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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황매암黃梅庵 선승의 방에서 작은 신비를 찾다
불안, 근심, 걱정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밀려올 때는 일단 환경을 바꿔야 한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 같은 생각만 반복하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보면 번뇌를 끊기 위해서 택한 장소는 대부분 산이었다. 산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상담소이자 병원 역할을 하였다. 문명에서 얻은 마음의 병은 대자연의 품속에 있어야 치유가 된다. 국토의 7할이 산인 이 땅에서 가장 크고 넓은 지리산, 그중에서도 공부터로 꼽힐 만큼 호젓한 황매암에는 현진 스님과 주인을 꼭 닮은 군더더기 없이 단출하고 정갈한 공간이 있다. 이곳에 들어서니 시꺼먼 먹구름 같은 번뇌가 스르륵 가라앉는다.


황매암의 앞산 삼봉산의 수려한 풍경을 창 안으로 담아내는 방은 현진 스님의 거처이자 공부방이며 다실이다.


절은 왜 있는가? 왜 절에 가는가? 근심과 걱정 때문에 가는 것이다. 절은 자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번뇌에 휩싸여 있을 때 가볼 만한 곳이다. 근심 걱정 없고, 매사에 잘나가는 사람은 절이 필요 없다. 세속이 곧 놀이터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이상하게도 근심과 걱정이 점점 많아진다. 20대 때에는 걱정이 없었다. 30대에도 그렇게 커다란 근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4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조금씩 번뇌라는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다가 50대가 되니까 어느새 껌껌한 먹구름 속에 자신이 휩싸여 있는 상황이 된다.

어느 순간 자신이 시꺼먼 먹구름에 포위되어 있다고 깨닫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 과연 이 구름을 어떻게 걷어낼 것인가? 어떻게 해야만 밝은 해를 볼 수 있을까? 한국의 50대 가운데 아마도 절반 가까이는 밤에 숙면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 걱정, 저 걱정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중년이 많다. 정신과를 찾아 상담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통계를 보니 성인의 15%가량이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아야 하는 불안 심리 상태에 있다고 한다. 그만큼 사는 일이 만만찮은 것이다.


1 앉은뱅이 의자는 스님의 ‘작은 신비’가 이루어지는 곳. 책도 읽고 명상도 하고 잠깐잠깐 음악도 듣는다.
2 승복을 손수 기우면서도 수행을 한다. 자세히 보면 손이 야무진 스님이 직접 새긴 ‘忍(참을 인)’자가 보인다. 3 스님이 자투리 벽지를 활용해 직접 만든 보일러 스위치 가리개로 불빛에 시선이 흐트러지지 않게 했다.


상황 되는 대로 사는 유연한 삶
우리나라 산 중에서 가장 크고 넓은 지리산은 둘레가 850리나 된다. 1000m가 넘는 고봉들도 줄지어 있다. 산이 두텁다고 말해야 할까. 지리산은 크게 남과 북으로 나뉘는데, 살기에 좋은 ‘배산임수’의 전형이 남쪽이고, 북쪽은 살기보다 공부하기에 좋다고 한다. 공부는 약간 추워야 잘되는 법이다. 북쪽에서 손꼽는 공부터는 바로 실상사와 백장암이다. 지금이야 도로가 뚫려 있지만 옛날에는 오솔길만 나 있는, 그야말로 도 닦으려는 수행자 외에는 접근하는 이가 거의 없는 심산유곡이었다. 황매암은 그 백장암의 맞은편 산자락에 있다. 호젓하면서도 깔끔한 암자이다. 절은 호젓해야만 맛이 난다. 황매암에서 보면 앞산이 900m급의 삼봉산三峰山이고, 뒷산은 덕두산이다. 덕두산은 지리산의 서북쪽 끝자락에 해당한다. 전후좌우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광주리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산세이다. 암자 주인 현진賢眞 스님을 만났다. 10대 후반에 출가하였다는 스님은 이야기를 나눌 수록 소탈하고 담백한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경전의 글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킨다)’ 같은 글귀를 안 좋아하십니까?” “특별히 마음에 새기는 구절은 없습니다.” “무심無心으로 사시는지요?” “상황 되는 대로 삽니다.” 아주 담백한 답변이다. 아무리 어떤 글귀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 글귀를 자꾸 머릿속에서 되뇌이면 결국에는 그 글귀에 집착하고 사로잡히기 때문에 ‘없다’고 대답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마음도 내지 않고 ‘무심’으로 사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일상생활이 어떻게 무심으로 되겠는가. 매일 매 상황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게 삶 아니던가. 대응은 해야 할 터이니 ‘상황 되는 대로 산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대답이기도 하다. 무엇인가 매 순간 흐름을 따라서 행동하고 말하지만, 집착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두고 보겠다는 태도라고 생각하였다.


4 이상 기온으로 날씨가 추워져 꽃이 시들어가기에 한 송이 가져다 방 한쪽에 두었다.
5 수행자의 공간이기에 문명의 것들은 죄다 천으로 다소곳이 가려두었다.
6 다락방에는 침구와 단출한 세간살이를 보관한다. 환풍창이 나 있어 습도 조절이 절로 된다.
7 말끔히 정리된 손님방. 방마다 제 각각 그림을 걸고 수납 선반을 벽 위쪽에 두어 공간을 정갈하게 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이 스님은 산토끼 같다. 육식 동물의 에너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풀만 먹고 사는 초식 동물의 유순함과 순박함을 지니고 계신 분이다. 사판事判에 초연하니 걱정도 된다. 절 운영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절 살림에도 돈이 들어간다. 난방요금, 전화비, 그리고 밥해주는 공양주에게 최소한도의 월급은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이 절은 신도도 별로 없고, 스님도 신도 관리에 관심이 적은 듯하다.

“절 운영에 소요되는 경비는 어떻게 조달합니까?” “같이 공부하던 도반道伴이 매달 얼마씩 보태줘서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습니다. 참 고마운 도반입니다.” “도를 닦으려면 법法, 재財, 지地, 려侶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법은 공부를 가르쳐줄 스승이고, 재는 돈입니다. 도 닦는 데에도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는 공부할 장소, 즉 암자이고, 려는 바로 같이 공부하는 도반을 가리킵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네 번째의 도반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도반이란 무엇입니까?” “50대 후반이 되니 도반이 혈육처럼 느껴집니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갈수록 도반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도반입니다. 추구하는 이상도 같고, 물질과 정신을 모두 나눌 수 있는 사이가 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도반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출가 승려는 가족이 없지 않습니까. 고독을 껴안고 삽니다. 그래서 같은 처지에 있는 도반이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스님이 가지고 있는 살림살이의 총량은 얼마나 됩니까?” “사과 박스 두 개 분량입니다. 박스 하나에는 겨울 짐이 담겨 있고, 나머지 하나에는 여름 짐이 있습니다. 어디론가 떠날 때 이 박스 두 개만 가지고 떠나면 됩니다. 짐을 더 줄이려고 했는데, 여름용과 겨울용이 따로 있어야 해서 더 이상 줄일 수가 없네요.”


1, 3 명당이 많은 지리산에서 북쪽은 공부터가 많은데, 그중 손꼽히는 곳이 실상사와 백장암이다. 황매암은 백장암 맞은 편 자락에 있는 암자로 호젓하면서도 깔끔하다. 특히 앞산 삼봉산의 변화무쌍한 구름이 일품으로, 장독대 옆 홍매나무에 붉은 꽃까지 활짝 피니 그림이 따로 없다. 
2 채마밭을 마주 보는 창문 앞에 책상을 두고 꼭 필요한 것만 갖추었다. 
4 구석구석 스님의 정갈한 성품이 엿보인다. 


‘작은 신비’가 있는 단출하고 정갈한 공간
스님은 1년 가운데 여름 석 달과 겨울 석 달은 문경의 봉암사 선방禪房에 들어가 참선을 한다. 나머지 6개월은 이 황매암에 거주한다. 찾아오는 신도가 많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 암자의 경치가 좋거나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절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도 없는 곳이다. 그야말로 적막강산의 인적이 드문 절이다. 다만 지리산 둘레길 근처에 있어서 둘레길을 걷다가 목이 마른 여행객들이 가끔 물 먹으러 암자에 들르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적막강산에 있으려면 취미가 있어야 한다. 취미는 ‘작은 신비’에 해당한다. 사람이 작은 신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스님의 취미는 차 마시는 일과 잠깐잠깐 음악을 듣는 일, 그리고 난초를 가꾸는 일이다. 거처에는 차도구와 오디오, 그리고 난蘭과 수석壽石이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방에 뭐가 많으면 선승의 방이 아니다. 단출하고 정갈해야 하는데, 현진 스님의 방이 그렇다. 군더더기가 없다. 방에만 들어가 보아도 방 주인의 성품과 공부 수준 그리고 취향이 한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사람의 취미가 ‘응마주색난석鷹馬酒色蘭石’이라 했던가! 50대에는 난이고, 60대가 되면 무정물인 수석으로 옮아간다고 했다.

“이 적막강산의 산중에서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일이 어떤 게 있을까요?” “겨울에는 달이 앞산에서 뜹니다. 삼봉산 자락의 오른쪽 끝에서 떠오르죠. 그 달 뜨는 모습을 보는 것도 큰 낙입니다. 봄이 되면 달이 뜨는 위치가 조금씩 오른쪽으로 이동해요. 해 질 무렵이 되면 뒷산의 그림자가 동쪽의 앞산에 내려옵니다. 앞산의 위는 노을로 벌겋고 산 아래는 그림자로 컴컴하게 뒤덮입니다. 그 노을과 그림자가 멋진 대조를 이루죠. 위에는 석양빛이 빛나고 아래에는 그림자가 드리운 장면, 그 명암을 보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앞산의 중턱에 자리 잡은 암자가 백장암입니다. 백장암 아래의 산자락으로 하얀 구름이 넘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실타래가 풀리는 모습 같습니다.

이 앞산의 고개를 넘어갈 때 구름도 힘이 드니까 그동안까지는 뭉쳐서 오다가 이 지점에서 실타래처럼 흩어졌다가 넘어가는 것이죠. 그 실타래처럼 풀어져서 넘어가는 모습이 참 신기하고 보기도 좋아요. 또 하나 볼 만한 풍경이 백로가 날아가는 모습입니다. 산내면 면사 무소 뒷산에 백로가 30마리쯤 사는데, 이 백로들이 아침에는 먹이를 찾으러 출근을 합니다. 남원의 운봉 들판으로 이동하는 것이죠. 아침에 백로들이 이동할 때 바로 황매암 앞산의 아래 자락을 반드시 통과합니다. 저녁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때에는 길목인 앞산 자락을 유유히 떼를 지어 날아갑니다. 암자에서 보면 눈높이보다 약간 아래에서 백로들이 날아가죠. 백로들이 다리를 쭉 뻗은 상태에서 큰 날개를 퍼덕거리며 느긋하게 날아가는 모습은 참 장관입니다.”


5 지붕 처마 위 벽에 만든 ‘스마일’ 표시에서 행복에 대한 기원이 느껴진다.
6 스님의 찻잔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이 저마다 달라 취향과 안목을 엿볼 수 있다. 
7 채마밭을 가꾸는 육체 노동도 수행의 연장이다.
8 기온이 낮아 봄이 더디 오는 황매암의 풍경은 5월이 가장 좋다.


스님 방의 한쪽에는 어떤 노스님이 눈을 감고 고개를 약간 떨어뜨린 채로 앉아 있는 모습의 사진 액자가 걸려 있다. 아마도 마지막 돌아가신 모습을 찍은 사진 같다. “저 사진은 어떤 사진입니까?” “제가 출가했을 때 저의 은사 스님이었는데, 마지막 열반하실 때 앉아서 돌아가신 모습입니다. 좌탈입망坐脫立亡이라고 하죠. 저에게는 매우 엄했습니다. ‘중은 좌복(좌선하는 방석)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죠. 어디를 가든지 항상 좌복에 앉아서 참선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분이 50대 중반에 환속을 했습니다. 환속해서 애도 낳고 사시다가 당신 집에서 74세에 열반하셨는데 저렇게 좌탈입망으로 가신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당신이 3년 전부터 죽음을 철저하게 준비한 것 같습니다. 식사량도 통제하고, 죽을 때 잘 가려고 좌선과 호흡 그리고 몸 상태를 관리하신 것이죠. 속가에 살면서도 승려 생활 할 때의 마음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던 것 같아요. 마지막 갈 때에 잘 가야 하는데, 저렇게 성성惺惺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숨을 거두기가 쉽지 않죠. 저도 죽을 때 정신을 잃지 말고 담담한 상태로 가야 하겠는데….”

대웅전 옆으로는 스님이 가꾸는 채마밭이 있다. 산속이라 기온이 낮아서 아직 싹이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5월 중순이 되면 본격적으로 싹을 틔울 것이다. 절 마당과 법당 뒤쪽으로 벚꽃이 피었는데, 가지가 축 늘어진 모양이다. 가지가 늘어진 모양이 수양버들과 닮았다고 해서 ‘수양벚’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법당 아래에는 아주 붉은 매화도 피어 있다. 홍매인데 꽃잎 색깔이 너무 붉어서 일명 ‘흑매’로도 불린다. 올해는 새가 쪼아 먹어서 잎이 많이 안 남아 있다는 스님의 이야기이다. 노란 수선화를 비롯해 개나리, 조팝나무, 산수유, 산죽山竹이 둘러싸고 있다. 황매黃梅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 5월 중순이나 되어야 피는 모양이다. 작년에 왔을 때 활짝 핀 황매를 보니까 그 잎이 작은 국화잎 비슷하게 생겼다.

스님과 함께 매화나무 옆을 따라서 법당 뒤의 텃밭 터로 올라가 보았다. 지리산의 명당이라고 하는 금대金臺 뒤의 백운산이 잘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오른쪽으로는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의 꼭대기도 보인다. 천왕봉도 보이면 명당이 틀림없다. 스님과 함께 한참 동안이나 산죽이 우거진 법당 뒤의 텃밭에서 말없이 천왕봉을 바라보았다.

담당 신민주 기자 | 글 조용헌(동양학자, 칼럼니스트) | 사진 박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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