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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딸에게>를 펴낸 가수 인순이 씨 그래도 여전히 디바
꾸며서 쓰는 것은 싫어요. 없는 얘기 멋지게 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디바라고 불리는 건 좋아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인순이 씨의 피부색이 낯설지 않다. 그렇게 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슬리브리스는 더 아이잗컬렉션, 이어링은 스와로브스키 제품.

트로트와 발라드, 여기에 아이돌의 댄스 정도를 장르로 기억하는 우리나라 가요계에서 가수가 자신만의 색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중과 함께 나이 먹고 성숙해가면서 음악 세계를 지키는 것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축복이다. 가수는 젊은 세대의 감성에 뒤처지지 않으면서 트렌드를 이끌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재능 크기와 상관없는 천운이다. ‘이별이 아닌 이별’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자취를 감춘 이범학 씨가 20년 만에 컴백하면서 들고 나온 노래가 ‘이대팔’이라는 소식에 크게 놀라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물론 미학적 평가와 별개로 백두산의 유현상 씨가 ‘여자야~’라고 노래할 때는 기겁을 했다). 트로트와 재즈 보컬은 나이 든 가수에게는 코끼리 무덤같이 보인다. 노래를 멈추지 않는 한 그리로 수렴한다. 인순이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2년에 재즈 배운다고 미국 다녀와서는 계속 재즈로 활동하려 했는데, 정원관 씨가 신인 가수 앨범을 하 나 제작한다며 피처링을 부탁했어요. 녹음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한 번 더 불러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고, 방송에 다섯 번만 출연해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는 매번 불려서 나갔지요.”
조PD의 음반이었다. 그와 함께 ‘친구여’라는 노래를 불렀다. 인순이 씨의 ‘제2의 전성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화장품 광고를 찍은 것도 이때다.
부침이 있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시골에서도 벗어나지 못할 만큼 순진하던 그에게 김완선 씨의 이모이자 매니저이던 한백희 씨가 찾아와 가수 데뷔를 권했다. ‘혼혈 그룹’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가수로 나섰다. 1978년 ‘희자매’로 데뷔한 것이 스물두 살 때였으니 올해로 가수 생활 35주년을 맞는다. ‘나름’ 걸그룹 출신인 그가 기나긴 시간을 지나 여전히 걸그룹들과 한 무대에 선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한국 가요사에도 대단한 일임에 분명하다.

“침체기에 가장 많이 성장한 것 같아요. 밤무대에서 번 돈으로 투자를 많이 했지요. 댄스팀도 만들고 안무도 새로 짜고. 레퍼토리도 많이 만들었어요. 10년은 써먹을 만큼 많은 노래를 연습했지요. TV를 보면서도 내가 저 프로그램에 나간다면 나는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안무를 할까 항상 시뮬레이션을 했어요.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다. 모두가 알지만 준비하는 사람은 드물다. 인순이 씨는 기회가 오면 잡았다. TV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출연 역시 같은 맥락이다. 대중음악 평론가와 신문들이 뽑는 ‘시대별 여자 보컬리스트’로는 1980년대에 2위, 2000년대에도 3위에 선정됐고(조선일보), 건국 이후 최고의 가수 50인 가운데 27위, ‘가장 노래 잘 부르는 가수’에서는 조용필, 이승철에 이어 3위(헤럴드 경제)에 뽑힌 그다. 자신의 노래를 평가받고 순위가 매겨지는 자리가 편할 리 없지만, 첫 무대에서 1위를 하며 ‘인순이’가 왜 인순이인지를 보여줬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후회’에 대한 생각이에요.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은 평생 가더군요. 공부도 노는 것도 때가 있듯이 그 시절에만 맛볼 수 있는 느낌이란 게 있잖아요. 탈락하더라도 한번 해보고 떨어지자고 생각한 거죠.”
<나는 가수다>가 그에게 기쁨만 준 것은 아니다.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비난이 쏟아졌 다. 프로그램 하차 얘기도 나왔지만, ‘사과 기자회견’을 하고 다시 무대에 섰다.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언제나 정면돌파하는 것이 제 방식이에요. 잘못했을 때는 그냥 잘못했다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다고 사과한 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것 아닌가 생각해요. 다만, 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과한 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지요.”
요즘 말로 하면 ‘돌직구’다. 피해가지 않는 것. 피한다고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체득한 삶의 이치다. 오래전에도 같은 상황이 있었다. 딸 세인이를 낳았을 때다. 그는 세인이를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낳았다. 사람들은 이를 ‘원정 출산’이라 불렀다. 딸이 자신을 닮는다면 한국에서 받게 될 상처가 엄마로서 두려웠다. 자신이 받을 비난보다 딸이 받게 될 상처를 피하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방송에서 사과를 했고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그렇게 낳은 딸 세인이가 지난해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 입학해 화제가 됐다. 인순이 씨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곁을 떠난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은 책을 냈다. <딸에게>는 그가 세인이에게 보내는 편지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인순이 씨는 우산을 즐겨 그린다. 우산은 그에게 보호와 밀착을 의미한다. 이제껏 딸을 씌워주던 우산으로 더 많은 아이를 감싸주는 큰 우산을 꿈꾼다.
점프슈트는 랄프 로렌, 뱅글은 에르메스, 네크리스.링은 모두 스와로브스키, 슈즈는 페르쉐 제품.

딸에게
딸을 키우는 엄마들은 친구 같은 모녀지간을 바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에 불과하다. 엄마와 딸 사이에는 긴장이 흐른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흐르는 그 벽 같은 거리와는 다르다. 여자 대 여자로서 느끼는 긴장이다. 그리고 모든 여자가 ‘엄마’가 되는 순간, 비로소 자신의 엄마와 화해하게 된다.
인순이 씨가 엄마가 된 것은 1994년, 서른여덟의 나이다. 네 살 연하의 남편 박경배 씨와 결혼해 얻은 결실이 세인이다. 하지만 엄마 인순이 씨가 가장 먼저 바란 것은 ‘나를 닮지 않아야 할 텐데’였다. 여기에는 태생으로 인한 상처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잃어버린 시간과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다. “세인이가 ‘큰 사람’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어요. 제 젊음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거든요. 항상 ‘절대로 내 딸은 가장으로 만들지 않을 거야’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보면 세인이는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한 아이 같아요. 너는 어쩌면 그렇게 모질어? 하고 얘기하다 보면 제가 예전에 엄마에게서 듣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더라고요.”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는 태몽을 꾸고 낳은 세인이가 혈관종이라는 병에 걸려 속 끓이던 시간, 아픈 아이를 두고 노래 부르러 가야 하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 자신을 닮지 않기를 바란 시간에 대한 부끄러움, 지금의 자리에 있기까지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후회, 그만큼 딸은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삶에 충실하길 바라는 마음, 딸을 가진 엄마로서 이제야 자신의 엄마를 이해하게 된 자신, 가수로서의 삶 이후에도 이어질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와 각오 등을 책에 담았다. “이제는 아이가 집에 오는 게 일종의 ‘방문’이잖아요. 딸을 제게서 떠나보내게 됐으니 부족한 엄마로서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노트에 적었는데, 그걸 책으로도 내게 됐네요.” 인순이 씨의 얘기에 등장하는 딸 세인이는 어른이다. 현명하고 당차다. 어느새 훌쩍 자란 딸에게 엄마 인순이 씨는 사랑과 함께 존경의 마음까지 갖고 있다.

인순이 씨는 가난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는 곁에 없지만 아버지 나라에 있는 후원자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아니더라도 어딘가 기댈 곳이 있다는 사실 하나가 큰 힘이 된 것. 이제는 딸 세인이가 엄마가 받은 도움을 대신 갚는 다. 세인이는 펄벅재단에서 학생회를 조직하고 혼혈인 엄마와 자신에게도 영향을 받은 다문화 가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을 다큐멘터리 제작을 통해 다문화 가정 바깥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노력을 하는 당찬 학생이다. 인순이 씨가 다문화와 관련한 일을 시작하는 데 가장 큰 조언자이자 조력자가 되어주기도 했다. “유학을 떠나기 전에도 제 걱정이 된다며 자주 울었어요. 제가 다문화 학교라는 걸 해보겠다고 하니 옆에서 염려가 많이 됐나 봐요. 사람들을 꾸려서 조직도 만들어야 하고, 그 조직을 운영도 해야 하는데, 노래만 부르고 무대에만 서던 제가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세인이 입장에서는 걱정이 컸나 봐요.”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받은 과분한 사랑을 어떻게 하면 갚을 수 있을까 항상 생각해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양로원을 운영해야겠다 싶다가, 버려지는 아이들 얘기가 나오면 애들을 키워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5월이면 양로원을, 12월이면 고아원을 생각했지요. 그렇게 마음이 양쪽을 오가다가 어느 날 ‘다문화 가정 아이 열 명 중 네 명이 고등학교를 중도 포기한다’는 기사를 보고 이 일을 내가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처음에는 ‘내가 이 정도면 성공했는데 왜 또 거기를, 나는 다시는 ‘다문화’이긴 싫은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어릴 때 저도 다른 사람이 제게 ‘잘해라’ 하고 조언하면 ‘당신이 뭘 알아? 잘하려고 해도 안 되는 걸 당신이 알아?’ 하고 반발하곤 했어요. 그러니 이 아이들도 그런 생각을 할 거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그런 아이들에게 ‘너네들은 좀 더 좋은 세상에서 시작하니까 잘될 거야’ 라고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가 싶더군요.”
법인을 만들고 홍천에서 농촌 체험관 시설을 빌려서 교사로 꾸몄다. 선생님을 뽑고 학교 모습을 갖춰가며 준비 중이다. 인순이 씨는 딸의 조언을 받아 먼저 ‘다문화가정상담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어렵지 않은 시험이었지만 몇십 년 만에 해본 공부였다.


인순이 씨의 존재 이유였지만 정작 자신을 닮지 않기를 바라던 딸은 이제는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존재가 됐다. 딸을 유학 보내며 인순이 씨는 이제 더 많은 ‘딸’을 품으려 한다.
화이트 블라우스는 자라, 스커트는 제시뉴욕, 벨트는 마시모뚜띠, 네크리스.링과 시계는 불가리, 슈즈는 자라 제품.

그리고 아이들에게
아직은 많이 조심스럽다고 했다. 4월에 개교를 앞두고 되도록이면 말을 아끼고 싶어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침 밥상에 오른 생선을 먹고 학교에 가다 친구에게서 “비린내가 난다”는 말을 듣고 스물아홉까지 생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예민한 인순이 씨다. <나는 가수다> 당시의 ‘일’도 있고 사람들이 자신의 의도를 오해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했다.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에 올라온 해밀학교 홍보 동영상에 등장하는 ‘이사장 인순이’는 우리가 아는 인순이 씨와 사뭇 달랐다. 무대와 관객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없었다. 거기에는 이제 막 새로 시작하는 일에 대한 기대와 긴장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가 있었다. 짧은 비디오 클립만으로 그가 얼마나 이 일을 귀하게 여기고 신중하게 대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전 많이 넘어지고 울고 비바람도 많이 맞고 돌아서 왔으니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돌아서 자기 길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이사장 같은 직함에는 전혀 관심 없어요.”

인순이 씨는 여전히 1년에 여러 차례 ‘밤무대’에 선다. 불러주면 간다. 그 정도 되면 출연료도 만만치 않으니 부르는 쪽에서도 쉽지 않겠지만 자신이 그만큼 손님들을 모을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전 대중가수잖아요. 대중은 세종문화회관이나 카네기홀에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 클럽 무대도 여전히 누군가 노래하는 무대니까 가리지 않아요. 좋은 무대에서 빛나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좋지 않은 무대를 내가 빛내줄 수 있다면 그건 더 좋은 일이겠지요.”

무대에서 빛나던 디바, 인순이 씨는 이제 더 너른 무대를 준비한다. 그 무대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아이들이지만, 여전히 그는 ‘디바’다.

의상 협조 더아이잣컬렉션(02-540-4723), 랄프로렌 (02-545-8200), 마시모뚜띠(02-3413-9820), 불가리(02-2056-0170), 스와로브스키(02-514-9006), 에르메스(02-3015-3251),자라・제시뉴욕 02-3442-0220), 페르쉐(02-3442-3012)

 

글 이은석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