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탕지옥처럼 불이 혀를 날름거리는 가마 안. 흙과 물, 불과 공기가 서로 몸을 섞으면 1000℃ 넘는 불길 속에서 피가 도는 목숨이 태어난다. 모든 사물이 소멸하는 불 속에서 유일하게 탄생한 목숨. 마침내 망생이 가마(구운 흙벽돌로 만든 전통 가마)가 열리고 시커먼 구멍에서 ‘순풍’ 아이 나오듯 달항아리가 하나 나오면 도예가는 갓난애처럼 품어 안고 연신 어루만진다. 1300℃의 장작불처럼 자신을 태워 무無의 세계로 돌아가버릴 듯한 기세이던 도예가는 잘 익은 목숨 하나 어루만지며 그제야 큰 숨을 내쉰다.
보드라운 초생아 같기도, 달동네 어귀까지 구석구석 밝혀주는 만월 같기도 한 이 생명, 달항아리가 파리 하늘에 ‘떴다’. 지난 3월 31일부터 4월 4일까지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도예가 신경균의 전시에서였다. 어둠을 걷어내는 햇빛 대신 어둠까지 끌어안는 달빛이 되어 파리 하늘에 두둥실 떴다. 흙이 달이 되어 뜰 때까지 불가마를 지킨 도예가는 전시 오프닝에서 “가마에서 도 자기를 꺼낼 땐 마치 새 생명이 탄생할 때처럼 평화를 느낍니다. 욕망은 다 녹 아버리고 자유와 평화만 남죠. 이 도자기를 보는 여러분도 제가 느낀 평화를 맛보시길 바랍니다”라고 기원했다.
유네스코 본부는 1백95개국의 ‘문화 대사’들이 기 싸움을 벌이는 곳으로, 보통 3년 치 전시가 미리 예약돼 있을 정도다. 게다가 도자기로 자존심을 세우는 한국, 중국, 일본 중 어느 나라도 이곳에서 도자기 전시를 연 적이 없으니 도예가 신경균의 개인전은 가히 ‘파리 대첩’이라 할 만하다. 프랑스 국립 기메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피에르 캉봉Pierre Cambon은 TV 인터뷰에서 “19 세기 프랑스를 열광시킨 중국 도자기, 1930년대 일본 도자기에 이어 그 자리를 한국 도자기가 이어받을 것 같습니다”라며 이 전시를 상찬했다. 파리 장식 미술관장인 다비드 카메오David Cameo(전 프랑스 국립 세브르 도자박물 관장)는 신경균의 달항아리가 품은 푸른빛을 극찬했다.
국립 세브르 도자박물관과 세르누치 박물관Musée Cernuschi은 작품을 영구 소장하기 위해 구입 의사를 밝혔다. 홍보가 턱없이 부족했는데도 작품을 설치하는 이틀 동안 그의 작품에 매료된 유네스코의 엔지니어들과 전시를 관람한 이들의 입소문만으로 하루 평균 4백 명 이상(가장 많은 날은 6백 명)의 관람객이 몰렸다(유네스코에서 20년 넘게 일한 미술 담당 엔지니어는 이렇게 성황을 이룬 전시를 처음 보았다고 전했다). 전시 소식을 들은 일본 대사는 한 발 늦은 자신들을 탓하며 전시장을 다섯 번이나 방문했다.
신경균 작가는 때로는 힘찬 붓질로 구름을 그려 넣기도 하고 발묵기법의 추상을 표현하기도 한다.
우연처럼, 필연처럼 파리로
우연처럼 시작된 일이었다. 갈망을 달고 다니는 자의 숙명을 지닌 그는 큰 작업을 끝내면 봇짐을 싸들고 오지로 떠돌았다. 재작년, 인도 라다크로 떠난 그는 호수의 조각배에서 유네스코와 연이 깊은 영국인을 만났고, 대화 끝에 그 영국인은 느닷없이 유네스코에서 전시해볼 것을 제안했다. “농담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분이 유네스코에서 일하는 프랑스인 전문가와 함께 갑자기 한국에 찾아와 일주일 동안 기장군과 고흥군에 있는 우리 장작 가마, 제가 작업하는 모습을 꼼꼼히 둘러보고 석사 논문의 영문 번역본까지 살펴보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뒤 전시를 해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그게 지난해 5월이었는데, 알리는 건 12월 넘어서 하라더라고요. 훼방을 받을 수 있다면서.” 이렇게 그의 전시는 ‘우연’처럼 시작되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세상만사는 그리고 우리 인생은 우연이 아니라 모두 필연 아닌가. ‘모든 일이 절로 절로 되어야 한다’는 믿음처럼 우연 같은 필연.
1 4백여 평에 달하는 후안 미로룸(유네스코 본부 내)에서 도자기 종주국으로서의 영광을 재현한 신경균 작가. 개회식 연설에서 그는 ‘평화’를 역설했다.
2 파리 장식미술관장, 국립세브르도자박물관장, 세르누치 미술관장 등 세계의 도자 문화와 관련한 대부분의 중요 인사가 전시에 참석했다.
이쯤에서 잠시 짚어본다. 도예가 신경균은 누구인가. 일제 강점기에 맥이 끊긴 조선 사발을 재현한 사기장 신정희 선생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그야말로 도자를 입에 물고 난 사나이다. 나이 열다섯에 물레를 차기 시작해 아버지가 복원한 전통 장작 가마기법과 도자기의 기형을 철저히 전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똑같이 만들면 아버지 뼈 팔아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끼와 자복(참선용 방석), 아버지의 정신만 품고 나와 자신만의 가마를 꾸렸다. <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온 전국의 가마터 3백24곳을 찾아다닌 후 부산 기장군의 장안사 인근과 전라도 고흥에 전통 장작 가마를 지었다. 그곳에서 분청, 흑유, 철화 등의 기법을 혼합하거나 융합해 새 형태, 새 색, 새 빛으로 빚어내는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이어령 선생은 그의 도자기를 일컬어 “신경균의 도예품은 이른바 중국적 형, 일본적 색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한국 특유의 선線의 예술이 흐른다. 선은 형과 색과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합한 뒤에야 얻어지는 결과물인 것이다. 무엇보다 달항아리의 허리를 잘라 두 동강을 낸 것 같은 그의 백자 사발을 한번 봐주기를 바란다. 조선조 백자의 특성을 그대로 살린 약간 이운 그 윤곽선과 몸체의 실루엣은 선의 예술이 보여주는 극한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기리어 칭찬했다. 그의 작품은 2005년 APEC 정상회의 공식 회의장의 장식 예술품으로 초대되며 이름을 드높였다.
형과 색, 선이라는 한중일 도자기의 특징을 한 몸에 지닌 도자기로 칭송받은 신경균 작가의 달항아리.
파리로 가는 험로
이처럼 우리 땅에선 양명의 터 위에 선 도예가이나 파리로 가는 길이 헐하지만은 않았다.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고루 갖춰 빚은 40여 점의 달항아리와 접시, 대접, 항아리 등 총 1백여 점의 작품을 비행기로 수송하고(운송비만 1억 5 천만 원이 들었다), 홍보 인쇄물을 만들고, 전시 스태프를 꾸리고, 현지에서 부대 행사에 쓸 비용을 치르고…. 8억 원이 훌쩍 넘어가는 전시 비용 중 부산시, 기장군, 고흥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리 한국문화원 등에서 받은 지원금은 1억 5천만 원 정도가 전부였다. 굽이굽이 골골 돌아가며 시난고난 치른 비용과의 전쟁이었다.
“모레가 출국일이라 내일까지 여행사에 비행기 티켓값을 보내야 하는데 수중에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면 구세주처럼 지인이 돈을 보태주고, 또 아는 분이 큰 작품을 몇 점 구입해줘 전시 준비 자금이 돌고, 협력 업체들은 전시 끝내고 와서 대금을 보내달라며 격려하고…. 그런 식으로 일을 치렀어요. 도중에 전시를 접어야 하나 싶을 때도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은 건 세계적으로 존재감이 없는 우리 전통 도예의 참멋을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전시 오프닝에서도 그는 파르라니 휘날리는 전통 한복을 입었다.
16세기 말 자기 제조 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세계 최고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온 우리 전통 도예의 힘을 국제 무대에 선보이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박제된 예술이 아니라 쓰임이 있는 생활 속 예술로 우리 곁을 지킨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 세계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기대됐어요. 우리의 전통 도자기 문화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요.” 남자에게 드라마가 없는 시대, 그의이 붉디붉은 이야기에 마음이 꺾인다.
그 꿈을 따라 용맹정진한 그에게 파리 사람들은 눈물 바람까지 곁들이며 감읍했다. 눈을 감고 그의 달항아리와 사발을 만지며 “내 아기를 안은 것 같다” “도자기의 최고 미학은 촉각일진대, 중국이나 일본 도자기와 달리 이 도자기는 차갑지 않다” “푸른빛도 놀랍다. 도자기 하나에서 여러 색깔이 비치고, 면면마다 색이 달라 보인다. 이게 다 불이 하는 일이라니 경이롭다” 같은 송찬을 쏟아냈다. 흙이 달이 되어 뜰 때까지 불가마를 지킨 도예가에게 세상이 준 보상이었다.
5, 6 달항아리보다 그를 대중에게 더 먼저 알린 사발. 7 프랑스인들이 탄복한 그것, 바로 도자기의 면면마다 다른 색이 감도는 신비가 이 작품에 들어 있다.
삶은 계속된다. 어제처럼, 내일처럼
사실 그는 달항아리보다 사발로 더 유명한 이다. 조선조 백자의 특성을 그대로 담아 약간 이운 듯한 그의 사발을 두고 이어령 선생이 ‘선 예술의 극한’이라 이를 정도니 말이다. 그런 그가 작년부터 달항아리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좋은 흙을 구하면 원칙을 세우고, 제대로 달항아리를 만들어보겠다 생각했어요. 전통 장작 가마에서 말이죠. 사발이라는 기본을 아니까 다행이지요. 한 번에 물레에 돌리지 못해 둥근 사발을 반쪽씩 빚어서 이어 붙인 것이 달항아리거든요. 작년에 좋은 흙을 구해서 달항아리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가 빚은 달항아리에서 내가 본 건 다름 아닌 ‘무지’였다. 시답잖은 앎의 기교가 없는, 흙의 기를 그대로 순박하게 빨아들인 도자기. 그 무지는, 실은 다 알아야 만날 수 있는 것일 테다. 전기도, 전화도 없는 산중에서 옛날식대로 가마 하나 짓고 사는 이에게 자연이 알려주는 경지 말이다. 그는 매일 먹는 밥이 여름처럼 뜨겁고, 들이켜는 물이 겨울처럼 차갑다는 사실에 눈물지을 줄 아는 남자다. 대지모大地母를 사랑한 농부처럼 새벽 2시 언저리면 일어나 흙을 빚고, 젖은 고샅길을 산책하고, 하루 종일 질척한 흙 위를 동분서주하다가도 밤 기운이 손님처럼 다가오면 잠자리에 든다. 연못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술처럼 마시고, 지빠귀의 다툼 이야기로 한나절을 보내며 산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 자연스럽게 사는 그가 만들어내는 무지의 세계.
“이번 전시요? 대성공이라느니 뭐니 다 틀린 말이에요.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이것도 과정일 뿐이지요. 농사꾼이 풍년 들었다고 배 터지게 먹는 거 아니고, 흉년 들었다고 모두 굶어 죽는 거 아닌 것처럼 작품이 무척 잘 나왔다고 기뻐할 일 없고, 구워서 하나도 안 나왔다고 슬퍼할 일 없잖아요. 앞으로도 계속될 인생이니까요.” 그는 인생의 방학을 맞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타고 있는 남자다. 가마 불이 꺼지더라도 머지않아 그는 또다시 치열하게 타오를 것이다. 가마에서 잘 익은 목숨 하나 꺼내며 평화를 맛보기 위해. 그러고는 어느 날, 봇짐 하나 둘러메고 훌쩍 떠날 것이다. 그렇게 또 다른 필연을 맞이하기 위해.
-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전시 연 도예가 신경균 파리에 뜬 달.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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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도자기를 전시한 도예가 신경균의 소식을 이제야 전하는 건 우리 불찰이다. 과거 세계 최고라 불리던 한국 전통 도예의 힘을 세계에 소개하는 일을 한 개인에게 미룬 것도 우리 불찰이다. 그의 작품 앞에서 눈물로 감읍한 파리 사람들처럼 순수하게 감동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불찰이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