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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디자이너 김영진 버려진 귤 밭 농가의 변화
좁고 긴 집이지만 화사하고 아늑하다. 폐허가 된 농가를 재활용 자재로 단장한 한복 디자이너의 세컨드 하우스를 소개한다.

1 귤밭 초입에 오랫동안 바려져있던 작은 농가 두 채 사이를 이어 현관을 만들었다. 면적이 좁아 각 방의 문을 과감히 없애고 한 채는 침실과 거실로, 다른 쪽은 손님방과 주방으로 사용한다. 2 침대와 데이베드만 놓은 작은 침실. 창밖으로 유채꽃과 하늘 풍광이 펼쳐진다. 3 집 뒤쪽 컨테이너 박스에 꾸민 차이킴 매장. 4 담을 쌓는 대신 창밖에 키 높은 동백나무를 심은 욕실. 

사람은 누구나 힘들고 지칠 때면 엄마 품처럼 따스한 고향 집을 꿈꾼다.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지만, 소박한 시골집이 주는 안온함과 위로라는 고향의 감성적 의미를 사람마다 본능으로 움켜쥐고 있기에 일상에 지쳐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날 불쑥 따스한 고향집을 서럽도록 그리워한다. 한국 한복 디자인계의 유명인이자 서울에서 나고 자란 차이 김영진 디자이너도 그러하다.

“서울에 있으면 간혹 밤에 하늘 꿈을 꿉니다. 넓고 파란 하늘이 꿈에 나오지요. 누구나 힘들 때면 고향 집에 가고 싶은데 저 같은 서울 사람은 찾아갈 고향이 없잖아요. 그런데 오래전부터 제주가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었어요. 드넓고 맑고 파란 하늘로 저를 맞아주는 고향이지요.”

여느 도시인이 그렇듯 업무로 심신이 지친 남편을 위해 함께 여행을 떠나온 10여 년 전, 천천히 긴 호흡으로 제주를 여행하면서 그간 중문단지의 호텔에서 며칠 묵어가던 짧은 여행에서는 깨닫지 못한 제주의 느낌을 알게 되었다. 중산간을 정원으로 삼은 두모악의 김영갑갤러리에서는 마치 영혼이 있는 듯 그 사람이 느껴졌다. 이 사람은 왜 평생 제주도를 눈에 담으려 했을까, 제주가 주는 이 묘한 느낌은 무얼까 하는 질문에 이끌려 제주에 머물 집을 구했고, 뭍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방주교회에도 다녔다. 서울에 있을 때는 점점 사람 만나는 게 피곤하게 느껴졌는데, 이 상하게 제주에서는 이웃을 만나는 게 신났다. 농사짓는 것을 좋아하고 마음이 소박하고 느리다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할 이야기가 넘쳐났고, 무엇보다 밥해서 같이 먹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가마솥을 걸어놓고 닭을 삶아 파티를 열기도 하고 다른 날은 녹차를 덖는 농장에 초대되어 향기에 취하기도 했다. 타운 하우스에서 몇 년, 아는 분이 빌려준 집에서 또 몇 년. 디자이너로 뿌리를 내린 서울을 오가며 지내긴 했지만, 꿈에 나올 만큼 제주의 하늘이 그리울 때마다 고향 집으로 달려오며 지냈다. 이처럼 마음이 몸을 이끄는 유랑 같은 삶을 이어온 지 10여 년이 흐르고, 제주에 진짜 내 집을 마련하기로 결심하면서 오랜 제주 생활로 제주 사람이 다 된 남편에게 그가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1 집도 옷도 차이킴의 디자인은 자연을 추구한다. 2 시어머니 사진과 물감으로 장식한 거실 벽면. 
“햇볕이 잘 들고 귤밭이 있고 귤 창고도 있어야 했어요. 제주도에서는 큰 집이 필요 없어요. 그저 사람을 초대해서 같이 밥 먹을 공간만 있으면 되니 이웃이 모일 귤 창고가 있으면 좋지요.” 조건에 맞춰 찾다 보니 꽤 넓은 부지를 구하게 되었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좋아하는 사람 딱 다섯 명만 모아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영진 디자이너 부부와 문화 코드가 잘 맞고 제주도에 살고 싶은 의지가 강한 사람, 제주에서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한 번에 선뜻 오케이를 외치는 사람! 다른 조건을 나열할 필요도 없이 지인 넷이 순식간에 이웃을 자청해 고향 집 프로젝트는 순풍을 만난 듯 순조롭게 항해를 시작했다.

느리게 흘러가는 제주의 시간처럼 타운을 짓는 것도 천천히 할 일. 그에 앞서 부부는 귤밭에 나란히 있는 농가 두 채를 이어 집을 꾸몄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터라 천장에선 쥐 떼가 쏟아졌으며 독충에 물려 응급실에 가게 만들던 집의 벽을 페인팅으로 말끔히 칠했고 바닥은 에폭시로 마감했다. 모든 작업은 최대한 간소하게, 수리와 단장에 필요한 자재는 대부분 시공사를 운영하는 남편이 모델하우스를 철거할 때 버리지 않은 것을 서울에서 배로 실어와 사용했다. 창틀부터 소파까지, 거실의 원목 장식과 하물며 집 뒷마당에서 차이킴 매장으로 변신한 컨테이너까지 철거품을 재활용했다. 거기에 10여 년간 제주에 살면서 모은 소품을 보태니 더할 나위 없을 만큼 마음에 쏙 드는 아름다운 농가 주택 이 완성되었다.

“디자인을 하고 옷을 만드는 일을 하지만, 멋을 만든다는 게 이 아름다운 세상에 또 하나의 공해가 되지 않을까 고민해요. 우리 삶에서 생각 없이 소비하고 버리는 게 너무 많은데, 여기 제주 집에 누워 하늘을 보면 내가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산 게 아닌가 싶죠. 아침에 토마토 하나, 달걀 하나만 먹을 생활비만 있으면 되니 결국엔 생활을 위해 가져야 하는 것은 아주 조금이 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곤 해요.”

1 서광 춘희에서의 저녁 식사엔 자연스레 이웃이 모인다. 김치와 회 한 접시, 와인만 있어도 즐거운 파티가 된다.

마음의 본향, 제주 고향 집에 오면 종일 집에만 있는다.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마음껏 하늘을 볼 수 있는 하루가 축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제 주의 하늘을 보면 마음이 너그러워져 미운 것도 용서하게 되었고 자신을 되돌아보니 저절로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 여백엔 새로운 상상이 밀려들었다. 디자이너로서 창작력이 한껏 더 움트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정착한다는 건 자기 직관을 믿는 일이에요. 꼭 내 집을 짓지 않아도 일단은 연세(제주도는 월세가 아닌 연세로 집을 얻는다)라도 내고 제주도에 오래 살아봐야 그 맛을 알 수 있어요. 내가 이곳에 맞는지 아주 천천히 느껴봐야 해요.”

1, 2 서광 춘희와 김영진 디자이너의 집 사이 마당에 놓인 차이킴 유랑 매장. 페기하는 컨테이너를 재활용했다. 

김영진 디자이너는 직관을 따르면 자신이 살아야 할 곳을 느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제주에서 만난 이웃은 그런 공통점이 있고, 덕분에 자신에 게 진짜 고향 집을 선물하고 행복에 정주했다. 머지않은 날에 지인과 새집을 완성하면, 침대 하나만 놓고 파란 하늘이 벽화가 되고 꽃을 피운 귤 나무가 가구를 대신하도록 꾸밀 작정이다. 대신 농가를 고친 집은 손님에게 내주고 그가 디자인한 옷을 더 너른 세상으로 유랑을 떠나보내면 어떨까 하는 즐거운 상상도 해본다.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아비뇽연극제에서 차이킴 유랑 매장을 열고 디자인하며 마치 유랑 극단처럼 사는 인생. 제주 집의 마당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얼굴을 내밀어 넓고 푸른 하늘을 만날 때 그는 세상 누구보다 평안하고 행복하다.



김영진 디자이너에게 묻다 _제주 농가를 내집으로 단장하려면? 
효율적인 에너지원을 찾자 
제주도에는 도시가스가 없다. 우리 집엔 비용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이유로 프로판가스 보일러를 놓았는데 추위를 많이 타서 보일러를 자주 가동하니 언제 가스가 떨어질지 몰라 조심스럽고, 기름값보다 많이 드는 듯해 뒤늦게 기름보일러로 바꾸려고 고민 중이다. 이처럼 이중으로 비용이 들지 않도록 애초에 태양열, 전기, 가스, 기름 등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효율적 에너지원을 설비하는 게 중요하다. 
상하수도와 전기를 확인하자 
지인이 굉장히 싼값에 너른 땅을 구했는데, 알고 보니 전기가 안 들어오는 지역이라서 전기를 끌어오는 데만 큰 비용을 지출했다. 공인중개소가 없는 제주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생긴다. 기존 농가가 있던 자리라도 상하수도나 전기 등 기반 시설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이웃과 커뮤니티 파티를 열어라 
제주로 이사 온 사람에게 이웃과 소통하는 것은 곧 문화생활이다. 농장에 초대되어 가고, 교회 음악회에 참석하고, 지인의 집에 식사하러 가는 일은 제주 생활의 또 다른 재미다. 밥을 하고 김치찌개를 끓이고 모슬포에서 회 한 접시를 떠 와서 함께 나누어 먹는 소박한 준비로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파티를 열 수 있다. 



1 이름대로 서광면의 한적한 길가에 위치한 서광 춘희. 2 “제주 인심은 성게에서 난다”는 말처럼 성게를 풍성히 올려 귀한 손님을 맞는 성게라멘. 3 졸인 돼지고기, 생선, 새우로 만든 춘희 커틀릿. 4 실내는 한국적 소품과 제주 토속품으로 꾸몄다. 

귤밭 정원 속 올데이 다이닝
서광 춘희
김영진 디자이너의 집 뒷마당에 있는 차이킴 유랑 매장과 마주 보는 귤 창고 건물은 카페 ‘서광 춘희’. 이곳을 운영하는 송창훈 대표는 제주 토박이자 김영진 디자이너 부부와 절친한 지인으로, 포도호텔 등 제주의 럭셔리 관광 산업에 종사했다. 제주에서는 이웃이 모여 식사할 일이 많아서 김영진 디자이너는 작은 집에 사는 대신 뒷마당의 귤 창고를 그런 모임이 가능한 커뮤니티 카페로 꾸미고 싶었다.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한 송창훈 대표가 카페를 맡으면서 그 꿈이 실현되었다. ‘서광’은 카페가 있는 지역명이고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뜻하는 ‘춘희’는 김영진 디자이너가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다. 제주를 사랑하고 북제주에서 유기농 채소 농장을 운영하는 부모님, 나이 아흔에도 물질을 하는 해녀 할머니를 둔 송창훈 대표는 <마스터셰프코리아> 우승자인 김승민 셰프에게 특별 의뢰해 제주도만의 특화된 식자재를 이용한 메뉴를 개발해냈다. 성게와 일본 라멘을 조합한 성게라멘과 흑돼지와 생선, 새우를 색다른 방식으로 요리한 춘희 커틀렛이 그것. 성게라멘은 시원하고 맑은 국물에 일본식 라멘과 채소를 넣고 성게를 올린 고급 국수 요리다. 춘희 커틀릿은 삼겹살을 동파육처럼 조린 후 튀겨 꼬치에 꽂은 특이한 커틀릿. 생선과 새우도 곁들이는데 생새우 안에 다른 새우 완자를 넣고 말아서 튀겨내는 정성스러운 음식이 새하얀 플레이트 위에 멋스럽게 차려진다. 4인 이상이 미리 예약하면 바비큐 등 오픈 푸드로 프라이빗 다이닝도 제공한다. 구좌 당근 주스, 딸기 주스, 토마토 주스 등 제철 과일을 이용한 건강 주스와 법환리에서 로스팅하는 신선한 커피와 차도 있다. 오전 11시부터 영업하며, 라스트 오더는 오후 8시인 올데이 카페 앤 다이닝으로 운영한다.
주소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서동로 367 문의 064-792-8911

글 김민정 수석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