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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전문가 13인의 은밀한 여행기 세상에 이런 여행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뭔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길 고대하지만, 막상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소소한 일상이다. 낯선 공기와 이방인들, 알 수 없는 긴장과 즉흥적 경험에서 타인과 교감하고, 살아 있음을 실감하며, 동시대의 문화를 온몸으로 체득한다. 여행을 특별히 좋아하는 13인이 꼽은 은밀한 여행기를 소개한다. 이런 즉흥적 순간에 여행의 기쁨이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밥장 
“이제 일본에서 난 짬뽕!” 

일본에서 맛있다는 짬뽕을 찾아 규슈 다케오 시를 찾았다. 다케오 시는 5만 명이 사는 작은 도시로, 규슈 올레와 온천으로 유명하며 최근에는 다케오 도서관으로 뜨고 있다. 다케오 도서관은 2012년 쓰타야와 함께 운영한 뒤 1백만 명이 다녀갈 정도로 ‘대박’이 났다. 다케오 시의 또 다른 명물을 꼽는다면 역사가 60년이 넘는 ‘이데짬뽕(井手ちゃんぽん, 佐賀県武雄市北方町志久1928, 0954-36-2047)’이다. 특히 채소짬뽕이 유명한데, 동네 이웃인 광부들을 위해 값싸고 맛있으면서 건강도 챙길 수 있게 만들었다고. 지금 광부들은 없지만 그 시절 그 채소짬뽕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마을 사람을 배려한 따뜻한 마음도 그대로 남아 있다. 만약 다케오 시에서 이데짬뽕에 들른다면 한국에서 온 일러스트레이터가 맛있게 먹고 남긴 그림을 보여달라고 해보라. 경상도 남자와 비스름한 사장님이 스윽하고 보여주실 테니까! 


여행 작가 문유선
“크로아티아 비둘기 똥을 맞으면 행운이 온대요”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의 구시가지 골목을 따라 걷던 중, 크로아티아 전통 의상을 입고 좌판을 벌인 아주머니를 만났다. 곁에는 반려견과 매일 먹을 것을 얻으러 오는 길 고양이가 함께 놀고 있었다. 난 그에게 동의를 구하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순간, 카메라와 얼굴 사이, 불과 5mm도 안 되는 좁은 틈으로 따뜻하고 묽고 구리고 비릿한 액체가 이마에서 인중까지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자 뚱뚱한 비둘기 한 마리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비둘기 똥 명중! 나의 비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아주머니는 연신 깔깔 웃으며 휴지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고, 화장실에 가서 씻으려 면 필요할 거라며 손에 동전까지 쥐여주었다. 실례를 하고도 나와 눈을 빤히 맞추는 비둘기에게 부아가 치밀었다. 세수하고 나온 내게 그녀가 비둘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쟤야! 아직 안 갔어. 쟤한테 고맙다고 해. 크로아티아에서는 비둘기 똥 맞으면 큰돈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담이 있어. 위로하려는 거 아니고 진심이야.” 원망은 녹아내리고, 비둘기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오가던 많은 여행자가 나를 보고 깔깔 웃었으니 좋고, 나는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기대감이 생겨서 또 좋았다. 비둘기 배설물을 씻어내느라 시간을 지체한 덕에 성곽 위에서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었다. 쪽빛과 자색이 수백 가지 톤으로 변주되어 빛나는 하늘과 바다, 무척 아름다워서 낯설고 몽롱하게 느껴지는 비현실적 풍경이 비둘기가 전한 선물이라고 믿는다.


여행 다큐멘터리 PD 오성민
“사흘을 걸어 잉카의 비밀을 만났습니다”

마추픽추로 가는 길, 과거 잉카인이 마추픽추로 가던 잉카 트레일을 선택했다. 첫날은 해발 4000m가 넘는 아브라 말라가에서 산타마리아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단연 인상적인 것은 해발 5700m의 베로니카 설산이었다. 만년설에 압도되어 그저 멍하니 관조할 뿐이었다. 둘째 날부터는 본격적인 걷기. 아슬아슬한 낭떠러지가 있는 좁은 옛길을 지나니 음습한 기운의 정글 숲이 나왔다. 우루람바 계곡 위를 수동식 케이블카를 타고 건너는 작은 모험도 즐겼다. 하루 여덟 시간, 발바닥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열심히 걸었다. 남미에서만 볼 수 있다는 황제타마린 원숭이도 만났고, 이국적 색깔의 앵무새가 무리 지어 날갯짓하는 풍경도 마주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드디어 마추픽추 앞에 섰다. 계단 하나하나에도 생명이 느껴졌다. 켜켜이 쌓아 올린 돌에는 잉카인의 영혼이, 저 멀리 태양이 떠오르는 고봉에는 태양신의 신성함이 있었다. “마추픽추는 페루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잉카 트레일을 걷다 만난 현지인에게 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페루의 자랑이며 존엄이라 했다. 나는 마추픽추를 잘 보존해온 후손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누군가 나처럼 인간과 대자연이 만나 상호 교섭하던 위대한 이 길을 걷기를 바란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남수단 사무소 박지해 
“탄자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했어요” 

살면서 어디를 가장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언제나 아프리카였다. 휴학을 하고 전투적으로 돈을 모은 후, 전 재산을 털어 올라탄 탄자니아행 비행기. 탄자니아를 간 건 정말 행운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머무르던 마을 차마지가 떠오른다. 로컬 NGO를 통해 현지에 머무르며 영어 교육을 했다. 학교를 한 번도 다닌 적이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교실로, 최고령 학생은 60세의 바순 할아버지. 낮에는 밭일을 하시다가 오후에 영어 공부를 하러 한 시간 넘게 걸어오셨다. 그러면서 매번 숙제도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해오셨는 데, 할아버지뿐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이 배움에 목말라 교실을 찾았다. 그 성실함과 열정에 학업에 충실하지 못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이때만큼 마음이 풍요로운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엄청난 사랑을 받고 배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든 일은 이어졌지만,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프리카에 머물면서 수많은 어려움이 반복됐지만, 지금까지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건 당시 만난 탄자니아 친구들 덕분이다. 탄자니아 사람들을 통해 물러서지 않는 법을 배웠고,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지금 나는 남수단에 있다. 독립한 지 3년이 막 넘은 이 나라에 매료되어 이곳을 여행하며 일하고 있다. 언제나 사람들이 나를 깨우치듯, 결국엔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캠핑 전문가 성연재 
“비밀 계곡에서 플라이피싱 즐겨봤나요?” 

홋카이도와 가까운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아오모리는 한국에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다. 푸를 청靑의 ‘아오이’와 숲(森)을 뜻하는 ‘모리’가 합쳐진 아오모리 현은 그야말로 숲으로 이뤄졌다. 특히 아오모리는 플라이피싱 마니아들이 즐겨 찾을 만큼 자연이 아름답고 보존이 잘돼 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울창한 삼림이 넓은 아오모리 평야에서 높다란 하코다 산까지 이어져 있다. 높은 고원지대 한가운데는 해발 400m, 둘레 44km나 되는, 바다라 부르긴 좀 작지만 호수라 부르기도 좀 뭣한 도와다(十和田) 호수가 있다. 화산이 20만여 년 전 분화하면서 생긴 칼데라호로 가장 깊은 곳이 326.8m나 된다. 

오이라세 계류는 일본 메이지시대 문인인 오마치 게이게쓰가 산책하기 좋은 길로 추천한 숲. 오이라세 강의 네노쿠치에서 야케야마까지 약 14km에 이르는 계류로 너비 1m 가량의 산책로 이외에는 사람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하지만 일부 구간에서 플라이 낚시를 할 수 있었다. 5월 이전에는 도와다 호수에서 눈 녹은 물이 내려오기 때문에 낚시에 적합하지 않다고. 현지인은 찬 수온 때문에 플라이 낚시보다는 오히려 살아 있는 미끼를 이용해 낚시를 한다. 주로 송어들이 움직이며 간간이 아메마스도 잡힌다. 아메마스는 우리나라에선 잘 잡히지 않는 곤들매기 종류. 중요한 건 낚시할 때 곰을 쫓는 방울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움직일 때마다 ‘딸랑딸랑’ 소리가 나는 이 방울은 주로 낚시 전문점이나 관광 기념품점에서 살 수 있는데, 현지인이 허리춤에 하나씩 차고 낚시를 하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사진가 신효정
“길 위에서 인생을 생각합니다”

결혼을 하면 어떤 신혼여행을 떠날까 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 패키지 상품은 곧 죽어도 싫었다. 새로운 곳, 우리만의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곳. 그래서 선택한 것이 차마고도 트레킹이었고, 그 중간에 만난 곳이 중국 윈난 성 석두성 마을이다. 석두성은 중국 윈난 성 리장에서도 동북쪽으로 120km나 떨어진 오지. 히말라야 산맥의 일부인 옥룡설산을 지나 진사 강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암석 마을이다. 그만큼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최대한 차로 진입할 수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 멀리 석두성 마을이 거대한 산과 협곡 사이에 요새처럼 솟아 있었다. 약 1km 정도의 굽이진 길을 다시 내려가서야 마을 입구에 겨우 도착했다. 순간 시곗바늘이 빠르게 되돌아간 듯 과거에 서 있었다. 산위에 끝없이 펼쳐진 계단식 밭과 기와지붕, 병풍처럼 둘러싼 산들, 외세의 침략을 피해 바위산을 깎아 만든 고달픈 역사가 이토록 아름다운 마을이 되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차는 물론 그 흔한 오토바이도 볼 수 없었다. 오직 말이나 나귀로 짐을 실어 옮기고 자신보다 큰 짐을 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집 안에는 돼지와 말, 닭 등 가축과 함께 살아가고 먹을거리도 모두 직접 재배한 농작물이다. 해가 지면 해발 1700m의 깊은 산속에 정적만 남고 잠이 든다. 이런 적막이 얼마 만인가! 해가 뜨면 창 문 너머로 보이는 계단 밭에 붉은색 태양이 드리워져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했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나 홀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단 하나뿐인 학교에 가서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간 학용품을 전달했다. 우리에겐 그 흔한 연필 한 자루가 석두성의 아이들에겐 보물처럼 소중한 선물이다. 아이들과 구슬치기 놀이도 하고 마을 청년들의 유일한 놀이터인 당구장(말이 당구장이지 헛간에 당구대 한 개 덜렁 놓인)도 구경하고, 마을 어르신들과 담소도 나누었다. 마을을 떠나던 날 다시 우리는 가파른 산을 힘겹게 오르며 몇 번이고 마을을 뒤돌아보았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도시 부부에게 그곳의 시간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두 번째 인생인 결혼 후의 삶을 말이다.


북유럽 문화원 부원장 김희진
“휘게hygge한 시간을 보냈어요” 

결혼하고 2개월 후에 덴마크로 출장 겸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상사이던 예패와 그의 부인 피아가 나를 그들의 집으로 초대했다. 인형같이 생긴 두 딸은 마당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첫째 딸 프리다는 마당에 놓인 트램펄린에서 뛰놀고, 돌이 갓 지난 둘째 루나는 의자에 서서 언니를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노는 동안 피아는 직접 빵을 굽고 정성 가득한 홈메이드 음식을 만들었다. 집 앞 사과나무에서 바로 열매를 따서 만든 홈메이드 애플파이는 이전에 맛본 어떤 디저트보다도 맛있었다. 서로 존중하고 격려하는 이 가정을 보노라면 언제나 마음이 따뜻하다. 촛불 아래서 우리는 추억을 곱씹고 일상을 나눴다. 여행 중 최고의 휴식이며 특별한 시간이었다. 긴긴 겨울밤을 견디기 위해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촛불 아래서 이야기하며 보내는 은은하고 아늑한 상태를 덴마크 사람들은 ‘휘게hygge’라고 한다. 집주인에게 오늘 ‘휘게한 시간’을 보냈다고 얘기하는 것은 최고의 칭찬이기도 하다. 


행복> 문화교양팀 기자 신진주 
“이런 경험을 컬처 쇼크라고 합니다” 

잦은 해외 출장과 넘치는 호기심으로 호기롭고 발칙한 문화를 온몸으로 흡수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고 거드름을 부렸다. 하지만 독일 쾰른에서 경험한 혼탕 사우나에서는 달랐다. 생애 가장 부끄럽고 충격적 사건의 일말은 이렇다. 라인 강변에 위치한 클라우디우스 테르메는 주변 도시에서 찾아올 만큼 쾰른의 대표 사우나. 온수의 실내ㆍ외 수영장과 방갈로 사우나, 수면실과 스파 프로그램, 고급 레스토랑과 야외 선탠 테라스, 태닝 스튜디오 등 규모가 꽤 큰 복합 스파 센터다. 남녀 공용 탈의실에서 사람들은 홀딱 벗은 채로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말리고, 마주 앉아 수다를 떨었다. 손주와 할아버지도 있었고, 젊은 연인도 있었으며, 단체로 온 친구들도 있었다. 벌거벗은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은 방갈로 스팀 사우나. 공간은 협소하지만 조도가 낮고 스팀이 가득해 그나마 몸이 드러나지 않는다. 백인 아저씨 두 명이 앉아 있었고, 흑인 여성 한 명이 수건을 펼치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하나 둘씩 모이는 사람들…. 허브, 꿀, 장미 등 다양한 재료의 아로마 스팀을 제공하는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방갈로 안으로 모여드는 것. 사람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일렬종대로 자리를 잡고 허리에 수건을 두른 직원이 시간에 맞춰 양동이를 들고 방갈로 안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달아오른 돌 위에 재료를 부었다. 방갈로 안은 뜨거운 아로마 스팀으로 가득 채워졌고, 사람들은 짧은 탄식과 함께 땀을 쏟아냈다. 직원은 사람들이 골고루 스팀을 쐴 수 있도록 노련한 팔 놀림으로 수건을 펄럭거리며 스팀을 분산시켜주었다. 마치 고귀한 의식을 치르는 종교 행사처럼 느껴진 침묵의 시간. 한 번의 스팀 쇼(?)가 끝나면 얼음과자를 돌리며 나눠 먹는 것도 흥미로웠다. 견딜 수 없는 고온의 압박에 뛰쳐나오고 말았지만…. 야외에서 가운을 입고 다닐 수도 있으니 한번 도전해보라. 라인 강변에서 나체로 선탠을 즐기며 낮잠을 즐길 수 있는 합법적이고 이색적인 여행이니까. 


여행 칼럼니스트 노중훈
“핀란드의 음식은 재료 맛이라니까요”

핀란드 헬싱키에서 서쪽으로 약 80km 지점에 위치한 대저택 스바르타 마노르. 우선 장원莊園이란 뜻의 ‘마노르manor’가 말해주듯 건물을 둘러싼 부지의 규모가 실로 엄청났다. 스바르타 마노르에는 2백 년을 훌쩍 넘는 긴 세월이 쌓여 있다. 노란색 메인 건물은 1792년에 지었는데, 첫 삽을 뜨고 완공하기까지 10년이나 걸렸다.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스바르타 마노르 내부에는 소유주인 린더 가문의 역사와 당시 상류사회의 화려한 생활상이 꼼꼼하게 전시돼 있다. 투숙 객의 입맛을 책임지는 레스토랑에서는 싱싱한 지역 식재료를 고집한다. 스바르타 마노르의 셰프들이 마련한 쿠킹 클래스에 참여했다. 건물 2층에 조성한, 다락방처럼 생긴 부엌이 사랑스러웠다. 오늘의 주재료는 송어와 양고기. 세 조로 나눠 직접 고기를 손질하고 생선을 굽고 디저트인 푸딩을 준비했다. 잘 벼린 칼로 뼈와 지방을 제거한 양고기는 로즈메리 소스를 넉넉하게 두른 프라이팬에서 지글지글 익어갔다. 생동감이 넘치는 소리였다. 오븐에서 맞춤하게 익은 송어에는 새끼손톱만 하게 깎은 오이가 올라갔고, 버터밀크 푸딩에는 설탕에 절인 루밥이 들어갔다. 세 가지 음식 모두 레시피가 간단했고, 조리 과정이 단순했으며, 데커레이션 또한 별다른 게 없었다. 음식을 치장하는 것보다 재료의 신선함을 살리는 게 중요해 보였다. 핀란드 음식은 손맛, 칼 맛, 불 맛이 아니라 재료 맛이었다.


GEOCM 이한나
“샤토에서 경험한 다정한 마음을 추억합니다”

부다페스트에서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 바다같이 넓은 벌러톤 호수를 빙 둘러 헤비즈에 도착했다. 마을을 산책하다가 직접 키운 체리며 과일을 수레에 그득그득 싣고 파는 샤토로 들어가니 마당 한편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와인을 즐기고 있었다. 산타클로스같이 생긴 주인아저씨가 낯선 동양인 여자에게 마시던 와인을 한 잔씩 권했다. 주인아저씨의 두 딸이 통역을 자처하며 함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흐뭇해하며 먹을거리를 내왔고 나는 어느새 아저씨네 가족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헤비즈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아침이면 온천욕을 즐기고 점심이면 아저씨네 샤토로 달려가 해가 저물도록 시골 와인과 헝가리 가정집 음식을 먹고 마셨다. 저녁에 호텔로 돌아가는 내게 아저씨는 어김없이 체리며, 호두를 바리바리 싸주었다. 마치 진짜 아빠처럼…. 호텔 테라스에 누워서 바라본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은 아직도 마음속에 생생하다. 그저 자연 호수 온천이 궁금해서 이곳까지 왔지만, 헤비즈는 매순간 휴식이고 치료였다. 헤비즈는 치료의 물이라는 뜻이란다. 관광객을 ‘돈이 아니라 찾아와주는 고마운 이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헤비즈의 멈춘 시간은 일상에서 조금은 천천히 달려도 좋다는 처방 같다.


트랙터 여행가 강기태
“위기에 처한 여행자를 도웁시다”

터키 서부 국경도시 에디르네에서 동부 국경도시 이그디르까지, 약 1만km에 달하는 길을 터키 트랙터로 일주한 지 19일이 지났을 즈음이다. 산길을 따라 시속 20km로 트랙터를 몰았지만 자동차 한 대,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했다. 그 길 한가운데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의 옆에는 트럭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아마도 큰 문제가 생긴 모양인데,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운전사가 부품 하나를 가져왔다. 5cm 남짓한 모래시계 모양의 부품이 부서진 듯했다. 일단 사진을 찍었다. 마을에 도착하면 사람들에게 물어보겠다고 온몸으로 대화했다. 사루한르라는 아주 작은 마을까지의 거리도 15km. 트랙터로 주행하기에 상당히 먼 거리. 시속 30km의 최대 속력으로 달려도 왕복하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리고 마을에서 부품을 찾을 수 있을지 확신도 없는 상태였다. 정말 도망가고 싶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트럭 한 대가 보였다. 사진을 보여주었지만, 20km 더 떨어진 큰 마을에서 구할 수 있단다. 두 번째 트럭이 보였다. 없단다.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니는 그때, ‘푸식푸식’ 소리를 내며 언덕을 기어오는 세 번째 트럭이 보였다.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한참 동안 상자를 헤집더니, 일련번호도 똑같은 것을 웃으며 나에게 건네준다. 나는 너무 신이 나서 다시 전속력으로 달렸다. 트럭 운전사는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한껏 기대를 머금고 부품을 끼워 넣었다. “터키 그리고 한국은 형제의 나라다.” 온 산속이 울릴 듯 외친 그 한마디. 위기에 처한 여행자는 반드시 도와주라는 여행자의 법칙을 지킨 오늘, 트랙터는 이 세상 최고로 빠른 나의 친구이자 나의 형제였다.


디자이너 민지홍&nbsp
“훈자 유목민은 지금 어디쯤 있을까?”

파키스탄 훈자의 4월, 따뜻한 봄일 것이란 생각과 달리 너무 추웠다. 마을을 앞뒤로 둘러싼 산들은 해발 7000~8000m로 위협적이었고, 눈에 띄는 사람도 없었다. 숙소 앞 웅장한 계곡 근처에는 텐트 두 개를 설치하고 오랫동안 캠핑을 하는 여행자가 있었다. 늘 궁금하던 텐트 바로 옆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그건 캠핑 여행자의 텐트가 아니었다.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이들의 움막이었다. 가장으로 보이는 어른이 아기를 안고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러곤 마치 반가운 친구가 온 것처럼 직접 튀긴 과자와 차이chai(파키스탄식 밀크티)를 대접하는 것이 아닌가. 내 또래의 젊은 친구들과 갓난아기 등 열 명의 가족이 옹기종기 움막 안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순박한 표정과 호기심 어린 눈빛, 이방인에게 마음을 열고 베푸는 호의 앞에서 곧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계곡에서 금을 캐는 유목민이었다. 그 이후로도 두 번이나 우연히 만났다. 어떻게든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작아서 입지 않는 스웨터를 선물로 주었다. 고마움을 표현하던 유목민 아빠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훈자와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다. 유목민 가족은 어느 순간 인사도 없이 마을을 떠났다. 지금은 어디쯤 있을까?


 여행 매거진 <론니 플래닛> 기자 심지아
“부족하고, 불편하고, 느렸지만 진짜 여행!”

출장을 많이 다니는 편이기에 개인적인 휴가를 떠날 땐 조금은 고생스러운 여행을 자처한다. 큰맘 먹고 계획한 것이 베트남 자전거 여행. 3일 동안 자전거만으로 메콩 강 삼각주 일대를 돌아보고 호찌민으로 돌아오는 리얼 자전거 여행이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도로를 달리기 때문에 현지 자전거 투어 전문 업체를 이용했다. 우리 일행은 나와 직업이 같은 영국인 여성, 필리핀 여성 그리고 베트남인 현지 가이드 이렇게 넷. 자전거 여행 루트는 호찌민에서 약 70km 거리에 있는 벤째Bên Tre와 그곳에서 또 50km 거리인 짜온Traon을 지나 다시 호찌민으로 이어졌다. 험난했다. 연신 경적을 울리는 오토바이와 차량의 홍수는 우리를 끊임없이 가로막았고, 거대한 대교를 부실한 두 허벅지의 힘으로 오르는 건 쉽지 않았다. 땀은 비 오듯 흐르고, 바람은 미적지근했다. 자칫 체인이라도 풀리면 두 손은 찐득한 기름 범벅이 되기 일쑤. 뭔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머릿 속을 지배할 즈음 주변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길은 자전거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만큼 좁지만 사방으로 탐스러운 열매가 달린 코코넛 농장이 펼쳐졌고, 반개방형 가옥에선 베트남 사람들이 미소와 인사를 던졌다. 코코넛을 따던 인부들이 마침 목이 마르던 우리에게 코코넛을 건넸고, 두리안으로 사탕을 만드는 작업장에선 그 귀한 열매를 한 움큼 손에 쥐여줬다. 예고도 없이 소나기가 쏟아질 때면 마을 구멍가게에 들어가 할머니가 타주는 연유를 듬뿍 넣은 달달한 커피와 갓 쪄낸 바나나를 먹으며 비가 그칠 때까지 휴식을 취했다. 소박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현지인처럼 해먹에서 낮잠도 잤다. 자전거 여행은 베트남의 진짜 속살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지나가는 여정이었다. 온종일 페달을 밟아 노곤해진 몸을 누이려 팜스테이(현지인 농가 숙박) 숙소에 들어섰다. 세상에 나온 지 채 한 달도 안 된 갓난아기가 있던 가족은 안방을 우리에게 기꺼이 내주고, 뜰에서 따온 채소로 샐러드를 만들어 대접해주었다. 그다음 시원하게 트인 부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베트남식 딤섬인 쩌조 만드는 법을 배우고 그걸 직접 튀겨서 저녁 식탁에 올렸다. 가로등 하나 없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 딱딱한 나무 침상에 가족이 쓰던 낡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천장에서 늘어뜨린 여기저기 구멍 난 모기장을 바라보며 이것이야말로 진짜 여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구성 신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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