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판에서 비슷한 그림을 빨리 찾아내는 단순한 규칙과 아름다운 컬러 때문에 온 가족의 사랑을 받는 보드게임, 르 링스.
전통적으로 파티 문화가 발달한 프랑스인에게 보드게임은 엄마의 엄마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즐겨온 사교 문화의 일부로, 대부분의 프랑스 가정이 저마다 즐기는 보드게임이 몇 가지씩은 있다. 오랜 전통이 있는 클래식 보드게임을 비롯해 해마다 올해의 게임을 선정하는 최신 게임, 유럽과 미국의 상류층이 선호하는 마작 등을 사교 모임에서 자주 즐긴다. 멋스러운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나누어 들고 이야기를 짓거나 낱말을 맞히는 게임도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인기다. 남자끼리 모이면 유년 시절에 즐겨 하던 클래식한 전쟁 놀이를 하기도 한다.
이런 문화는 외국에서 사는 프랑스인의 일상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한 한불 부인회의 회원들도 모이면 유럽식 마작 같은 보드게임을 즐겨 하고, 낱말 맞히기 게임을 하러 오라고 한국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프랑스 학교의 학부모들이 한집에 모일 때면 아이들은 저희끼리 좋아하는 게임을 하도록 하고 엄마들은 그들만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처럼 보드게임은 프랑스인에게 어려서부터 사람과 어울리고 대화하는 법을 익히는 즐거운 생활 문화다.
부모가 자녀에게 알려주는 게임 문화
“저희 어머니도 어릴 때 보드게임을 했고, 저도 다섯 살부터 보드게임을 한 기억이 남아 있어요. 형제들이 성장하면 그 시기에 맞는 것을 부모님이 사주셨죠. 어른이 되어서도 친구나 가족끼리 모이면 단어 맞히기 같은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답니다.”
“제 아내 샤를로트는 파리에서 자랐고 저는 지방 도시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이웃을 집으로 초대해 카드 게임과 보드게임을 자주 하던 유년 시절의 추억이 있지요. 프랑스에서는 날씨가 추워서 야외 활동을 하기 어려운 겨울이나 비가 오는 날, 혹은 하루 일과를 마쳤을 때 가족과 이웃끼리, 친구끼리 이런 놀이를 많이 합니다. 아버지가 ‘얘들아, 모여서 게임을 하자’라고 말하면 자연스럽게 놀이가 시작되지요.”
프랑스 제약 회사인 사노피 파스퇴르사의 레지스 로네 한국 지사장은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부인 샤를로트와 결혼한 후 프랑스, 멕시코, 터키를 거쳐 6개월 전 한국 지사로 부임했다. 쌍둥이 아들인 사무엘과 자크를 낳고 마리용과 클라라 자매까지 얻은 이 부부가 네 자녀와 함께 세계 각지로 이사할 때 가장 중요하게 챙기는 짐은 다름 아닌 ‘보드게임’. 지금도 한남동 주택의 거실 벽장을 가득 메운 보드게임은 그 부속물을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봐 세심하게 포장해서 모시고 온 가족의 귀중품이다.
“일주일에 최소 두 번 이상 온 가족이 모여서 보드게임을 합니다. 아이들끼리는 수시로 하지요. 저는 업무 때문에 바빠서 아무래도 아내보다는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이 부족한 편이에요. 그런데 보드게임을 할 때는 아이들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어서 오히려 저한테 좋은 시간이지요.” “저는 네 살 때부터 모노폴리 게임을 했어요. 요즘에는 제 쌍둥이 형제인 자크와 아주 근사한 호텔을 짓는 게임인 호텔 딜럭스를 가장 많이 하는데 정말 재미있어요. 손님이 많이 올수록 돈을 더 많이 벌어서 다른 곳에도 호텔을 지을 수 있는 게임이에요.”
“처음에는 엄마 아빠한테 게임하는 법을 배웠지만 나중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과도 함께 게임을 하면서 배웠어요. 글씨를 읽을 수 있으니 아홉 살부터는 스크러블이라는 낱말 게임도 할 수 있어요. 이 게임은 할아버지와 엄마가 제일 잘해요. 특히 우리 엄마는 단어 최고 왕이에요.”
가족 여섯 명이 모여앉은 거실에서 보드게임 이야기를 꺼내니 그림 카드 놀이처럼 이야기가 마르지 않고 피어난다. 아이들은 생일 선물로 보드게임을 받거나 자기가 원하는 게임을 사달라고 부모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프랑스를 떠나 멕시코와 터키에 살면서는 인터넷으로 아이들 나이에 맞는 게임을 알아보고 구입했다. 자신도 각종 보드게임을 하며 자랐고 자녀를 다 성장시켜 손주도 여러 명 본 인생 선배인 샤를로트의 친정어머니는 인터넷보다 더 훌륭한 보드게임 정보의 원천이다. 클래식 게임부터 최신 제품까지 손주들의 나이에 맞는 보드게임 정보를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수시로 전해온다. 이처럼 보드게임은 프랑스인에게 성장기의 놀이 문화이자 노년까지 즐기는 사교 문화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해마다 올해의 보드게임을 선정하고 각종 세계 대회를 개최할 만큼 범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다.
일요일 저녁, 거실에서 두 아들이 요즘 가장 좋아하는 게임인 ‘딜럭스 호텔’를 함께 즐기는 레지스 로네 지사장 가족.
사교의 기술, 게임으로 배운다
“인터넷 때문에 요즘은 프랑스에서도 함께 모여서 보드게임을 하며 노는 문화가 예전보다는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가족이 이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가족이 모여서 식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모든 연령대의 가족이 무언가를 다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성장기 아이들에게 중요한 교육이지요. 놀이를 할 때는 대부분의 사람이 신경이 이완되기 때문에 서로 관심을 가져줍니다. ‘그거 해봤어? 어땠어?’ 하고 묻고 답하면서 자연스레 서로에 대한 정보를 얻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지요.”
그뿐 아니라 엄마 입장에서는 함께 보드게임을 하는 동안 네 자녀의 성향과 관심을 알게 된다는것도 장점이다. 아이들이 함께 보드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부모가 함께 하면서 ‘이 아이는 이런 점을 보완해주어야겠구나’ ‘이 나이에는 이런 교육이 필요하구나’ 하며 자녀 교육에서 무엇이 부족하고 필요한지를 수시로 파악할 수 있다고 아내 샤를로트는 설명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이웃을 초대해 보드게임을 하던 모습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레지스 로네 지사장은 자녀에게도 자신과 비슷한 유년 시절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 흡족하다. 가족이 함께 웃고 즐기는 장면과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 당시의 느낌 등이 이 아이들에게 유년 시절 기억으로 평생 남아 있을 게 아닌가. 막내는 아주 어려운 보드게임에서 이겼을 때의 성취감을 마음에 보석처럼 품게 될 것이고, 다른 가족들은 “세상에, 네가 세 살 때 그 게임에서 이겼잖아!”와 같은 훗날 이야기할 거리를 간직하게 될 테니 보드게임은 야외 활동 못지않게 다채로운 추억을 가족에게 선물한다. “지금까지 한 게임 중에서 가장 재미있던 거요? 지난번에 오랜만에 프랑스에 갔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과 이모, 사촌들이 다 모였어요. 식사 후에 팀을 짜서 낱말 맞히기를 하며 놀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요.”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일요일 저녁 시간, 레지스 로네 지사장 가족은 르 링스Le Lynx 게임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물이 그려진 그림판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집중하고 관찰해 같은 그림을 찾아내는 이 순발력 게임은 아직 글씨를 모르는 마리용과 클라라도 같이 할 수 있어서 이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게임이다. 자신이 생각한 단어를 간단한 그림으로 그려 상대가 맞히도록 하는 게임, 카드를 뽑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임 등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다 같이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임은 얼마든지 있다. 프랑스인이 누구하고든 서슴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파티를 즐기는 사교의 기술은 이처럼 어린 시절에 하는 보드게임으로 시작해 평생 반복하는 놀이 문화로 학습된다. 그 즐거운 평생이 모여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니 사회는 자유롭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유머가 넘친다. 그들이 생각하는 진짜 멋은 이런 것이다.
- 레지스 로네 사노피 파스퇴르 한국 지사장 가족 "보드게임은 프랑스 가족의 놀이 문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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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쥐 같은 아이들이 우르르 학교로 달려간 오전 시간, 한국에 사는 프랑스 부인들이 한집에 모인다. 햇살이 드는 거실에서 집주인이 향이 부드러운 커피를 내오자 마주 앉은 부인들이 낱말 맞히기 카드와 화려한 컬러가 멋스러운 보드판을 펼친다. “굉장히 크고 당신의 머리 위에 있어요”라며 단어를 맞히는 동안 패를 가진 사람의 요즘 생각과 관심, 근황을 알게 된다. 질문이 오가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아 한참 동안 이어지는 편안한 대화. 프랑스인이 사교하는 일상적 모습이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