. 이번 전시에는 사유 부분이 더 컸습니다. 제 작업의 다음 챕터로 넘어가려는 중간 유형에서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무안할 정도로 큰 프레임의 사유를 할 필요가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물질을 만들고 공간을 다루는 사람이라 짚풀이라는 재료의 조형도 중요했습니다. 만드는 것과 사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니까요.”

2004년 리움이 개관한 이후 국내 생존 작가의 개인전을 연 것은 2012년 서도호 작가의 전시 이후 두 번째다. 2014년 아트팩트넷이 선정한 ‘세계 300위 이내 작가’에 고 백남준, 김수자 작가와 함께 이름을 올렸고, 세계적 아트 어드바이저인 피에르 스테륵스Pierre Sterckx가 가능성을 눈여겨보라고 지목한 양혜규 작가에게 미술관이 몇 해 전부터 요청한 중매가 마침내 성사된 것. 이번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 전시는 2010년 아트선재센터에서 한 첫 번째 개인전 이후 국내에서 5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다. 기존 작품과 여태껏 누구도 보지 못한 신작 등 35점을 한 공간에 동시에 펼쳐놓은 ‘세미 회고전’이니, 한 작가의 연대기적ㆍ시각적 맥락을 파악할 것으로 기대하고, 전시장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아마도 고개를 내저을지도 모른다. 전시장에는 코끼리가 없고, 짚풀을 엮어 거대한 피라미드로 만든 ‘중간 유형’과 상자째 쌓인‘창고 피스’(2004)가 한곳에 놓여 있다. 그래서인지 전시 개관 이후 다수의 언론이 리움에서 배포한 보도 자료만 잘 정리해서 기사를 내거나, 한 미술 전문기자는 “도대체 맥락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품들로 전시장에서 길을 잃을 정도”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시각적으로 관념적으로 분명 쉽지 않은 경험이다.

1 ‘성채’(2011). 양혜규 작가의 전형적인 블라인드 설치작. 1백86개의 블라인드가 시야를 가리며 안으로 유인한다. 무빙 라이트가 내는 빛과 모닥불, 산안개, 바다의 향기가 블라인드 사이를 넘나들며 여러 시공간을 연상시킨다.
2 ‘서을 근성’(2010). 1994년 이후 해외에 머물던 작가가 2010년 서울에 3개월간 머물며 제작한 작업이다. 다양한 일상의 사물을 옷걸이용 행어에 걸어 전선, 전구 등과 함께 매달아 어떤 인물을 형상화한다. 악착같이 살아가는 도시인에 대한 연민과 경의를 표현했다.

코끼리를 쫓아가 사자탈을 써보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라. 작가는 전시 공간에 있지도 않은 코끼리 이야기를 괜히 만인에게 해주겠는가? 천장을 올려다보면 다른 전시와 달리 모든 조명이 각각의 작품을 비추는 대신 한방향만 향하고 있다는 기이한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마치 코끼리를 쏘고 싶지 않은 조지 오웰의 신념, 코끼리를 보호하려는 모렐의 의지 그리고 개별성과 닿지 않는 보편성을 나타내듯이 말이다. 사실 <행복>은 이 코끼리 이야기가 왠지 마음에 든다. 세상에 중간 유형만큼 모호한 관념이 없음을 중간 유형에 처해보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27년째 중간 유형에 체류 중이다. 서점의 직원은 <행복>을 두고 인테리어 서가와 미술 서가와 인문학 서가 사이를 오가며 고민한다. 시류가 그러해 많은 해외 제품이 지면에 등장하지만, 서양식 이미지와 한국적 이미지 사이에서 중간 유형을 찾아 헤맨다. 십수 년째 미술 작품이 표지에 등장하지만, 한 번도 미술 전문지인 적이 없었고, 패션 화보의 저쪽 너머에는 심리학적 사유가 있다. 그렇게 ‘0’도 ‘1’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중앙의 0.5도 아니다. 이는 ‘최고’라는 명성과는 또 다른 정체성의 문제다.

어느 양쪽에도 닿지 못하는 노매드, ‘애愛’이기도 하고 ‘증憎’이기도 하며 초월적 상상력도 주지만, 구원의 대상이기도 한 코끼리의 존재가 아련하게나마 <행복>의 신세라서 이 전시는 생경한 전시 이면이 살갑다. “저는 중간 유형인 <행복이가득한집>이라는 잡지의 기자입니다. 그런데 중간 유형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요?” 작가의 대답이 이어졌다. “한국어나 한자로 했을 때 ‘중中’ 자만큼 어려운 말이 없어요. 하지만 서양에서는 ‘뉴트럴neutral’에 대한 아주 많은 토론과 해석이 있죠. 중심도 되고, 둘 사이의 중간도 되고, 겸손하고, 튀지 않고…. 그만큼 의견이 분분한 것이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중간은 매개에 가깝습니다. 어릴 때 누군가 둘 사이를 열심히 질주해서 마치 그 사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만화를 혹시 본 적이 있나요? ‘매개’가 한번에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아요. 그게 안 되는데도 기를 쓰고 수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그러나 결국엔 안 되는 것이니 개별성과 보편성의 결과가 아니라 그 사이를 오가는 현상이죠.”전시가 끝나 화랑에서 나왔으나 창고가 없으니 작가도 보관할 수가 없어서 운송 박스 안에 고스란히 쌓여 있는 ‘창고 피스’, 21년째 유럽의 촌년으로 살다 보니 서울 친구들의 그 많은 소비 정보력이 놀라워 도시인의 물건을 행어에 연결해 불을 밝힌 ‘서울 근성’, 눈높이의 블라인드가 시야를 방해하지만 빛ㆍ냄새ㆍ그림자가 흔적 없이 블라인드 사이를 유영하는 ‘성채’, 각 분야 인사들이 실제 사용하는 의자를 한데 모으고 전시 관람객이 그곳에 앉아 쉬는 동안 그들의 취향과 임시 공동체를 이루는 ‘VIP 학생회’(2011/2015)도 결국 어느 기준에서 보든 중간 유형이 아니겠는가?

누구나 집에 상자, 봉투, 행어, 블라인드가 있으니 그걸로 집을 장식하면서 잘먹고 잘 살면 되는데, 왜 사람들은 부러 감상을 하겠다며 전시장에 찾아오는가? 사람이 예술 감상이라는 이런 비정상적 행동을 하는 건 인간이 원래 ‘돌아이’ 기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양혜규 작가의 생각이다. “그 기질을 최고로 지니는 사람이 예술가이니 주어진 몫을 하면서 살아야겠지요. 좋은 사람이 될 생각을 하지 말고, 부려야 할 고집은 부리면서요. 기생충이 이로운 벌레처럼 살면 안 되고, 광대가 선생님처럼 살면 안 되잖아요.” 그는 밸런스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누구나 다르다는 사실을 매우 존중한다. 그래서 설거지를 하지 않고 그림처럼 앉아만 있는 룸메이트에게 한 번도 설거지를 시키지 않았다. “저는 억척스러운 사람이고 그는 억척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목을 자르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걸 왜 하라고 하나요? 저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하모니고, 저마다 자기 기질에 충실할 때 인류가 공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원주의자예요.”

상자, 봉투, 빨랫대, 의자, 옷걸이, 행어, 블라인드 등 생활 속 살가운 물건으로 남다른 큰 사유를 구현해내는 작가는 아무 교훈 없이 관객에게 상상력이라는 탈을 씌워준다. 사자탈을 쓰고 춤을 추기 시작하면 평범한 사람도 마치 사자처럼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는 현상을 전시 공간은 관람객에게 허락한다. 거기까지! 스스로 초월적 존재가 된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는가는 전시장의 주술 밖의 일이다. 그러기에 양혜규 작가는 전시 관련 글의 교정을 볼 때 ‘관람객’이라는 말을 철저히 제외한다. “‘이 작품은 관객이 만져도 된다’는 말은 ‘손으로 밀 수 있다’로 고쳐 쓰고, ‘관객이 체험할 수 있다’는 ‘작동해볼 수 있다’는 식으로 바꾸죠. 감상은 창작하는 사람이 절대로 거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저마다 자신의 기질에 충실할 때 인류가 공생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남은 보지 못해도 내가 코끼리를 느꼈다면 그게 답이고 내가 곧 사유다. 그런게 돌아이 기질이 있는 인류의 문화고 전시고 감상이며, 중간 유형이 넘쳐나는 다원주의 세상이다.

‘중간 유형’(2015). 이번에 국내외에 처음 선보이는 신작. 짚풀은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재료이나 각 문화권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용된다. 고대 마야의 피라미드 ‘엘 카스티요’, 인도네시아의 불교 유적 ‘보로두부르’, 러시아의 이슬람 사원 ‘라라 툴판’을 참조한 구조물 세 점과 인체를 연상시키는 개별 조각 여섯 점이 인류학적 보편성과 민족적 개별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투영한다.
중간 유형을 데리고 온 여행
양혜규 작가는 도대체 이 커다란 사유를 어디에서 가지고 왔을까? 인류학적 보편성과 민족적 개별성이라는 거대한 사유 사이의 중간 유형인 짚풀 작품은 스스로 안식을 선포하고 2014년 한 해를 잘 쉬면서 얻었다. “2012년에 전시를 하면서 위기감을 느꼈어요. 이른바 영양분 공급이 잘 안 되는 것 같았죠. 제가 재미있어하는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독특한 게으름은 부리지 못하고 아웃풋만 많이 냈으니까요. 그래서 2014년에는 놀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전시 계획을 잡지 않았어요.” 쉬는 동안 일단은 제대로 게을러야 했다. 누워서 천장 보기 같은 것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노는 것도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 “두고 보자. 그렇게 안될걸” 하고 말하던 친구들의 말이 딱 맞았다. 여행을 많이 다녔고 베를린에서 서울로 와 작업실이라는 걸 차렸고 사람도 많이 만났다.

쉬는 동안에도 여전히 노매드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일이 아닌가. “그래도 가만히 있는 거였어요. 신작 작업을 안 했으니까 작품을 완성해야 하는 데드라인은 없었거든요. 끊임없이 다니고 사람을 많이 만났지만 제가 정말궁금해서 알고 싶은 것을 노크하는 여행을 했어요.” 특히 이스탄불부터 한국, 일본, 중국 등의 동아시아 3개국까지 책을 읽고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의 일상을 노크했다. 그러던 중 일본의 한 공원에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짚풀로 감싼 것을 보았는데, 지푸라기라는 원시적 소재의 여전한 유효함, 자연과 인간 본성의 만남, 그 시각적 아름다움에서 ‘중간 유형’의 영감을 받았다. 또 새로운 도시에 갈 때마다 민속박물관, 고고미술관 등에 가서 공룡 뼈부터 도자기까지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것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졌다.

우리나라의 사자춤이 아프리카에도 있다는 것을 박물관에서 알았다. 아프리카에는 사자가 있고 한반도에는 사자가 없는데, 왜 우리는 사자춤을 추었을까? 그때의 기분과 질문을 노트에 잘 메모해놓았다. 양혜규 작가는 어릴 때부터 일본에 갈 때마다 인형극 분라쿠를 많이 보았다. 닌자처럼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인형의 팔과 손을 들고 그림자처럼 움직이면서 인형극을 할 때 사람들이 그인형만 본다는 사실에 어린 마음에도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처럼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말이다. 드래그퀸(동성애자)들은 퍼레이드에서 탈처럼 거대한 옷을 입고 소수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초월한다. 평생 사자를 보지 못한 한반도의 옛사람들은 사자탈을 쓰고 춤을 추면서 복을 불러오고 잡귀를 쫓았다. 이처럼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도록 믿게 만들고,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초월하게 만드는 탈의 위력을 양혜규 작가는 지난 인생에서 여행을 통해 수없이 보았고 생각했다. “탈을 써도 그 속엔 평범한 사람이 있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탈을 쓴 상태의 초월성을 믿어줍니다. 그런 레이어드를 갖는 게 인간에게는 중요한 문화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탈을 쓴 사람은 절대적이고 세상의 모든 일은 상대적이다. 양혜규 작가는 ‘절대적인 것은 이 상대적인 것을 뺀 나머지’여야 한다고 확신한다. 미술이 종교처럼 절대적이라는 말까지는 차마 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상대적인 것을 상당히빼야 하는 게 미술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상대적인 것을 좀 더 빼고 정말 낭비적이거나 비록 허송세월을 보낼지라도 절대적인 것을 해보는 것, 그걸 하라고 이 사회가 문화와 예술가라는 존재를 허락해주었으니 그는 고통스럽더라도 노매드로, 중간 유형으로 살아간다. 터키에서 눈을 떠 극동아시아 3개국으로 이어져온 자신의 관심에 따라 한국의 리움에서 하는 개인전으로 올해의 문을 열고 베이징 798예술구의 울렌스 현대미술관(UCCA)에서 하는 전시로 한 해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얼마큼 질주해야 중간을 벗어나 온전한 것에 이를지는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먼 훗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 지역에 대해 가진 이 무렵의 관심 때문에 그 전시가 열렸구나’ 하고 자신을 반추하며 작업의 한 챕터를 넘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양혜규 작가는 생각한다. 그래서 이 전시는 중간 유형이며 작가의 인생은 계속해서 애증의 출장 중이다.


글 김민정 기자 | 사진 박기호 | 작품 사진 삼성미술관 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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