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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궁중채화장 황수로 박사 꽃보다 아름다워
궁중의 연회나 의례를 위해 비단으로 만든 꽃인 궁중채화, 인간이 만든 가화假花지만 벌과 나비가 실제로 날아드는 신비의 꽃 채화를 복원하는 데 반평생을 바친 황수로 박사. 사사할 장인 한 명, 참고할 유물 하나 남지 않은 상황에서 땀과 눈물로 낮과 밤을 밝혀 그가 복원한 그 영묘한 채화의 세계를 지금 <아름다운 궁중채화>전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안에 깃든 조선 왕조의 기품 있는 문화도 함께.


©이종근(그루비주얼)

눈 오고 바람 부는 한 세월 지내더니 오얏꽃 알큰하게 피었다. 알큰한 그 숨결로 세상의 남은 눈을 녹이는 꽃향기, 천지 사방에 가득하다. 눈이 빨개지도록 만개한 홍도화(붉은 오얏꽃. 오얏꽃은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꽃 문양이다) 옆에 서니 그 옛날 창경궁 자경전을 가로지르던 바람이 그 날의 오얏꽃 향기를 몰고 온 듯해 잠시 몽롱해진다. 그런데 이 무언가. 찬찬히 살피니 이건 진짜 오얏꽃이 아니라 비단으로 만든 가화假花다. 그러고 보니 꽃나무 구석구석에 숨은 벌과 나비, 무당벌레, 봉황과 공작새도 모두 인공의 것이다. 이 무언가. 향까지 품은 이 생명의 정체는.
“저는 감히 이 꽃을 신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낸 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비단이나 모시에 홍화즙 같은 자연 염료로 물을 들이고, 홍두깨질로 자연의 꽃잎과 가까운 광택을 만들고, 꽃잎 하나하나 인두질해서 모양을 내고, 밀랍을 발라 형태를 고정하고, 송화 가루를 꿀에 개어 모시털 끝에 발라 꽃술을 만들고, 꿀과 송홧가루 향기가 맴도는 그 꽃에 진짜 벌과 나비가 날아들고… 그야말로 자연의 빛, 향, 광채가 살아나는 꽃입니다.”
50년 넘게 이 인공 꽃을 만드는 데 몰두한 황수로 박사는 작년 중요무형문화재 화장花匠이 되었다. 조선시대 궁중 연회나 의례 때 연회장을 장식하던 궁중 채화綵華를 복원해내는 데 일생을 헌신한 이에게 세상이 준 증표였다. 여치 떼처럼 없는 날개 있는 체하며 불빛으로 뛰어드는 인간들 속에서 자신을 담금질하며 ‘채화’ 하나만 바라보고 산 장인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증표였다. 머리에 서리꽃 핀 여든 살이 되어 얻은 증표였다.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한국궁중채화연구소의 소장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황수로 박사. 채화 작품은 밀랍을 녹여 꽃잎을 만든 ‘윤회매’로 꽃술에 송홧가루까지 묻히니 벌과 나비가 실제 꽃으로 착각하고 날아든다.

땀과 눈물로 만든 꽃향기
‘꽃 피우는’ 일이 이토록 심신이 ‘미어지는’ 일인 줄 몰랐을 것이다. 고종 황제 때 궁중의 꽃을 관할하는 관리인 이병찬 선생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의 외조부(고종 때 궁내부 관리) 덕분에 외조모, 어머니, 이모들은 궁중채화 제작 기술을 자연스레 전수했다. 그들 사이에서 꽃과 놀며 자란 황수로 박사는 1960년대 일본 유학 중 꽃과의 ‘운명’에 마주하게 된다. “일본 여성들 모임에서 꽃꽂이를 함께 하는데, 그들이 일본의 전통 지화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할 만한 세계 유일의 문화라고 자랑하더군요. 제가 어릴 때 보고 자란 우리의 채화 문화에 대해 전하자 그들이 제게 증거를 대라는데 할 말이 없더군요. 한국에 돌아오자 마자 <조선왕조실록> 등을 뒤지며 궁중채화를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조선시대엔 궁중채화 장인이 수십 명에 달했지만 왕조가 무너지면서 맥이
끊겨 남아 있는 장인이 없더군요. 게다가 채화를 만들 때 풀과 꿀을 먹이다 보니 좀이 슬고 세월에 녹아내려 보존된 것이 없고 기록으로만 존재했어요. 장식용으로 쓰인 채화는 연회 후 소실해버리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실제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고요.”
채화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적 고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는 가정학에서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꿔 박사 학위까지 땄다. 국어사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은 ‘채화’의 역사를 탐구하기 위해 그는 그 부황 나는 작업에 청춘을 바쳤다. 꽃잎을 붙이는 풀 하나도 10년간 삭혀 만들고, 비단 하나 염색하는 데 1년을 보내기도 하고, 화준花樽(꽃항아리) 하나에 꽂는 2천 송이 꽃과 40여 마리 초충을 만드는 데 꼬박 두 해를 바치기도 했다. 고종 황제 즉위 40돌 진연을 재현할 때는 제자 40여 명과 3년 동안 채화 10만 송이를 만드느라 열 발톱이 빠지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연구하며, 실험하며 더 이상 짜낼 게 없는 것처럼 자신을 소진하면서 채화에 몰두했다.
“궁중채화를 연구할수록 우리 문화의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조선 왕조는 생명을 존중해 생화를 꺾어 장식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죠. 또 왕가에선 영원불멸을 염원했기 때문에 시들고 마는 생화 대신 비단, 모시, 종이 등 다양한 재료로 꽃을 만들어 궁을 장식했습니다. 특히 진연에 쓰인 채화는 왕실의 품위를 보여주는 장식품이었고, 임금과 신하가 주고받으며 최고 예우를 나타내는 도구이기도 했죠. 장수나 건강, 평화 등의 의미를 담은 꽃을 서로 주고받은 겁니다.” 궁중채화의 아름다움에 빠져 산 반세기 동안 그는 전수자 십여 명과 함께 수천 점에 달하는 궁중채화 작품을 복원하고 제작해냈다. 그렇게 만든 채화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국악원 등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아름다운 궁중채화>전에서는 조선시대 순조의 40세이자 즉위 30년을 기념해 열린 기축년 진찬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그중 창경궁 명정전에서 열린 외진찬의 모습으로 외진찬은 상왕과 왕, 외빈 등 남성을 위해 베푸는 잔치다. 맨 앞이 무희와 무동을 위한 꽃 무대인 ‘지당판’, 좌우의 꽃 항아리가 ‘화준’, 병풍 앞에 음식과 함께 장식한 채화가 ‘상화’다.

화도삼매
“한국의 채화는 세 가지의 신비성을 갖습니다. 우선 빛이 아름답습니다. 꽃과 똑같은 빛을 내기 위해 자연에 있는 꽃의 즙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푸른 꽃을 만들기 위해선 여름에 쪽이 필 때를 기다려 쪽 잎을 뜯어 6개월, 1년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치죠. 봉선화, 자초, 꼭두서니, 연지, 치자 등 자연 염색제만을 사용했습니다. 채화의 두 번째 신비성은 바로 나비와 벌과 인간을 유혹하는 향입니다. 외국의 아트 플라워는 어느 것 하나 향이 없지만 한국의 채화는 비단 위에 반드시 밀랍 처리를 하기 때문에(밀랍 처리한 꽃잎은 물에 닿아도 잘 처지지 않으며 색이 빨리 바래지 않는다) 꽃에서 은근한 꿀 냄새가 풍겨 나오죠. 게다가 꽃술은 노루털이나 모시, 삼베털 끝에 송홧가루를 발라 한 올 한 올 만들기 때문에 자연의 향이 더 깊게 배고요. 2004년 덕수궁에서 채화를 전시할 때 중화전의 야외 월대 위에 나비와 벌 떼가 너무 많이 날아들어 관객들이 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채화의 마지막 신비성은 바로 꽃의 광채입니다. 모시가 빛을 낼 수 있는 건 방망이로 수없이 두드리기 때문입니다. 방망이로 두드리면 섬유 안에 있는 자연의 빛이 그대로 빛을 발하죠. 이렇게 자연의 빛과 향과 광채를 담은 아름다운 꽃 한 송이라도 더 만들어내려면 제게 남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요.” 그에게서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사람의 뒷모습이 슬몃 비친다. 그는 ‘박제된 궁중의 옛 문화’가 아닌 대중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 함께 즐기는 채화 문화를 꿈꾸며 시민 무료 강습, 백화점 강좌, 화장 양성 교육 등을 계획 중이다.
황수로 박사가 무형문화재 화장으로 지정된 후 처음 여는 전시인 <아름다운 궁중채화>전이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조선 왕조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진연을 선보였다는 1829년 순조 기축년 진찬을 그와 제자들이 복원 제작한 전시다. 자료 연구하는 데 3년, 제자 열 명과 작업하는 데 3년이 걸린 노작이다. 당시 창경궁 명정전의 외진찬 연회에 사용한 채화는 5천2백89송이로, 그 꽃을 제작하는 데 6백32냥7전3푼이 쓰였다 하는데, 요즘 돈으로 치면 5천만 원이 넘는다. 그야말로 조선 최고의 진연이었다고 한다. 전시 공간 설계는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진찬상의 음식은 궁중 음식 무형문화재인 한복려 원장이, 궁중채화의 전시 디자인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 소장이 맡았다. 이번 전시에선 19세기부터 4대째 비단꽃을 만들어온 프랑스 르제롱Legeron 가문의 브뤼노 르제롱Bruno Legeron 장인이 제작한 꽃 장식도 함께 전시한다. 선대에서 전해진 전통 도구들과 기법도 함께 선보인다. 동서양 가화의 세계를 비교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자리다. 꽃을 만들 때는 모든 잡념이 사라지는 ‘화도삼매花道三昧’에 들어간다는
그. “비단을 떠다가 자연염으로 갖가지 색을 뽑아내고, 재단한 꽃잎에 밀랍을 씌워 인두질을 하면 마치 꽃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살아납니다. 그때의 기분은 자연의 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희열에 비유할 만합니다. 그 맛 때문에 노고勞苦와도 같은 채화의 길을 놓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의 이 말에서 생생한 청춘을 보았다. 눈썰미 없는 사람은 쉽게 알아볼 수도 없는, 그 치밀한 아름다움의 세계에 여전히 살고 있는 팔순의 장인. 그는 여전히 정신을 담아, 체열을 담아 하루 열 시간 이상 꽃을 손으로 다듬고 마음으로 매만지고 있는 것이다. 천지 사방에서 가슴팍을 비집고 찾아온 꽃들로 가득한 계절, 한 떨기 비단꽃을 피워 내는 데 인생을 바친 그를 보며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다 꽃이니, 그렇게 피우고 가는 꽃이니, 그야말로 꽃보다 아름답구나. 진짜 꽃보다 아름다운 그의 채화 한 떨기처럼 아름답구나.


창경궁 자경전에서 연 내진찬. 밤에 연 잔치라 하여 야진찬이라고도 하며, 대비와 왕비를 위해 베푸는 잔치로 외진찬보다 화려하고 장식한 채화의 수량도 더 많았다. 그중 이 작품은 진찬의 좌우에 설치하는 화준이다.




프랑스의 비단꽃 장인 브뤼노 르제롱
 
“우리 르제롱 가문은 1880년 프랑스 파리의 브롱델 30번지에서 아틀리에 르제롱을 시작했으니 벌써 4대에 걸쳐 내려온 장인 가문입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비단꽃 일을 보아온 저는 1976년부터 비단꽃 공예를 전수받아 이어오고 있죠. 중세부터 비단꽃 전통이 시작된 프랑스에선 옷이나 모자에 꽃, 깃털, 과일 등의 장식물을 다는 것이 유행했어요.1920년대까지 1백여 개 정도 의 비단꽃 아틀리에가 존재할 정도로 성업했지만 지금은 세 군데만 남아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그중 두 곳은 패션 브랜드 샤넬에서 흡수 합병했다. 자동차가 보급된 이후 꽃 장식이 달린 큰 모자가 자동차 안에 들어가지 않아 모자 문화가 사라지면서 비단꽃의 전통도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중 아틀리에 르제롱은 공방의 장인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는 유일한 곳이라 자부할 수 있죠. 디올, 쿠레주, 루이비통, 지방시, 웅가로 등 권위 있는 패션 브랜드도 오트쿠튀르, 프레타 포르테 등의 패션쇼에서 우리 아틀리에의 비단꽃을 애용해왔습니다. 샤넬의 아이콘 같은 화이트 카멜리아를 먼저 만들었고, 그걸 후에 샤넬에 납품한 것이 바로 저희 아틀리에이기도 하죠. 패션 브랜드에서 데생이나 크로키 등을 들고 오면 그걸 기초로 우리는 비단꽃이 패션과 접목된 작품 하나를 창조해내죠. 지미 추, 루 부탱 같은 슈즈 브랜드와도 함께 일하는데, 할리우드 유명 배우를 위한 지미추의 한정판 슈즈를 위해 코르사주를 제작하거나, 1천 켤레 정도만 생산하는 루부탱의 깃털 달린 신발을 위해 깃털 부분을 창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황수로 박사와 함께한 전시는 그 아들인 최성우 씨(메타로그 아트서비 스 대표)가 우리 아틀리에를 찾아오면서 시작됐죠. 프랑스의 아트 플라워에 관심이 많은 황수로 박사가 샤넬의 전속 플라워 디자이너를 만날 방법을 찾던 중 우리 소식을 듣고 이뤄진 만남입니다. 최성우 대표가 들고 온 한국의 궁중 채화 자료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반했고, 후에 찾은 황수로 박사의 작업실에 서 두 나라의 꽃 제작 도구가 기막히게 비슷하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죠. 특히 인두는 그 모양새가 거의 흡사합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다른 장소에서 다른 문화로 살아왔는데 두 나라 모두 비단꽃을 만들고 있고, 도구까지 유사하다는 건 우리가 모르는 역사의 씨줄과 날줄이 연결된 결과일 듯합니다. 이번 <아름다운 궁중채화>전에서 두 나라의 비단꽃 문화를, 아니 동서양의 꽃 문화를 비교 감상해보는 특별한 재미를 꼭 만나시길 권합니다.”



<아름다운 궁중채화>전에서 찾은 채화의 비밀



1 순조 기축년 진찬 
1829년은 순조(1790~1834)가 40세이자 즉위 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고자 당시 정사를 대신 돌보던 효명세자(1809~1830)가 잔치를 여는데, 이 잔치가 바로 순조 기축년 진찬이다. 연회는 창경궁 명정전에서 연 외진찬, 창경궁 자경전에서 연 내진찬과 야진찬, 왕세자 회작까지 총 네 번 열렸다. 그 모습이 <순조기축 진찬도병>과 <순조기축진찬의궤>에 자세히 묘사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는 명정전 외진찬과 자경전 야진찬을 재현했다. ©이종근(그루비주얼)



2 상화
 
상화床花는 궁중 연회의 진찬 음식 위에 꽂아 장식하는 꽃이다. 가장 많이 쓰이 던 상화는 홍도삼지화로 왕을 비롯하여 잔 치에 참석한 내외빈과 종친, 나인과 내시들 의 진찬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에 놓였다. 대수파련, 중수파련, 소수파련 등 연꽃을 중 심으로 여러 가지 계절 꽃으로 장식한다. 상 화의 정상에는 남극도인이 사슴을 타고 임 금님에게 올리는 상소문으로 태평성대를 기원한다. ©이종근(그루비주얼)

3 명정전 외진찬과 자경전 야진찬
외진찬은 상왕과 왕, 외빈을 위해 베푸는 잔치다. 이번 전시에는 명정전 외진찬의 상차림 중 대전 진어찬안과 세자궁 진찬안, 반화탁을 전시한다. 내진찬은 대비와 왕비를 위해 베푸는 잔치로 왕비가 거처하는 생활 공간인 내전에서 열렸으며, 외진찬보다 더욱 화려하여 장식한 채화의 수량도 더 많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자경전 야진찬의 상차림 중 대전 진어찬안과 세자궁 진찬안, 산화탁, 용촉, 촛대 등을 전시한다. ©민희기

4 지당판
지당판池塘板은 왕실 의례 중 공연을 위해 가상의 연못을 꾸며놓은 일종의 의장화다. 침상처럼 만들어 채색한 준대의 좌우에 대연화통과 목단화병 7개를 놓아 정재(궁중무용)의 무대 배경이 되 는 연못을 정전 안에 제작했다. 무희와 무동들은 지당판 꽃 무대의 주변을 돌면서 꽃을 향해 원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이종근(그루비주얼)

5 준화 
준화樽花는 꽃 항아리인 화준에 장식한 꽃을 일컫는다. 경사스러운 잔치인 국연 때 임금이 앉는 어좌의 왼쪽과 오른쪽 에 놓았다. 화준은 주로 용 문양이 장식된 청화백자(쌀이 한 섬 정도 들어가는)를 사용했으며 위에 심기는 꽃나무는 길이가 약 3m 정도 되는 웅장한 도화나무였다. 꽃나무에는 주로 비단으로 만든 홍도화와 벽도화를 각각 2천 묶음가량 붙여 장식했으며, 꽃과 꽃 사이에는 새들과 초충, 나비를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만들어 꾸몄다. ©이종근(그루비주얼) 

6 윤회매 
기로연(나이 많은 신하들을 위한 잔치)에 쓰인 꽃으로, 밀랍으로 만든 매화다. 꽃-꿀-밀랍-채화로 한 바퀴 돈다 해서 ‘윤회’매다. 왕실뿐만 아니라 사대부 사회에서도 멋과 풍류를 위해 윤회매를 만들었는데, 가난한 실학자 이덕무가 윤회매를 잘 만들어 10전씩 받고 팔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종근(그루비주얼)

7 잠화 
잠화簪花란 왕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의 머리를 꾸미는 꽃으로 직위에 따라 그 종류도 다양 했다. 궁중 연회에서 국왕 이하 제신들이 참여하는 중요 의례 절차 중 하나인 잠화 의식에는 주로 홍도 이지화가 사용되었다. 장원 급제자들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어사화 또한 잠화의 한 종류다. ©민희기


자료 제공 (재)수로문화재단

글 최혜경 | 사진 민희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