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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같은 가족 문화를 만나다 전각 뮤지엄
신촌 아트레온 빌딩에 문을 연 전각뮤지엄에는 한학자, 예술가, 교육가, 봉사자로 이어지는 가족의 오랜 문화가 담겨 있다. 거침없는 일필휘지의 붓글씨 작품처럼 가족이 이 사회의 행복을 위해 발하는 빛이 힘차게 대를 이어가고 있다.

아트레온 빌딩 5층의 CGV 영화관 복도에 자리한 전각뮤지엄 내부. 영화 관객이나 시민이 자연스럽게 문화 감상을 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화관의 자투리 공간을 이용했다. 협소한 공간의 벽면까지 최대한 활용해 전체 전각 작품을 관객이 한 번에 감상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아버지, 개성의 두뇌를 갖춘 예술가
본디 개성 사람은 신용이 있고 생활에 허황됨이 없다. 아트레온 최호준 회장의 아버지 故 우석又石 최규명 작가는 개성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한학자로, 아들에겐 매우 엄격한 분이었고 재산 대신 한시와 수필을 직접 쓴 서책만 풍족히 남겨 주었다. 그 때문에 호구지책이 궁하던 최규명 작가는 제도권 교육은 꿈꿀 겨를도 없이 청년 시절부터 전기 회사에 들어가 일했다.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양말 공장에서도 꽤 오랜 기간 일했다. 해방이 되자 고국으로 급히 돌아가려던 일본인 사장이 근로자 중 가장 신용이 좋은 그에게 공장을 맡겼다. 머리 좋고 셈에 능하고 생활이 검소한 개성 사람인지라 그는 이내 양말 공장을 발전시켰고 큰돈도 모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 돈으로 충남 삽교의 삽다리에 있는 정미소를 인수했고, 서른 명이 넘는 친척이 이 정미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업은 계속해서 번창해 제재소와 중학교도 인수했으며, 서울로 돌아와서는 정밀 화학 회사를 창립하고 신영극장과 코리아극장까지 거느린 재산가로 우뚝 섰다. 하지만 선비 정신을 중히 여기던 한학자의 아들이 저잣거리의 상인이 된 것을 감추려는 듯, 최규명 작가는 사업장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말 타고 활 쏘고 판소리하고 골동품 모으고 책 읽고 서예를 하며 일상을 보냈다. 온갖 책을 섭렵했고 나무와 돌에 손이 해질 때까지 고어를 새겨 넣었으며, 이른 새벽부터 파자마만 입은 채 바닥을 다 채울 만큼 큰 종이에 전위적 필체로 붓글씨를 썼다. 그러고도 기를 소진하지 못할 때면 외아들 호준을 불러 앉혀놓고 대의와 혁신과 진보를 설파하며 당신의 세계와 사상을 아들에게 각인시켰다.

총장 퇴임 후 오랫동안 염원하던 아버지의 작품 정리를 시작한 최호준 회장은 전각 작품의 내용을 분석해 <돌을 취하여 보배를 짓다>라는 책을 펴내고, 책 속의 작품을 이곳에 전시했다. 

뮤지엄을 복층 구조로 설계해 전시장 아래에는 아늑한 시청각실을 배치했다. 

아들, 인내를 깨우친 학자
그러니 누나 둘을 둔 최호준 회장은 부잣집 외아들이었지만 고달픈 삶을 살았다. 국민학생 때부터 가족의 쌀값을 받으러 사흘마다 에 있는 아버지 회사에 다니러 갔다. 세상을 뒤엎는 그릇이 되라며 급진적이고 파격적 사상을 강조하는 아버지의 강령을 반나절씩, 어떤 때는 하루 이틀씩 참고 들으며 성장했다. 자립해 대학 교수가 되었어도 이 인내만큼은 계속해야 했다. 국비 장학생으로 도쿄대에서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재력가 아버지는 아들을 보러 일본에 와도 용돈 한 푼 쥐여주지 않았고, 아들과 며느리가 이화여대 다락방에서 실반지만 나눠 끼며 결혼할 때도 나서지 않았다. 교수가 되어서도 전셋집을 전전하도록 외면하는, 원망이 넘치는 자린고비 아버지였다.
대신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옆에 앉혀놓고 서예를 했고 명동극장에서 하는 팔도 판소리 명창 대회에도 데려갔다. 골동품을 감상하고 정원을 단장하는 모습을 아들이 어깨너머로 보게 하며 재산 대신 감성을 아들에게 풍족히 건네주려 했음을 훗날에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외삼촌이 ‘네 아버지는 천재다. 네 할아버지는 뛰어난 한학자셨다. 그러니 그 유전자가 어디로 갔겠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런 가풍 때문인지 1976년에 도쿄대에서 공부할 때부터 문화 행정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에는 행정의 디자인화, 디자인의 행정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해 1997년에는 행정학 교수인 제가 <디자인네트>라는 디자인 잡지를 창간했어요.”

행정학은 정부의 고급 관료를 양성하는 중요한 학문이지만 곧고 딱딱하며, 지식이 위에서 아래로 전달된다. 반면 디자인은 많은 이의 영감과 아이디어가 합력해 하나의 선을 이룬다. 그러니 이렇게 다른 두 영역을 융합해 더 좋은 결과를 끌어내면 어떨까? 지금에야 흔히 융합을 외치는 시대 지만, 입신양명을 위한 외골수가 각광받던 1980년대부터 이미 이런 생각을 한 최호준 회장은 행정학 교수를 하면서 전문지 중에서도 그 어렵다는 디자인 전문지를 창간하는 파격적 모험을 했다. 국내외 디자인 행사를 취재하며 우리나라 행정에도 이런 요소를 반영할 수 없을까, 남 보기에는 쓸모없는 고민을 하며 강산이 바뀐다는 10여 년간 잡지를 발행했고 경기대학교 부총장을 맡게 되자 아쉽게 손을 놓았다.

지난 2월 26일 전각뮤지엄과 동시에 개관한 갤러리忠. 아트레온 빌딩 지하 1층에 위치한다. 우석 최규명 작가의 작고 15주년을 기리는 의미로 아들이 헌정한 아버지의 붓글씨 작품 전시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코리아극장을 운영하던 시절, 극장 계단의 벽이 빈 것을 보고 최호준 회장이 아버지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청해 완성한 ‘고려’라는 한자의 붓글씨 작품. 

35년간의 대학교수 생활을 마감한 최호준 회장. 선친이 남긴 7백50여 점의 서예 작품과 4백50여 방의 전각 작품을 일일이 정리하고 구분해 전각뮤지엄과 갤러리忠에 전시했다.

장애인을 돕는 총장
1985년 경기대학교에서 학생처장으로 일할 때 우연히 장애인의 불편한 삶을 알게 되어 ‘장아람(장애 아동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재단도 만들었다. 이후 1994년에 정식 설립 절차까지 마친 장아람은 현재까지 30년간 장애 아동을 돕고 있다. 또한 총장에 선출되자 월급을 장학금으로 기부해 경기대학교 장학금 사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매일 새벽 캠퍼스 곳곳을 돌아보며 부족한 시설을 보완해 학교가 ‘감성 캠퍼스’라는 애칭도 얻었다. 행정학자이자 교수를 천직으로 알고 산 그가 이처럼 일반 교수 사회에 드문 새로운 시도와 나눔을 실천하며 산 데는 외삼촌의 말처럼 한학자인 할 아버지, 인내하고 자립하도록 아들을 단련시킨 예술가 아버지의 특별한 교육이 밑바탕이 되었음을 최호준 회장은 근래에 더 깊이 깨닫고 있다. 아버지의 작품을 갈무리해 책을 만들고 전시회를 준비하며 이미 먼 하늘로 떠난 아버지를 다시금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사업가이기 이전에 서예가이자 전각가였습니다. 이른 새벽에 맨발의 아버지가 벽만 한 커다란 종이에 붓으로 글씨를 쓰시던 모습이 선하지요. 그땐 몰랐지만 이제 보니 당대보다 앞선 전위와 추상의 예술 세계였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그토록 강조하신 이상적 삶이 아버지의 작품에 오롯이 새겨져 있었죠.” 한학자 할아버지는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아버지를 낳고, 사업가이자 예술가이던 아버지는 학자이면서 출판인이자 장애인 봉사자인 아들을 낳았다. 부친의 지원없이 사업가로, 교육가로 대성했다는 공통점이 부자에게 있지만, 그보다 더 진한 공통점은 바로 감성의 축이다. 이 축을 따라 사업과 예술, 학계와 봉사가 융합하는 인생이 이어졌고, 아버지의 만년에 이르러 마침내 아버지와 아들은 이 드라마틱한 애증의 접점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미움도 많고 원망도 많은 아버지였지만 제가 교환교수로 미국에 있을 때는 아들에게 와서 만년을 보내셨죠. 노년을 향해가는 아들이 만년에 이르러 폐 질환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다니고 아버지의 변을 손가락으로 파내며 그제야 아버지의 인생을 보았습니다. 그 많은 재산이 있어도 이코노미 좌석에 앉아 바다를 건너오시고, 구멍 뚫린 양말을 신는 검소한 생이었지요.”

아들이 아버지에게 헌정한 뮤지엄 아버지가 타계한 후, 생애 처음으로 재산을 물려받은 최호준 회장은 이를 사회 공공 문화의 확산과 장애인 지원 사업에 사용하고 있다. 신촌의 황금 부지에 공연장, 학생들의 세미나 공간까지 갖추고 문을 연 아트레온 빌딩이 그 예다. 도시행정학을 하면서 그가 깨달은 도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민이 모여 소통하고 문화를 나누는 ‘광장’이기 때문. 올해는 이 빌딩 지하 1층과 5층에 아버지 최규명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갤러리와 전각 작품을 전시한 뮤지엄도 문을 열었다. “마침 제가 캘리그래피에 심취해서 배우러 다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글씨가 글이기도 하고 그림이기도 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최규명 작가의 대작을 보며 전율을 느꼈지요.” 라고 감상을 전하는 뮤지엄의 공간 설계를 맡은 리빙 애시스 디자인의 최시영 디자이너는 공간이 협소해 처음에는 전각 작품 몇 가지만 전시하는 구조를 생각했다. 하지만 손톱만 한 글씨 새김이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유려한 뜻을 펼쳐놓는 전각 작품의 매력에 빠져 뮤지엄 벽면 전체가 전각 작품을 드러내는 특별한 디자인을 완성했다.

이 벽을 따라 내려간 아래층은 아늑한 시청각실로 꾸며 작은 공간에 수백 점에 이르는 전각 작품전시와 시청각 작품 감상이라는 융합을 이루어냈다. “우리 도시의 건물에 뮤지엄이 더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규모가 작아도 한 집안의 역사인 작은 뮤지엄이 많이 생기면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게 되니까요. 조상을 과대 치장하는 대신 공공이 즐길 수 있도록 하면 그 가정의 전통이 우리 사회의 전통이 되는 것이지요.” 할아버지의 한학이 씨앗이 되어 아버지의 서예와 전각이라는 줄기를 내었고, 아버지의 재력과 예술성이 양분이 되어 아들의 학문과 봉사라는 꽃이 피었다. 가족의 역사가 밀알이 되어 세상에 이롭게 자라나가는 것, 이것이 전각뮤지엄이 꿈꾸는 전통이다.

가족이 함께 뜻을 되새겨봐도 좋을
우석 최규명 작가의 전각 작품


修己治人수기치인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림. 수기修己는 수신修身과 같은 말로 자신을 수양함이고, 치인治人은 사람을 다스림이다. 이 말은 자신을 먼저 수양해야 남도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이다. 두 작품이 같은 내용인데 하나는 양각陽刻이고 하나는 음각陰刻이다. 음양의 조화를 생각하고 만든 작품이다.


子子孫孫자자손손
두 아이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다. 한쪽은 자子, 다른 한쪽은 손孫을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안쪽 좌우로 점을 하나씩 찍어서 한 자씩 더 있음을 표시했다. 이것을 읽으면 자자손손子子孫孫이 된다. 집안이 대가 끊기지 않고 자손이 번창하기를 염원하는 뜻이다. <서경> 주서 자재 편에 “欲至宇萬年惟王욕지우만년유왕 子子孫孫永保民자자손손영보민”이라고 했다. 자자손손이 만년토록 왕 노릇 해서 백성을 잘 보호하라는 말이다.


永受嘉福영수가복
영원히 아름다운 복을 받다. <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에 남자가 관례할 때 읽는 두 번째 축문 중에 “눈썹이 희어져 만년토록 장수하고 영원히 큰 복을 받으리라(眉壽萬年미수만년 永受胡福영수호복)”라고 했다. 오래도록 복을 받으라는 뜻으로 ‘영수호복’이라고 했다.

글 김민정 수석기자 | 사진 이동오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