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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복거일 생生에 바탕을 둔 삶
복거일 선생이 간암 진단을 받은 건 3년 전이다. 그날 그 이후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오롯이 글쓰기에 몰두하는 삶을 선택한 그의 결정을 많은 사람이 우려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일상을 유지하고 삶을 사시오. 다음 세대는 이어집니다.”


수색동 자택의 책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집필하고 사무를 보는 거실 한편에 빈틈없이 책이 꽂혀 있던 책장에는 듬성듬성 자리가 비어 있었다. 죽고 나면 식구들에게 다 짐이 된다고, 버릴 것은 버리고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있다고, 인터뷰 사진을 찍을 만한 곳이 있겠느냐며 소탈하게 웃는 얼굴이 평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복거일 작가가 간암 진단을 받은 지 3년이 가까워온다. 그는 그때에도 간호사와 의사에게 책을 선물할 정도로 담담하게 비보悲報를 맞이했다. 이후 단 한 번도 치료를 받지 않은 건 오로지 그의 결정이었다. 가족은 그의 선택을 존중했다. 칠순을 맞이한 백발 소설가의 얼굴엔 질병의 그늘도, 죽음 앞의 두려움도, 불확실한 내일의 불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죽음의 실체는 없다
“꽤 오래 살 수도 있고, 갑자기 나빠질 수도 있지요. 병이 어느 단계에 도달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사는 게 더 중요합니다. 누구에게나 장애물은 있어요. 장애물을 없애는 데 애쓰지 마세요. 돌아갈 수도 있고 치우고 갈 수도 있잖아요.” 평생 글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니, 육체가 정신을 잠식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심정이리라. 그는 자신을 특수한 경우라고 했다.

“지식은 나를 인도하는 원칙입니다. 과학 지식으로 봤을 때 죽음에는 실체가 없어요. 생명 현상이 멈추는 것뿐이죠. 이름이 있으면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처럼 ‘신’이라 명명하면 존재를 믿게 됩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 지식 아래 신은 없습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면서 신과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고 믿어요. 그것으로 위안을 받는다면 행운입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내 목숨은 특별하지 않아요.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에 불과하죠.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다른 누군가가 탄생했을 겁니다.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가 없었다면 다른 대문호가 나타났을 거예요. 인류가 사라져도 생태는 남아요.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가 없어요.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요. 나와 다른 사람을 똑같이 대하게 돼요. 과학에 바탕을 둔 철학이 제 삶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지식이 늘어날수록 허무가 커지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아야 해요.” 그런데도 그는 ‘오래 살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생물 본연의 임무니까요. 타협하면서 살긴 살아야죠. 살아온 대로 살고 타인에게 친절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돕고 폐 끼치지 않으면서…. 생에 바탕을 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병이 생기면 치료법에만 집중하고, 삶이 어떻게 흐르는지는 관심이 별로 없어요. 병에 집착하면 삶 자체의 의미가 상실됩니다. 저 또한 몸이 허락하는 한 정상적으로 살고 일상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복거일 선생은 누구인가
1946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그는 소설가이자 시인, 사회 평론가이며 이른바 ‘보수 논객’으로도 유명하다. 장편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 <높은 땅 낮은 이야기> <역사 속의 나그네> 등과 소설집 <애틋함의 로마> <내 몸 앞의 삶>, 시집 <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오장원의 가을>, 문학 평론집 <세계환 상소설사전> <수성의 옹호>, 사회 평론집 <현실과 지향> <소수를 위한 변명> <시장의 변화> <복거일의 자유롭게 한 걸음> 등 50여 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그만큼 절판된 책도 많다. 저서 수십 권에 담긴 그의 우주를 어떻게 짧은 인터뷰로 이해 할 수 있을까? 현관문 앞에서 기자보다 한 발 앞서 악수를 청하는 그의 환대를 받으며 마주 앉았다. 책과 빛, 실내 식물들 사이에 화가이기도 한 그의 딸 조이스 진의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최근 딸의 그림을 함께 수록한 수필집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을 펴냈다.

“주변에서 부러워해요. 부모는 자식과 가까워지려는데, 나이가 들수록 멀어지죠. 딸과 함께 책을 낼 수 있다는 건 행운입니다. 제가 그림에 조예가 깊진 않지만 점점 발전하는 딸의 작품에서 가능성을 보았어요. 하지만 재능이 뛰어난 작가도 평생 어렵게 사는 경우가 많잖아요. 열정을 걸어야 한다고 격려하지요. 거의 경고에 가깝지만요. 후후.” 조이스 진은 동아일보에 글과 그림을 연재하고 있다. 이후 책으로도 출간할 계획이다. 간암 진단을 받은 이후에 쓴 글이어서 그럴까?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명료한 문장으로 책 곳곳에 담겨 있다. 그중 일부를 나눈다.

“삶은 40억 년 동안 이어진 사업이다. 그 아득한 세월에 몇십억 세대의 우리 조상이 자식을 낳을 때까지 살아서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은 늘 내 가슴을 감탄으로 채운다. 그렇다, 삶은 이어진다. 아무리 재앙의 골짜기가 깊어 보여도 삶은 그 골짜기를 지나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어려운 시절에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멀리 보아야 한다.”

1 화가인 딸 조이스 진의 작품. ‘Discovery of the world 018’, oil on canvas, 100.0×65.1cm, 2014. 
2 ‘Discovery of the world 004’, oil on canvas, 80.3×65.1cm, 2013. 

바라볼수록 소중하다
그의 병환 소식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소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 때문이었다. <높은 땅 낮은 이야기>(1988), <보이지 않는 손>(2006)에 이은 3부작의 완결판이자 그의 자전적 소설. 칠순을 맞이한 ‘현이립’이 저녁 거실 마루에서 딸과 아내에게 간암 판정을 받다고 얘기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의사는 병과 전쟁하는 사람이다. 전쟁에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 환자의 삶을 의사가 고려할 순 없다. 하지만 나는 하루라도 더 써야 한다”라는 주인공의 모습에 복거일 선생의 깊은 주름이 겹쳐졌다. “그는 나오는 울음을 가까스로 되삼켰다. 아직 꿈을 꾸는 나이, 아직 이런 헤어짐을 몰라도 될 나이 ? 애비는 그저 그것이 미안했다. 눈물 속으로 보이는 세상은 어찌 그리 아득한가.” 담담하게 인터뷰를 이어가는 그의 심정이 현이립의 독백과 일치하지 않을까?

“누구나 죽음이 온다는 것을 알지만 의식하지 않아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하루 하루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삶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중년이 되면 다릅니다. 직장을 옮기기도 어렵고, 인기 좋은 직업을 갖기도 힘듭니다. 체력도 떨어지고 심리적 위축도 심해지면서 타인과 관계 맺기에도 인색해집니다. 미혼인 자식이 있으면 더 힘들죠. 사회가 발전할수록 상대적 박탈감이 심해지고 노년의 비참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도 흐려지고 귀가 안 들려 미치겠다고 그래요. 그러다 보니 순간순간의 감정을 음미하며 살고 싶어져요. 그저 살 때는 잘 몰랐는데 죽음이 가까이 오면 강렬하게 지각하게 되지요.”

그는 병을 인지하면서 작은 것이라도 무심코 지나치는 일이 줄어들었다. ‘아이들과 나누는 몇 마디, 함께 늙어가는 아내와 차를 마시면서 듣는 옛노래,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옛 친구와 만나서 보낸 한때’가 그는 바라볼수록 소중하다. 아내가 무릎이 아파서 함께 등산은 못 해도 가까운 불광 천에서 종종 산보를 즐긴다. “내년 봄에도 이 꽃들을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요. 요즘엔 아, 내년 봄까지는 살겠구나. 그럼 그때 걱정하자, 합니다.”

소설 읽기는 재난 훈련이다. 누구에게나 불행은 온다. 예측 가능할 때도 있지만, 갑자기 깊은 우물 같은 슬픔에 홀로 빠질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삶을 받아들이고 지 속할 수 있을까? 복거일 선생은 그 해답을 지적 훈련에서 찾았다. 그리고 처방전으로 소설 읽기를 제안했다.

“치료를 포기하고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식구들이 비교적 쉽게 이해하고, 남은 기간을 화목하게 살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건 평소 지적 훈련을 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행복은 없어요. 누구나 불행을 각오해야 합니다. 지적 훈련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설 읽기예요. 소설은 다른 사람의 삶이거든요.

‘사람이 소설 아니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고 영국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이 말한 것처럼 소설 속 인물의 이야기에 내 삶을 대입해서 연습하는 거예요. 소설은 살아가는 방식을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를 보세요. 삶은 대체 무엇일까, 스크루지처럼 사는 것이 과연 옳은가, 묻잖아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는 배우자의 부정과 질투가 어떤 파국을 몰고 오는지 알려주죠. 끊임없이 독자에게 질문하기 때문에 내면에 근육이 생기고 단련이 됩니다. 살다 보면 불의가 승리하는 경우도 많고,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람이 손 해를 보거나 일찍 세상을 떠나는 일도 생깁니다. 소설 읽기는 마치 재난 훈련과 같습니다. 훈련을 열심히 하면 어떤 절망과 고난도 쉽게 극복할 수 있어요. 나와 타인의 삶의 차이는 없습니다.”

3 시집, 수필집, 소설집, 사회 평론집, 희곡집 등 50여 권 이상을 펴낸 복거일 작가. 책장 한편에 그의 저서가 가지런히 꽂혀 있다. 
4 딸은 아버지 복거일 선생과 평소 많은 대화를 하진 못한다고 했다. 쑥스러운 듯 따스한 웃음을 주고받으며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선 복거일 부녀. 

여전히 펄떡이는 삶
인터뷰 도중에도 방송 인터뷰 요청 전화와 문자 알림이 이어졌다. 한 번도 거절하지 않는다. 5분의 전화 인터뷰도 스케줄을 조절해 약속을 정할 만큼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는 열혈 지식인의 모습. 달력에 손수 일정을 적는 그의 손이 대왕고래처럼 두껍고 검다. “누구에게나 처지라는 것이 있어요. 글을 쓰기 때문에 타인의 처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처지를 생각하면 배려하고 이해하게 돼요.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건강을 챙겨야 하는 상황에서도 타인의 처지를 생각한다. 모임에서 ‘오래 삽시다!’ ‘건강합시다!’ 그렇게 먼저 축배를 건네기도 한다. 깔깔거리고 웃기도 하고 2차를 먼저 제안하기도 할 정도로 그의 삶은 여전히 펄떡인다.

“존경하는 선배이자 동갑 문인인 최인호 선생은 항암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작품을 못 썼어요. 손톱이 빠져 골무를 끼고 글을 썼지요. 가슴이 아팠습니다. 정신 활동도 육체의 일부예요. 몸이 튼튼해야 글도 잘 쓸 수 있습니다. 몸이 허락하는 한 보통의 삶을 유지하고 싶어요.”

그는 수장首長이다.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그를 가장 먼저 찾는다. 조언을 구하고, 지혜를 나누고, 혜안을 찾는다. 그것이 우리가 그의 선택을 묵묵히 지지하는 이유가 아닐까? 오는 9월까지 20년 전 시작한 과학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의 속편을 모두 마무리할 계획이라는 그는 뮤지컬이라는 또 다른 예술 장르에 도전하고 싶다. 2011년에 각본•연출을 맡은 영어 뮤지컬 <장진호 전투>에 이어 두 번째 뮤지컬이 될 거다. “이제 글 빚이 없으니까 딴짓을 하고 싶어 근질근질하거든요!” 
 
복거일 선생은 자신을 ‘지도 제작자’라 불렀다. 방향을 알려주는 지하철 노선도처럼 세상의 지식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한 장의 지도로 완성하는 사람. 그는 여전히 평생 쌓은 지식으로 그만의 지도를 만들고 있다.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
산문과 시의 간격을 좁히고 싶은 그의 바람을 담은 수필집으로 <서정적 풍경,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2009) <서정적 풍경2, 우리 마음속의 부두>(2010)의 속편이다. ‘좋은 시들은 진정한 것들을 품는다’고 믿는 그가 직접 고른 시와 일상을 품은 산문을 딸 조이스 진의 그림을 함께 담았다. 도서출판 다사헌.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이명수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