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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만남] 서양화가 김동유 씨 느린 그림의 속도
존재하는 상상력, 작가 김동유의 그림은 세상에 없지만 세상에 있는 것이다. 우직함으로 자신의 세계를 이해시킨 그는 이를 ‘미친 생각’이라 불렀다.


2006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에서도 무명에 가까웠던 김동유 씨의 작품이 무려 3억 원에 낙찰된 것이다. 그 한 해 전인 2005년 크리스티 경매에서도 그의 이중 그림 시리즈 ‘반 고흐’가 8천만 원에 낙찰됐지만, 그때만 해도 일회성 해프닝으로 취급됐다. 하지만 이듬해 추정가의 25배이자 현존하는 한국 작가로는 최고 금액에 작품이 낙찰되자 그는 단숨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현실이 더 드라마같다는 말이 여전히 유효한 경우다.

지방의 미술대학(목원대)을 4년 전액 장학금으로 다녔고 대전 지역을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해온 그이지만 ‘서울 무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꾸준히 작업에 매진한 결과 몇 년간 큰 미술관이나 비중 있는 갤러리의 기획전에 초대되는 기회가 이어졌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그가 작업을 놓지 않도록 해주는 이유가 됐다.이화익갤러리의 이화익 대표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즈음이다. 이 대표는 그의 작품을 1999년 금호미술관 전시 때부터 인상 깊게 봤노라고했다. 덧붙여 화단의 원로인 김창렬 선생이 그의 그림을 보고 “좋은 작가가 갖춰야 할 열정, 성실, 광기를 모두 가진 것 같소. 그러니 성공할 수 있도록 잘 도와주시오” 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미술 경매에 참여하며 김동유 씨는 이른바 ‘팔리는 작가’가 됐다.

“작품이 팔린다는 것은 제가 하는 일에 대한 평가의 하나이니 자신감이 생겼지요. 작가가 어떤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연애편지를 쓰는 것과 비슷해요. 밤새 공들여 써서 다음 날 보내기 전에 읽어보면 유치해서 견딜 수 없는 식이지요. 아이디어가 구체화된 뒤에 ‘아, 내가 잠깐 머리가 돌았나’ 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여러 달 걸려서 고생한 작품이 인정받으면 다음부터는 떠오른 아이디어에 대해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지요.”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신감을 얻은 대신 잠시 주춤하는 시간들도 있었다.
“작업이 정체되는 면이 있어요. 원래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라 작품에 대한 수요가 있으니 공급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어요. 갤러리에서도 요구하는 게 많았고요. 그러던 어느 날 ‘이러다 내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무에 사과가 1천 개가 달렸다고 전부 내가 따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떨어져서 썩어 없어지더라도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는 법이죠.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데도 2~3년이 걸렸어요.”


1 Diana(Queen ElizabethII), 2008, Oil on Canvas.
2 Pieta, 2011, Oil on Canvas.

3 작업실 뒷편에는 오래전에 그렸던 작품을 보관하고 비교적 크기가 작은 작품들을 작업하는 공간이 있다. 수많은 나비들이 반 고흐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4 요즘 작업 중인 메릴린 먼로는 존 F.케네디의 얼굴로 이뤄졌다. 하나하나 손으로 그린다.


크리스티 경매라는 사건 김동유 작가의 대표작인 이중그림 시리즈(The Face Homage)는 작은 얼굴들이 큰 얼굴을 그리는 형식이다. 작은 얼굴들은 픽셀처럼 하나의 커다란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런 ‘이미지의 다중적 조합’을 통해 현대인들의 ‘눈’에 대해 가볍게 조소를 보낸다.
“그냥 우연히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어요. 메릴린 먼로의 큰 얼굴에, 작은 얼굴은 박정희 얼굴의 조합이었지요. 그게 갑자기 생각났어요, 무슨 이유도 없이. 화면에 가시적으로 표현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날도 또 며칠 지나도 그 의욕이 강하게 일더군요.”

그는 어떤 얼굴과 또 다른 얼굴이 겹쳐질 때 에너지의 파장 같은 것이 생겨난다고 봤다. 특정 인물의 얼굴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인상이 있고 에너지가 존재하는데 그걸 서로 결합시키면서 두 에너지 간에 간섭 같은 게 생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글이나 말로 설명하기 힘들고 그 스스로도 정확하게 무엇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아직 모르겠다고 한다.
김동유 작가가 ‘그림의 에너지’에 대해 생각한 것은 오래전부터다. 군 제대 후 다시 회화 작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한국 미술계는 그림보다 설치 미술이나 영상 미술이 주목받던 시기였다. 유학파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들을 풀어놓았고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처음 보는 것들에 열광했다. “유학 다녀온 사람들한테는 그게 현실성 있는 것이었는데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첨단’이었던 거죠. 인터넷이 발달하고 휴대전 화가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한 시대인데 수백 년 전과 별다를 것 없는 고전적 방식의 평면 작업으로는 승부를 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돼지털로 만든 붓과 물감에 같은 평면의 조건이라면 어떻게 ‘에너지’를 담을 것인가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이중 그림’이 탄생했다는 얘기다.


그림에 필요한 색의 물감을 조색하고 있는 김동유 작가.

팔리지 않을 그림만 골라 그리는 의지 “형태를 밑그림으로 그리고 색칠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처음에는 슬 라이드 필름을 프로젝터로 비춰서 캔버스에 그렸는데, 각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형태가 일그러져서 힘들더라고요. 몇 주일을 그려야 했어요. 그다음은 얼굴을 확대 복사해서 그 아래에 먹지를 대고 그렸어요. 슬라이드 필름때보다는 작업이 정확했지만 이것 역시 밑작업만 한 달, 작품을 완성하는데 석 달이나 걸리더군요. 그래서 밑 작업은 기계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되지 않겠는가 결론 내리고 캔버스 자체에 출력하는 방법을 찾아냈어요. 그 다음 과정은 명암법을 사용해 진한 부분은 어두운 면이 많이 들어간 얼굴을, 밝은 부분은 밝은 면이 많은 얼굴을 그려서 그러데이션을 주는 식이에요.”

김동유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특이하고 이상한 스타일’이라고 했다. 기괴하기까지 한 그의 그림들은 아름답고 화사한 느낌의 ‘거실용’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화면의 밀도가 무미건조하고 비인간적일 만큼 건조하다. 상업적인 것과는 처음부터 궤를 달리했다.
‘빨간색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인물을 그려서는 안 된다, 소파 길이에 맞춰 가로 폭이 길어야 한다’는 갤러 리의 ‘3대 금기 사항’을 모두 어긴 것이 그의 그림이었다.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삶이 평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술 학원에서 아이들을 밤11시까지 가르치고 밤과 새벽에 작업하는 생활을 20년 동안 했어요. 목원대에 서 시간강사를 계속 하긴 했지만 강의 수가 많지 않으니 그 수입으로는 도저히 생활할 수 없었고요. 방학때는 따로 야간 업소 벽화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에 아예 일을 줄이고 작업에 몰입하기로 결심했지요. 환경을 바꿔서 시골로 들어간 겁니다. 앞마당은 잔디밭이고 텃밭에는 상추도 심을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아내를 설득했어요.”
전재산 5백만 원으로 축사를 얻었다. 빌려주는 사람도 사람이 살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그곳에서 그는 살았고 그림을 그렸다. 앞마당의 풀은 뽑고 나서 돌아서면 자라 있고 여름엔 그 속에서 파리와 모기가 들끓었다. 상추는 벌레들이 다 갉아먹어 사람이 먹을 게 남아나지 않았다. 시골 생활은 결코 낭만적이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제가 좀 이기적이에요. 아내와 아이들이 힘들어 했지만 고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날 그날 좋은 것만 생각하며 참았지요.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도 미술가들이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것을 극복하고 싶었어요. 증명해 보이고 싶었지요. ‘그림이나 그리고 있는’ 사람들이 노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도 다른 일을 했을 때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증명을 하려던 거죠.”
여기에 혼자서 작업할 때는 그다지 의식 못했는데 아이들이 생기고 학교에 다니면서는 가정환경 조사 같은 것을 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큰 보탬은 못 됐지만 정신적 가치는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앞은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그는 자신이 어떤 수식어로 불리는지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성공을 로또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지 만 김동유 작가는 자신이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운 좋은 케이스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이중 그림은 결코 어느 날 갑자기 그린 것이 아니다. 수많은 습작의 과정이 쌓인 결과물이며 그가 숱하게 지새 운 밤샘의 맺음말 같은 것이다.

“전 끼가 없어요. 4년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녔지만 스승께서 항상 불만족하셨어요. 기본은 하는데 뭔가를 더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치니까 꾸준히 하게 되더군요.” 재능을 앞서는 성실함이다. 김동유 작가는 성실함이 큰 재능이라는 것을 인생으로 보여줬다.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에서 볼 때 다르게 보이는 이중 그림은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항변 같은 것이리라.
 

한 눈 팔지 않고 한결같이 자신의 삶을 그림에 바쳐 온 김동유 작가의 삶이 담긴 ‘그림꽃, 눈물밥(비채)’이 출간되었다.
글 이은석 기자 | 사진 박재형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