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가로수 잎이 노랗게 물든 성북동 언덕길에 길게 줄이 늘어섰다. 가을볕 아래서 반나절을 기다리며 이들이 만나려는 건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 21명이 그린 그림으로, 한국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은 1971년부터 지금까지 43년간 해마다 봄가을에 두 차례씩 무료 기획 전시를 개최해 수장품을 공개해왔다. 긴 행렬 옆으로 은발의 노신사가 지나간다. 줄을 선 한 학생이 “어휴, 아직 날씨가 덥네”라며 혼잣말을 하는데,때마침 옆을 지나던 이 노신사가 면구스러운 듯 얼굴이 빨개져 성큼성큼 사라진다. 그의 이름은 전영우.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문화를 말살하려던 조선총독부, 골동품을 되팔아 거금을 챙기려던 친일파와 일본인 수장가들이 마구잡이로 일본으로 반출하던 우리 민족의 진귀한 미술품을 전 재산을 들여 되찾고, 한국전쟁 중에도 보화각(간송미술관의 옛 명칭)에서 오롯이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의 삼남이자, 현재 간송미술관 관장이다.
“제가 어디를 나가려면 그분들 옆을 지나야 하는데, 줄을 서도 너무 오래서야 하니까 당최 미안해서 고개를 못 들겠어요. 특히 비가 오거나 날이 덥거나 할 때면 민망해서 마음이 힘들어요. 그래서 우리끼리 이야기할 때마다 ‘한계가 왔다. 변화를 시도해야 할 때다’라는 의견이 종종 나왔었어요. 그런 오랜 숙고를 한 끝에 작년에 비영리재단인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된 것이지요. 허허.” 문화재 수집으로 한 독립운동 간송은 1938년, 일제의 횡포가 극에 달할 무렵 지금의 성북동에 보화각을 세웠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독립하는 그날까지 그곳이 조선 최고의 문화재 박물관이라는 소문조차 내지 않았다. 뜻을 모은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이야 자유롭게 방문하며 예술 연구와 감상을 할 수 있었지만 일본인의 출입은 철저히 불허했다.
고려의 혼이 담긴 청자도, 석탑도, 한글 창제 원리가 적힌 훈민정음도 이곳 보화각에 있다는 사실을 조선총독부는 몰라야 했다. 일제는 그저 세월도 정치도 모른 채 골동품 수집에 정신을 쏟는 어느 재산가의 좋은 집 정도로 알면 족했다. 그곳 보화각은 민족의 정신인 문화를 지키려는 간송과 문화인들의 독립운동 기지였으니까. “간송이 왜 문화재를 수집했는지 알려면 그 배경도 알아야 합니다. 일제가 펼친 우리나라 문화 말살 정책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잔인했어요. 조선총독부를 만든 일제는 문화 자체를 흡수해 한반도의 정체성을 말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교육도 바꾸고 우리 이름도 바꾸게 했지요. 1910년에 한일합방을 했지만, 그 계획은 이미 수년 전에 세워 오랫동안 조선 곳곳의 미술품과 문화재를 샅샅이 조사 연구해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문서로 정리해놓을 만큼 치밀했어요. 지금 독도 문제도 미리 철저히 준비한 것처럼 말입니다.”
전영우 관장의 아버지 간송은 1906년 서울 종로에서 장안의 손꼽히는 거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 시절 잠시 귀국한 그는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나면서 우리의 문화재를 지키려는 뜻을 품었다. 위창은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추사의 계보를 잇는 서화의 대가로,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고증을 거쳐 고대부터 조선까지 서화가에 대한 기록을 총정리한 <근역서화징>을 집필했다. 대학 졸업 무렵 집안 어른을 차례로 여읜 간송은 양부와 친부의 재산까지 모두 상속받아 한국 최고의 거부가 되었다.
위창에게서 옛 서화와 골동품을 보는 안목을 배우고 고증법을 익힌 그는 선조가 남긴 종로의 미곡상을 운영하는 동시에 거간(전국을 돌며 골동품을 찾아내는 사람)에게서, 경성미술구락부의 경매에서, 일본인 수장가에게서, 영국인 수장가에게서 절대 일본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판단한 수작秀作을 되찾아오는 일에 집중했다. 이는 단순히 재력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조선은 물론 일본 여기저기 흩뿌려진 수많은 골동품 중 보존 가치를 판단하고, 진본을 직접 가릴 수 있는 직관과 미감이 필요했다. 또 후손의 연구를 위해 한 작가의 일대기를 망라하는 작품을 종으로 횡으로 선택 수집해야 하니 역사와 고증에 누구보다 밝아야 했다. 게다가 서슬 퍼런 조선총독부, 일본인 재력가들과 경합하려면 재빠른 판단력과 강한 담력이 있어야 했고 무엇보다 믿음직한 협력자와 천운까지 두루 도와야 하는, 개인에게는 실로 막대한 소명이었다.
따뜻한 아버지, 간송 전영우 관장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보화각이 있는 성북동의 집 ‘북단장’에서 태어났다. 간송이 임종할 때에도 곁에 있은 막내아들로, 지금도 간송미술관 내 관저에서 형인 전성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과 나란히 옆집에 살고 있으니 70년이 넘는 그의 전 생애를 간송미술관에서 보냈다. 아버지 간송과 함께한 성북동 생활은 즐거웠다. 한국 고미술품 대수장가이자 3・1 독립운동이 움튼 보성학교를 보전한 교육가라는 설명에 간송에게서 엄격하고 완고한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막내아들이 추억하는 ‘아버지 간송’은 마냥 착한 분이었다. 자녀에게 무엇이 되어라, 무엇을 해라 강권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발한 가정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놀아주는 따뜻한 아버지였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요. 허허. 아버지의 아이디어로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우리 집은 가족 신문을 만들었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큰형 가족이 한 팀, 우리 가족이 한 팀으로 두 신문이 경쟁했는데, 양쪽이 신문을 바꿔 읽어보니 서로에 대한 가십이나 충고 기사를 주로 썼어요. 허허. 큰형은 덩치가 좋고 잘 먹어서 대식가라고 불렀는데 그래서 신문 이름도 대식일보였어요. 사진 대신 그림을 그리고 제호까지 만들어 요즘 타블로이드 신문 못지않게 제대로 만들었지요.” 1945년 드디어 해방이 되자, 간송은 더 이상 문화재를 수집하지 않았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는 게 소임이었으니, 해방된 대한민국에서는 누가 문화재를 소유하든 안심이라고 생각했다.
서울대 미대 졸업반 때 아버지를 떠나보낸 전영우 관장은 상을 치르고 문화재를 정리하는 동안 때마침 서울대 문리대에 생긴 고고미술사학과에 편입했다. 이후 고미술을 연구하며 대학에서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은 그는, 미대생은 물론 일반 관객도 좋아하는 작가든 아니든 가능한 한 많은 작품을 대하고 느껴보아야 자연스레 미술 작품을 보는 안목이 높아진다고 조언했다.
일제강점기나 지금이나 개인의 우아한 취미 생활로 진귀한 골동품을 수집하는 이는 많지만, 간송의 수장품을 유일하게 ‘문화재 수집으로 한 독립운동’이라고 평하는 것은 이 같은 간송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 우리 국민의 소중한 조형적, 정신적 문화유산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기와집 수십 채를 살 금액으로 작은 문화재를 구입하고, 일본까지 날아가 영국 수집가와 협상하고, 인천항에서 배에 실리기 직전의 석탑을 구출하는 등 숱한 일화를 남기고 그것을 국민과 공유하려던 수집가 간송이지만 평생 신문에 얼굴 한 번 내지 않았다(단 한 번의 기사는 그가 타계한 후 난 부음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무서운 기세로 내려와 단하루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성북동 북단장의 대문을 부수고 들어온 인민군 기마 부대는 다행히 일본으로부터 지켜낸 보화각 문화재의 중요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간송이 피신한 사이 그들은 문화재를 평양으로 고스란히 옮기기 위해 서예가 소전 손재형과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등의 전문가까지 불러 문화재를 포장하도록 했다. 일제강점기부터 문화재를 지켜온 간송의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던 두 사람은 각종 핑계를 대며 포장을 미뤘고, 소전은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다리가 다친 척하는 기지까지 발휘해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할 때까지 문화재 북송을 지연시켰다. “참으로 굴곡진 역사죠. 이번엔 부산으로 피란을 가야 했어요. 사람은 못가도 이것만은 꼭 가야 한다며 온 가족이 매달려 문화재를 종이에 싸고 상자에 넣었어요.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는 상자에 번호를 쓰는 일을 맡았어요.
다행히 천우신조로 무사했지만, 사람도 피란하기 어려운 때 그 많은 짐을 가지고 움직였다니. 지금 다시 하라면 못 할 것 같아요. 허허.” 간송의 유지를 잇는 사람들 전쟁은 끔찍했다. 하지만 피란 시절 작은 시골 토방에서도 간송은 여전히 자녀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였다. “보리 타작을 하고 나면 시골 토방에 책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셨어요. 추사의 글씨나 화가의 무늬를 따라 그려보며 놀았는데 피란방 벽이 습작으로 가득했지요. 그때부터 저도 모르게 어쩌면 이런 계통의 일을 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간송이 타계하시고 제가 미술관을 맡았을 때 훗날 나를 이렇게 부려먹으려고 미리 연습을 시키셨구나 하고 깨달았지요.”
* 해당 기사는 당월 셋째주에 최종 업데이트 됩니다.
- 간송미술관 전영우 관장 간송,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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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자꾸 보면 미운 정 고운 정이 생기듯 문화재나 작품도 자꾸 보면 공부를 안 해도 이해가 가고 정이 붙습니다. 우리나라 조형은 자연스레 우리 눈에 들어오고 마음의 씨앗이 됩니다.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났으니 많이 볼수록 편하고 자주 볼수록 마음으로 느낄 것입니다. 그것이 문화재입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