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 가든에 떠 있는 듯한 미술관 전경. 미술관은 각각 네 개의 윙 구조를 이루며 사각, 삼각, 원형의 빈 공간으로 연결된다. 붉은 조형물은 알렉산더 리버만의 ‘아치웨이Archway.’
“당신은 진정한 소통을 위한 단절을 이해하는 사람인가?” 강원도 원주에 문을 연 ‘한솔뮤지엄’은 그 해답을 발견하는 기회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이면 닿는 강원도 두메의 산 정상, 정확하게 말하면 오크밸리를 마주한 산꼭대기가 뮤지엄 자리다. 주차장 풀밭까지 달려나온 웰컴센터. ‘이제 멋진 미술관이 등장하겠지’라는 관람객의 추측은 건축가가 의도한 자연이라는 여백에서 부서진다. 패랭이꽃 80만 주로 조성한 꽃밭이 펼쳐지고, 청정한 강원도 하늘로 솟아오른 마크 디 수베로의 작품이 뒤이어 나타난다. 80만 개의 보랏빛 색채, 그 이상이 혼합된 숲의 향기. 대지 면적 7만 1천1백72㎡, 전시 공간 5천4백45㎡, 관람 동선 2km 이상 등 국내 최대 규모의 한솔뮤지엄은 산꼭대기에서 ‘느리게 산책하는 미술관’이다.
1 청조갤러리는 김환기, 박서보, 김창열 화백 등 한국 현대 미술의 대표 작가 작품을 전시한다.
2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씨의 작품을 위해 특별히 계획한 청조갤러리 3은 천장에서 내려온 빛이 마치 미디어 아트처럼 날씨와 시각에 따라 이동한다.
3 미술관 뒤편에서 바라본 알렉산더 리버만의 ‘Archway’.
4 뮤지엄 카페에 앉아 차와 함께 음미할 수 있는 미술관 뒤편의 워터가든 전경.
풍경과 건축물이 사라졌다 드러나며 관람객에게 무언의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안도 다다오식 건축의 유희.웰컴센터를 나서면 80만 주의 패랭이꽃이 자라는 개방형 정원이 펼쳐지고, 이는 다시 3백80그루의 자작나무 숲길로 모이어진다. 미술관 건물은 자작나무 숲 너머 워터가든 뒤편에 숨어 있다.
잠시, 도시와 단절되고픈 사람에게 도시 촌민이 건축물의 부재에 이내 조바심을 낸다. 패랭이꽃밭 너머에서 그 마음을 꿰뚫어본 자작나무 군락이 이렇게 조언한다. “숲의 좁은 길로 돌아가세요. 그래야 넓어집니다.” 자작나무 3백80그루가 이룬 숲 속으로 들어가니, 자연의 귀띔처럼 두 시간 전 떠나온 도시의 심상이 소멸한다. 도시는 멀어지고 자연이 다가선다. 바람 냄새, 빛의 질량, 하늘의 촉감…. 내게 없던 감각이 일어서니 이런 게 자연과의 소통일까.
자작나무 숲길은 다시 자작한 수면으로 이어진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반듯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자연에 안긴 미술관을 만날 것을 예감한다. 한솔문화재단은 자체 컬렉션 그리고 40여년간 종이 유물과 미술품을 수집한 한솔그룹 이인희 고문의 소장품을 대중과 나누기 위해 8년 전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초대했다. 자연 속 미술관을 꿈꾼 이 고문의 뜻에 따라 재단이 미리 매입한 부지는 강원도의 산 정상, 돌이 많아 오크밸리의 산악 자전거장으로 이용하던 곳이다. 험산에 올라 강원도의 협곡을 내려다본 건축 거장은 그 자리에서 스케치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후, 돌을 캐고 땅을 골라 현장 사진을 보내면 안도 다다오가 오늘의 사진에 내일의 건축을 스케치해 산으로 되돌려보내는 방식으로 8년간 그들은 친밀하게 협주를 했다. 그리고 2013년 5월, 도시와 단절을 꿈꾸는 사람들이 찾아와 청정 숲길을 거닐며 미술과 건축, 자연으로 내적 질서를 회복하는 ‘힐링 미술관’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요즘, 건축에 다가서고 싶은 사람에게 고요한 워터가든의 돌담을 끼고 돌면 의도적으로 감춘 미술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과 면의 정확한 구획과 노출 콘크리트, 유리창과 틈새 사이로 빛과 자연이 건물 깊숙이 들고 나는, 안도 다다오식 건축법 그대로다. 반면, 뮤지엄 전체에서 노출 콘크리트와 나란히 배치한 황토빛 돌담은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색감이 온화한 이 돌의 이름은 ‘파주석’, 이름처럼 경기도 파주에서 실어왔다. 관람객이 미술관에서 정겨운 한국 정서를 느끼면 좋겠다는 이 고문의 바람과 건축가의 창의력이 조화를 이뤄 파주석이라는 정감 있는 돌을 찾아낸 것이다. 워터가든에 재단 소장품인 알렉산더 리버만의 ‘Archway’를 놓을 때도 의견이 일치했고, 땅을 고를 때 나온 돌을 버리지 않으려고 애초 계획하지 않은 스톤가든을 조성하는 대모험도 용감히 함께했다. 이런 팀워크에 깊은 인상을 받은 안도 다다오는 개관식에서 예정한 시간을 초과할 만큼 다채로운 이야기로 만족감을 전했다고 한다.
성공적인 협연은 무지한 관객의 무의식도 감동시키는 법. 그래서일까, 홍보를 하지 않은 개관 초기인데도, 하루 관람객 수가 예상의 두세 배를 훌쩍 웃돌고 있다. 가족이나 일행과 왔다가 혼자서 다시 오고 싶어, 혹은 계절이 바뀔 때 또 오고 싶어서 아예 연중 자유 관람이 가능한 뮤지엄 멥버십을 신청하는 이도 많다. 특히, 그간 일상의 궤도 밖으로 쉽게 탈출하지 못한 중년 남성들의 반응이 열렬하다. 자연, 미술, 건축으로의 일탈. 어떤 이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에 앉아 세월을 정지시키고, 누구는 다랑논처럼 아름다운 수변 카페에서 근심을 흘려보낸다. 미술이, 건축이, 자연이 말을 걸어오니 사람 소리에 귀를 막은들 어떠하리. 대화가 부족하고 위로가 낯설어 인생이 틀어진 중년의 고된 심경이 멀어진다. 그 자리에 깨어난 감성과 영혼의 평온함이라는 소통의 열쇠가 놓인다.
1 노출 콘크리트, 파주석, 창으로 들어온 자연의 하모니가 따스한 감성을 전하는 한솔뮤지엄 내부.
2 삼각, 사각, 원형으로 구성한 복도에서 안도 다다오의 건축미가 느껴진다.
워터가든에 자리한 뮤지엄 카페. 차와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스톤가든과 그곳에서 내다본 풍경. 아득히 보이는 산 건너편이 오크밸리 리조트다.
본디, 미감美感을 되찾고 싶은 사람에게 전시 공간은 크게 페이퍼갤러리, 청조갤러리, 제임스 터렐관으로 나뉜다. 페이퍼갤러리는 총 네 개 관으로 한솔제지와 이 고문이 오랜 세월 어렵게 수집, 연구, 보전한 ‘종이 예술품’을 전시한다. 종이의 탄생 과정과 제지 기술 발전사를 볼 수 있어 교육적이며, 선조들의 탁월한 공예 기법에 넋 놓을 만큼 전통적이다.
특히, 페이퍼갤러리 3에는 한솔뮤지엄이 소장한 국보 제277호 대방광불 화엄경 등의 중요 문화재도 있어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유익하다. 가족 관람객은 페이퍼갤러리 4와 판화 공방을 빼놓지 마시기를. 페이퍼갤러리 4에선 독일 설치 예술 그룹이 작업한 먹물 방울이 종이에 떨어져 용비어천가 한 구절로 번지는 마술 같은 미디어 아트로 관람객을 놀라게 한다. 예술가의 작업을 엿보고 스탬프를 찍어 직접 엽서를 만드는 판화 공방에는 우체통이 있다. 관람객이 쓴 엽서를 전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인데, 큰 호응 덕분에 전국으로 엽서를 보내는 게 뮤지엄 직원들의 행복한 숙제가 되었다. 아름다운 수변의 뮤지엄 카페, 소규모 회의와 모임을 위해 대관해주는 세미나실도 판화 공방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인희 고문의 호를 딴 ‘청조갤러리’는 20세기 한국 미술의 대표 회화, 판화, 드로잉 소장품 중 엄선한 1백여 점을 전시한다. 청조갤러리 1에는 김환기, 유영묵, 한묵, 묵신, 정규, 유영채, 남관, 이중섭, 장욱진, 박수근 화백의 작품 등이 한국 모더니즘의 양식을 설명한다. 청조갤러리 2에는 주로 자연과 향토 의식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을 전시하는데, 오지호, 도상봉, 손응성, 박고석, 윤중식, 이대원, 이쾌대 화백 등 다른 미술관에서 접하기 어려운 작가들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씨의 작품을 위한 청조갤러리 3에는 천장을 뚫어 빛을 들인 우물 같은 공간을 연출했다. 어둠과 빛, 직각과 원형이 쉴 새 없이 변하는 비디오 아트를 호위해 현대적 ’고요함’이라는 역설을 만들어낸다. 청조갤러리 4에는 권진규, 문신, 존배 작가 등 근대 조각의 맥락을 잇는 조각가들과 김창열, 박서보, 정상화, 이우환 화백의 명작이 한국 미술의 추상을 대변한다. 이번에 전시한 작품은 한솔뮤지엄이 소장한 작품 중 극히 일부로, 한솔뮤지엄은 계속해서 새로운 주제의 전시로 관람객을 맞이할 계획이다.
주변 빛에 따라 하늘색이 다르게 보이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 ‘스카이스페이스’.
진정, 단절된 나와 소통하고픈 사람에게 미술관을 나서서 제임스 터렐관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스톤가든. 이곳은 안도 다다오가 한솔뮤지엄에서 시도한 또 하나의 한국적 실험으로, 뮤지엄 부지에서 나온 돌을 모아 신라의 고분을 모티프로 한 아홉 개의 곡선 마운드를 연출했다. 산 정상의 돌무덤 사이에 헨리 무어의 그 유명한 인체 조각, 네르나르 브네와 토니 스미스 등의 명작이 자연과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어 느린 산책이 곧 진중한 관람 자체가 된다.
스톤가든 아래에는 한솔뮤지엄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특별한 상설 전시관이 있다. 올여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도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는 ‘빛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관으로, 그의 작품 네 개를 한 번에 퍼블릭 미술관에서 만나는 경우는 그간 세계에서 유례가 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네 작품 모두를 전시할 계획은 아니었다고 한다. 강원도를 방문해 청명한 하늘에 매료된 제임스 터렐이 즉석에서 작품을 제안해 네 작품이 산 정상으로 모이는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 작품이 완성된 후 제임스 터렐은 “내 작품을 보여주는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평했다는 후문이다.
돔 형태의 작품인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에 앉아 천장 밖으로 하늘을 응시한다. 보라색, 파란색, 남색 등으로 하늘빛이 변한다. 생경하고도 경 이로운 전율! 우주가 분열하는 것일까, 내 정서가 분열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는 돔 주변의 빛 변화에 적응해 내 눈이 빛을 지각하는 방식이자 효과다. 예술가와 자연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한 내 몸의 빛 반응 방식이 맞물려 실시간으로 내가, 내 눈이 ‘예술’을 한다(평론가들의 비평을 읽지 않은 오직 내 주관적 감성으로).
이 몽환적 경험은 또 다른 작품인 ‘겐지스필드Ganzfeld’의 네모 상자 안으로 들어가서 더욱 극대화된다. 어둡지도 않은데 빛의 효과 때문에 사방의 모서리를 인지할 수 없다(고백하건대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든다). 열린 자연 속에서 마치 몽환적 구름 속에 갇힌 듯 헤맨다. 어디가 끝일까, 한 걸음 더 디뎌도 괜찮을까? 공간의 한계를 규정하고 염려를 떨치기 위해 본능적으로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몸의 작은 세포 하나까지 일으켜 세워 공간을 느끼려 해보지만, 진실은 이 또한 보색에 반응하는 내 눈의 착시 효과. 혼돈하는 사이, 내가 나에게서 단절되는 경험을 한다. 한 걸음 뒤에서 두려움을 움켜쥔 채 열린 공간을 더듬는 나를 본다. 격려, 비난, 방관, 후퇴와 위로…. 무엇을 나에게 줄 것인가를 다시 묻는다. 이래서 세계의 비평가들은 과학자에 가까운 이 작가에게 ‘명상의 예술가’라는 작위를 주었나 보다. 앞만 보고 살던 내가 알지 못한 내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과감히, 아쉽지 않을 후퇴를 명령했다. 나에게서 나에게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산 정상에 넓게 열려 있는 그곳 한솔뮤지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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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뮤지엄이 전하는 메시지 Disconnect to Connect 한솔뮤지엄은 ‘슬로 뮤지엄’을 지향한다. ‘소통을 위한 단절(Disconnect to Connect)’은 뮤지엄의 슬로건. 관람객은 복잡한 도시, 성냥갑 같은 건물, 예술에 대한 무감無感, 건조한 나에게서 단절된다. 대신 뮤지엄을 순례하는 동안 청정한 자연, 의식을 깨우는 건축, 예술에 대한 미감美感, 입체적 존재인 나와 소통한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선 때로 단절이 필요하다. 익숙한 것들과 멀어질 때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한솔뮤지엄 측의 설명처럼, 슬로 뮤지엄에 갈 때는 편안한 신발을 신고 여유로운 일정으로 ‘느림’에 예의를 갖추시기를.
제임스 터렐관의 일몰 프로그램 A Moment of Truth 스카이스페이스의 변화는 일출, 일몰에 더욱 신비롭다. 제임스 터렐 작품의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일본 나오시마의 지중미술관이 유명하지만, 20년 전 작품이기 때문에 현재의 제임스 터렐 작품과는 간극이 크다. 그 덕분에 한솔뮤지엄의 일몰 프로그램이 6월 말부터 시작되면, 강원도 원주가 제임스 터렐의 메카가 될 듯하다. 일몰 프로그램의 일정은 뮤지엄 홈페이지나 전화로 확인해야 한다.
한솔뮤지엄 관람 정보 관람 시간 10:30~18:00(매표 마감 17:00), 제임스 터렐관 11:00~17:30(매표 마감 16:30), 월요일 휴관 관람료 뮤지엄+제임스 터렐관 2만 5천 원(성인), 제임스 터렐관 1만 5천 원(성인) 주소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월송리 1016 문의 033-730-9000, www.hansolmuseum.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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