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큰딸도 글씨를 잘 모르는 막내도, 논리적 사고가 발달한 부모도 윷을 던지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신나게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우리 전통 보드게임, 윷놀이.
“저는 경남 진주에서 자랐는데 공기놀이, 술래잡기, 사방치기 등 친구들과 안 해본 놀이가 없어요. 또 설이 되면 대가족이 편을 나눠 윷놀이를 했어요. 신나게 놀다가 해가 지고 어른들이 ‘이제 음식을 준비할 테니 너희는 장기 자랑을 준비하라’고 하시면 우리끼리 재빠르게 연습해 술상과 간식이 차려진 마당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박수 치며 가족 잔치를 벌였지요.”
“어머니가 시장에서 가게를 하셨어요. 명절마다 주변 상인들이 시장 한편 모닥불 앞에 모여 윷놀이를 하던 기억이 잊히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름이 깊은 어른도 모처럼 들뜬 마음으로 윷가락을 던지며 흥을 내던 모습에서 어린 제 마음에도 인생의 희로애락 같은 것이 느껴진 것 같아요.”
온 가족의 취미 생활, 윷놀이
개웅초등학교의 교사이자 제7회 올해의 과학 교사로 선정되기도 한 박상민 교사와 그의 아내 류현미 씨. 도시에서 자란 남편과 시골에서 자란 아내는 설날 윷놀이를 비롯한 여러 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레 사람과 어울리는 법, 상대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하지만 두 딸을 낳아 길러보니, ‘잘 놀아야 잘 배우고 잘 자란다’는 부모의 옛 가르침을 아이에게 알려줄 기회와 방법이 요즘 사회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초등학생도 학원에 다니느라 바쁘고 가족이 거실에 모여도 각자 컴퓨터와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느라 두 눈을 마주치고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놀이를 찾기가 쉽지 않은 세상 아닌가.
“가족이 윷놀이를 하고 놀면서 많은 것을 저절로 배우던 놀이 문화를 아이에게도 전해주고 싶어서, 우리 가족은 첫째 유민이가 세 살이 되던 해부터 함께 보드게임을 하기 시작했어요.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서 수준 높은 단계를 원하면 나이에 맞는 놀이 도구를 또 찾아주었지요.” 아빠가 퇴근한 후 일주일에 두세 번씩 네 가족이 둘러앉아 보드게임을 하는 것은 유민이 자매에게 평범한 일상. 저녁 식사와 목욕을 마치고 엄마와 동생과 셋이 식탁에 앉아 보드게임을 하거나 요즘처럼 추운 때는 내복을 입고 따뜻한 이불 위에서 하기도 한다. 초등학생 언니가 동생과 함께 게임을 할 때는 윷놀이처럼 규칙이 단순하고 게임이 끝날 때까지 쫓고 쫓기는 번복의 여지가 많은 게임을 해야 두 사람 모두 신난다. “윷놀이는 규칙이 단순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할 수 있고 윷을 던지는 신체 활동을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기회도 제공해요. 기술적으로 윷을 던지는 방법을 깨우치면 아이들이 성취감을 느끼지요. 또한 승자가 결정될 때까지 판세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많아서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는 좋은 게임입니다.”
네 가족이 다 같이 할 때는 윷놀이 외에도 아름다운 그림 카드를 보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딕싯’, 힌트를 주고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읽도록 도와주는 ‘컨셉트’, 여러 개의 숫자 패를 맞히는 논리 게임으로 세계 대회도 열리는 ‘루미큐브’, 카드를 보고 비슷한 그림을 재빠르게 골라내야 하는 ‘셋’ 등 그날의 기분에 따라 아이들이 집 안 보물 창고에서 직접 게임을 고른다.
“카드를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게임은 처음 만난 사람끼리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해주고, 친한 사람끼리는 굳이 날을 잡지 않아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게 합니다. 이처럼 공감하고 소통하는 게임이라서 어른과 아이, 또래 아이들끼리, 학부모들끼리 해도 좋아요. 특히 엄마와 아이는 이 게임을 하면서 경계 없이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어요.” 또한 아이가 혹여 기가 죽거나 뜻하지 않은 좌절감을 경험한 날에 보드게임을 하면 놀이를 통해 아이를 자연스럽게 응원하고 게임에서 이기는 성취감을 되찾게 해주니 류현미 씨는 보드게임이 부모와 자녀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끊임없이 소통하는 데 더 없이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과학 교사인 아빠의 생각은 어떠할까?
가족이 함께 놀이하는 것이 일상인 박상민 교사 가족.
놀이는 가족 소통의 도구
“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은 요즘 ‘보드게임이 없다면 아이들이 나한테 다가올 일이 적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빠를 이길 수 있는 게임을 발견하거나, 아빠와 꼭 하고 싶은 게임이 있을 때 현관을 들어서는 저에게 달려와 ‘아빠, 이 게임 해봐요’라고 말을 겁니다. 이 기회는 제가 아이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면서 나이가 더 들어서 아이들이 더 이상 아빠와 이야기하기 싫은 순간이 왔을 때 즐거운 옛 시간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열게 하는 열쇠가 되겠지요.”
논리와 전략에 능한 부모를 따라잡지 못해 논리형 보드게임에서 늘 지던 자매는 몇 년 전부터 부모를 앞서기 시작했다. 부모는 아이의 이러한 놀라운 성장을 직접 확인하며 경이로움을 느낀다. 예를 들어 멘사 추천 게임이기도 한 ‘셋’은 패턴을 재빨리 분석하고 이해해서 규칙에 맞는 카드를 골라내는 방식인데 게임을 구입한 초창기에는 아빠가 늘 이겼지만 2년이 지나면서 아이들에게 지기 시작해 최근에는 아무리 머리를 써도 단 한 번도 두 딸을 이기지 못했다.
“폭발적으로 발달하는 아이의 공간지각력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제가 이 게임을 기피해요. 늘 지니까요. 얼마 전에는 아이가 유령대소동이라는 게임을 제게 가르쳐주었어요. 카드에 있는 물체의 모양과 색깔을 파악한 후, 부속품 중에서 그 카드에 나와 있지 않은 모양과 색깔만 빨리 골라내는 게임인데, 이걸 하면 또 아빠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아이가 이미 느꼈죠. 어른의 뇌는 주어진 조건을 맞추는 데 익숙해져서 이 게임처럼 조건에 반대되는 것을 찾는 건 굉장히 낯설고 어렵습니다. 이런 게임을 통해 아이는 어른을 이기는 특별한 성취감도 경험하지요.” 한글과 분수, 경제 개념과 사회 문화까지 보드게임은 아이들을 굳이 학원에 보내지 않아도 많은 것을 알려주는 교육 도구로서도 충실한 역할을 해왔다. 박상민 교사 부부가 그중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공동체’와 ‘규칙 준수’에 대한 자연스러운 이해와 배움이다.
보드게임, 공동체와 규칙을 배우는 교과서
“보드게임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해야 하지요. 순서를 기다리면서 규칙을 배우고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먼저 규칙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건강한 준법 정신을 체득하게 됩니다. 특히 ‘컨셉트’ 같은 윈윈 게임은 자신이 좋은 점수를 얻으려면 상대가 잘 맞히도록 도와주어야 하니 상대를 이끄는 리더십과 배려, 원활한 의사소통 방식까지 자연스럽게 개발되지요.” 건강한 놀이 문화가 사라진 시대에 재미와 교육을 모두 만족시키는 이 가족의 취미 생활을 엿본 지인은 자녀의 나이와 가족의 정서에 맞는 보드게임을 류현미 씨에게 추천받기도 한다. 이런 가족이 실력이 출중해진 후에 유민이네 집에 다시 놀러오면 비등비등한 상대끼리 겨루며 보드게임은 한층 더 흥미진진해진다. “아이와 어른이 모두 보드게임을 통해 정서, 인성, 융합 교육을 할 수 있지만, 게임 자체의 본질적 가치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누구에게나 즐거움을 줘야 좋은 게임이에요. 우리나라의 전통 보드게임인 윷놀이처럼 말이지요. 또한 이 즐거움과 교육적 가치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균형을 잘 이룬 것이 좋은 보드게임이고요.”
보드게임이 이 가족에게 준 선물은 ‘균형’이라는 단어로도 설명된다. 유민이와 유휘도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한다. 하지만 또래 친구들이 디지털 기기에 많은 시간을 쓰는 데 비해 유민이와 유휘는 컴퓨터, 보드게임, 독서를 하는 시간의 비율이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 큰 차이. 이 황금 비율은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또 다른 재미를 부모가 시의 적절하게 찾아준 결과다. 재미있는 일은 더 하고 재미없는 일은 덜 하는 게 사람의 본능 아니던가. 보드게임의 장점은 이처럼 입체적이고 기대 이상으로 풍성하다. 이 점이 바로 보드게임이 전 세계 가족에게 취미 생활로 사랑받는 이유다.
스타일링 박경섭
- 개웅초등학교 박상민 교사 가족 "윷놀이하듯 가족과 보드게임을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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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오후의 시골집 마당.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들과 외삼촌들, 키가 고만고만한 또래 사촌까지 대가족이 모여 멍석 위에 윷을 던진다. “윷 나와라, 모 나와라!” 여섯 살배기 막냇동생이 토끼처럼 깡총거리는 모습에 배를 잡고 웃던 온 가족이 윷판의 말이 움직이자 웅성웅성 수군수군 상대편 몰래 이길 전략을 모색한다. 우리 팀의 말을 움직일 전략가는 할머니, 상대팀은 얼마 전 대학생이 된 눈치 빠른 사촌 오빠를 좌장으로 내세웠다. 엎치락뒤치락 잡고 잡히고 물리고 버티면서 다 같이 신이 나 해 지는 줄도 모르던 설날 오후, 윷놀이라는 보드게임을 즐기던 우리의 추억.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