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증맞게 다문 입술은 금방이라도 오물거리며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어린양의 말간 눈빛과 수줍게 모은 다리 곡선은 우아하다. 양을 감싼 금속 장식과 나무 액자는 뮤지엄 유리관 안에 있는 작품처럼 양을 고귀한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 <행복> 신년호 표지 작품인 서예슬 작가의 ‘순수의 표상’(브로치ㆍ오브제ㆍ펠트ㆍ황동ㆍ우레탄ㆍ폴리머 클레이ㆍ인조 안구, 75×140×55mm)은 막 이 세상에 나온, 절대적 순수함을 지닌 태초의 생명 같다.
“양은 제 상상 속에서 발현된 모습이에요. 인간의 영역에 들어서지 않은 온전한 자연, 생명의 가장 첫 번째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유토피아적 시선이 녹아든 작품입니다. 그래서 색사용을 최대한 절제했어요.” 양모 펠트 실을 꾹꾹 눌러 담아 완성한 형태는 아주 사실적이다. 몸의 곡선에 따라 사용한 색의 변화가 무척 섬세해 실제 존재하는 동물의 미니어처 같다. 작가의 평창동 작업실에는 북극곰, 미어캣, 올빼미, 토끼, 기린, 말, 돼지 등 일련의 동물을 소재로 만든 이런 펠트 아트가 벽면과 선반을 장식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동물을 둘러싼 금속 장식과 나무 프레임. 동물의 두상을 프레임 안에서 장식하는 방식은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조형적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박제나 영정 사진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인간이 원하는 동물의 세상
“사람들이 제 작품을 처음 볼 때는 예쁘고 화려한 모습만 봅니다. 하지만 프레임 이면에 담긴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곤 해요. 동물은 실제로 인간이 원하는 모습으로만 꾸민 무척 장식적인 형태거든요. 동물이 원하는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데,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본래 모습을 상실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화려한 금속장식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초기 작업은 지금과 달리 모노톤의 무거운 분위기였어요. 설명적이고 직접적 메시지가 강했죠.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면서 친근하고 다정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말을 거는 것이 훨씬 저다운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러한 그의 의도가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대표 작품이 ‘The living thing_Pig’다. 프레임 중심에 동물 두상을 배치하는 구성은 동일하지만, 돼지가 묻혀 있는 재질이 콘크리트인 것. 구제역으로 수많은 가축이 생매장당하는 모습을 보고 작업했다. 돼지의 피부는 폴리머 클레이polymerclay를 사용해 펠트보다 피부 표현이 훨씬 사실적이지만, 그래서 불편하게 보이기도 한다. 살찐 돼지에 사슴뿔을 교배한 ‘Deer Pig’, 사탕 상아가 달린 코끼리를 만든 ‘Candy-flavored Elephant’, 철창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우는 원숭이를 묘사한 ‘A monkey in the Cage’ 등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이기심과 도덕적 딜레마를 표현했다.
동물의 본래 모습을 존중하는 마음
어린 시절부터 지나칠 정도로 동물을 좋아했다는 서예슬 작가에게 동물은 언제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친근한 반려 동물보다 좀 더 자연과 야생에 가까운 동물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형태 표현에 집중하기 때문에 영상 자료와 사진을 많이 살펴보는데,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 동물 하나하나가 개별적 자아로 존재한다는 점이에요. 생김새가 비슷해 보이지만 눈, 코, 입 모두 제각각이죠. 제작업은 동물을 하나의 개체, 즉 존중해야 할 생명체로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서예슬 작가는 동물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소재가 펠트라고 생각했고, 금속의 차갑고 서늘한 물성을 따뜻한 정서의 펠트가 보완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예술 장신구를 완성했다. “장미 가시처럼 돌기가 있는 바늘을 이용해 양모 펠트 실을 서로 엉기게 만듭니다. 오래 누를수록 더욱 단단하고 끈끈한 몸통이 되지요. 모자라면 실을 더 붙이고, 과하면 자르면 됩니다. 덧붙이고 잘라내면서 한 몸을 만든다는 점에서 찰흙과 흡사해요.” 펠트로 동물의 피부 톤이나 형태에 맞춰 디테일을 표현할 때는 2~3주간 온종일 꼼짝할 수 없을 만큼 고된 노동이 필요하다. “기회가 되면 제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동물을 만들고 싶어요. 특히 말이나 사자 같은 장모長毛 종 동물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직 부족한데, 계속 연구해나갈 계획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동물의 권리를 찾아주는 운동에 동참하고 싶어요. 관심 분야가 동물인 만큼 꾸준하게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을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짐승들의 침묵>의 저자이자 프랑스 철학가 엘리자베스 드 퐁트네는 우리가 반드시 동물을 사랑할 필요는 없지만, 배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동물에게서 발견하는 놀라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서예슬 작가의 작품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동물을 인간과 ‘비교’하지 말고, ‘파악’하려 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