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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볼 만한 공간 삼례문화예술촌 삼삼예예미미, 양곡 창고에 책문화가 깃들다
일제 강점기에 쌀을 수탈하기 위한 양곡 창고로 쓰던 건물이 흥미진진한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아날로그적 향수와 활자의 힘이 꿈틀거리는 이곳에서 책 문화의 미래를 본다.


‘책 만드는 남자’ 김진섭 대표의 책공방 아트센터 내부. 전시한 전통 인쇄 기계들은 실제 작동이 가능하다.

농협 창고를 개조한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KDI)의 디자인 뮤지엄. 현재 핀업 디자인 어워드 입상 작품 중 일부를 전시 중이다.

삼례가 어디지? 완주시에서 두 번째로 큰 마을이지만 생경하다. 지도를 보면 전주의 북쪽 끝자락에 붙은 작은 마을, 볼거리 먹을거리를 찾으면 전주로 가라 말할 정도로 무심한 이곳에 책 마을을 개관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동안 수차례 전북 여행을 했지만 삼례 가는 길은 처음이었다. 완주시 삼례읍 구역사에 도착하니 그 옆으로 시간의 더께가 쌓인 건물이 눈에 띄었다. ‘협동생산 공동판매 농협 창고’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찍힌 낡은 벽면과 농협 로고가 박힌 녹슨 철문은 이곳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을 말해줬다. 붉은 벽돌의 근대식 건물에는 ‘불조심’ 글씨가 아스라이 박혀 있어 피식 웃음이 났다. 일제 강점기 완주 지역에서 생산한 쌀을 삼례역을 통해 일본으로 보내기 전에 보관하는 창고였고, 이후 1970년대까지는 농협의 공동 창고였다. 이 창고가 책공방 아트센터, 책 박물관, 목공소, 문화 카페오스, VM 아트 갤러리, 디자인 뮤지엄으로 탈바꿈한 것. 국내에 역사적 건물을 개조해 쓰임새를 바꾼 사례는 있지만, ‘책’을 중심으로 문화 공간을 만든 경우는 삼례가 처음이다. 


1 책공방 아트센터에서 만들 수 있는 북 아트. 가죽 다이어리, 코덱스 책, 판화 프레스 티셔츠 등 다양한 북 아트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2 책 박물관의 대표 작업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3 책공방 아트센터의 금속 인쇄 활자들.
4 김진섭 대표가 수집한 농협 로고가 박힌 활자. 책공방 건물이 과거에 농협 창고였음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우연이다.

개관전 <완주! 꿈꾸는 책마을 - 책박물관 디자인>이 열리는 책 박물관.

책공방 아트센터의 북 아트.

(왼쪽부터) 책공방 아트센터의 김진섭 대표, 책 박물관의 박대헌 관장, 김상림목공소의 김상림 대표.


아날로그 인쇄술의 예술을 말하다 취재팀을 가장 먼저 반긴 이는 책공방 아트센터의 김진섭 대표였다. 그가 운영하는 책공방에 들어서자 묵직한 무게감이 전해지는 인쇄 기계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작동 버튼을 누르면 포효하는 사자처럼 육중한 굉음이 공간을 가득 채울 것 같았다. “책 만드는 기계가 2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산업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그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숙련된 기술과 장인 정신이 필요한 아날로그 방식의 인쇄술을 볼 수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독일의 인쇄업자인 슈타이들은 그가 만든 출판물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규모 국내 전시를 하는데, 우리나라 출판 문화는 저평가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책공방을 찾는 사람들이 인쇄 과정을 들여다보고 손수 책을 만 들어보는 시간을 통해 책이 가진 문화적 저력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1920년대의 나무 인쇄 기계, 문장 인쇄기인 라이너타이프, 레터프레스 같은 활판 인쇄기들, 책상자와 책등을 만들 때 사용한 호침기 등은 모두 그가 국내외를 수소문해 모은 인쇄 기계들이다. 특히 나무로 제작한 인쇄 장비는 예전 방식으로 인쇄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를 극적으로 찾으며 다시 작동할 수 있도록 조립했다. 국내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귀한 보물이다. 수백 개의 활판용 활자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풍경도 인상적이다. 금속성이 잘 드러나는 최신 활자도 있지만, 50년 이상 되어 시커메지고 마모된 활자도 있다. 소중한 문장을 찍어내기 위해 수백 번, 수천 번 노동한 값진 시간의 흔적이리라. 팝업북 워크숍이나 아트북 만들기 수업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김진섭 대표는 언젠가 ‘책 만드는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꿈이다.

진짜 ‘책 문화’를 위하여 “책 박물관에 전시된 박물관 로고와 전시 포스터, 티켓, 초청창, 책갈피, 띠지, 브로슈어 등의 다양한 디자인은 책 박물관의 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디자이너 정병규, 정재완, 홍동원, 일본의 종이 예술가 사카모토 나오아키 씨 등이 참여해 작업한 작품들은 실험적이고 창의적이며 문화를 담고 있지요. 책은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장르와 접목할 수 있는 무궁한 잠재력을 지녔어요. 책 박물관은 책이 가진 정체성을 말하고자 합니다. 진짜 ‘책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죠.” 책 박물관에서 만난 박대헌 관장은 삼례문화예술촌을 조성하는데 중심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가 영월 책 박물관을 완주로 이전하면서 1999년부터 기획한 다양한 전시 작품을 특별 개관 전시 <완주! 꿈꾸는 책마을 - 책박물관 디자인>에서 재구성했다.

책 박물관은 지극히 소비적으로 변모한 책 문화를 지양하고 진정한 책 문화를 선도하고 싶은 박 관장의 바람이 함축된 공간이다. 이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입장권만 봐도 드러난다. 만화가 송광용 씨의 그림을 삽입해 책갈피 모양으로 디자인한 입장권으로 종이와 끈도 발품을 팔아 구입해 소장 가치가 있도록 만들었다. 함께 전시한 장서표는 책 주인임을 알려주는 일종의 표찰로, 무형문화재 장용훈 씨의 한지와 판화가 이송열 씨의 판화로 제작했다. 소설가 은희경, 공연 기획자 송승환, 가수 양희은 씨 등 문화 인사 열다섯 명이 그들을 상징하는 물건이나 떠오르는 이미지를 판화로 제작한 작품이 흥미롭다. 나를 나타내는 이미지를 판화로 제작해 소장 도서에 담는다면 책의 가치가 훨씬 높아지지 않을까? 장서표와 시전지 안에는 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책 주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외에도 1946년부터 30여 년 동안 교과서 그림을 그린 화가 김태형 씨, 40년간 만화가의 꿈을 담은 송광용 씨의 만화일기 등은 책 박물관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귀한 작품들이다. 책에 대한 외경심과 뜨거운 열정으로 완성한 박대헌 관장의 책 박물관은 삼례문화예술촌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무형문화재 장용훈 씨의 한지와 판화가 이송열 씨의 판화로 작업한 소설가 은희경 씨의 장서표. 책 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사가를 재현한 김상림목공소의 가구들. 옛 목수들이 사용하던 도구들도 전시되어 있다.

현대 미디어 작가들의 기획전이 열리는 비주얼 미디어 아트 갤러리.


지리산의 목수가 삼례에 온 까닭은? 삼례문화예술촌에는 책과 관련한 공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두툼한 목재가 쌓여 있는 붉은 벽돌의 건물은 목수 김상림 씨가 이끄는 목공소.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코끝에 와 닿았다. 조선시대 서가와 사랑방의 전통 목가구를 재현하는 김상림 씨는 오랜 시간 지리산에서 머물며 전통 가구를 만들었다. 박대헌 관장의 제안으로 삼례에 왔지만, 그는 지역을 위한 사회 환원 활동에 관심이 많다. “지역 사회를 위한 목수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된다면 더욱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벌써 목수 학교 1기생 모집이 끝날 정도로 관심도도 높습니다.” 목공소 공간 내부에는 과거 창고에 저장한 쌀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큰 나무 기둥을 벽면 전체에 두른 구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다른 건물과 달리 사선이 아니라 30cm 간격의 우물 정井자 모습이다. 1980년대 초에 증축한 건물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구조의 건물이지만 지은 시기에 따라 디자인 면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이 흥미롭다. 목공소 안에는 거두, 먹칼, 그므개, 골대패, 먹통 등 김상림 씨가 수집한 골동 기구들을 전시해 옛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세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곳 삼례문화예술촌은 어쩌면 비주류의 영토로 인식할 수 있는 책 문화의 이상적인 미래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책을 사랑하는 선한 사람들과 열악한 상황에서도 책 문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뜨거운 열정을 보았다. 그토록 갖고 싶던 책을 손에 쥐고 밤새 보듬으며 책 속 이야기에 가슴 두근거리던 시간을 생각한다면 이 보석 같은 마을을 꼭 찾길 바란다. ‘삼례’라는 작은 마을이 책과 문화와 사람이 공존하는 향기 나는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기를!

주소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역로 81-13 문의 070-8915-8121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김동오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