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기 씨는 생전에 미리 명주로 만장輓章감을 떠다가 누구누구에게 만사를 부탁할 것을 지시하고 그 모든 것을 기록하게 했다. 백상여가 지나갈 때 스무남은 개의 새하얀 만장이 휘날렸다.
서울 도곡동 서울내과병원 507호에서 숨을 거둔 한창기 씨는 그 밤에 서울 중앙병원 영안실로 옮겨져 그 이튿날 아침 10시 반에 염습을 마치고, 그날 하오 5시에 전남 보성군 벌교읍 고읍 이구의 고향 집으로 떠났다. 자정이 가까워 그이가 나서 자라 초등학교를 다녔던 고향 집에 다다랐으니 지난해 3월의 성묘 뒤로 근 한 해 만의 귀성이었다. 타관에서 이승을 하직한 사람은 방 안에 들이지 않는다는 전통 풍습을 존중해 그이를 고향 집 앞마당에 짚으로 새로 이룬 빈소에 모셨다. 밉게 추운 날은 아니었으나 바람은 찼다.
“우리가 한창기에게 받은 마지막 지시는 그가 입고 떠날 수의와 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들 땅까지 그를 태우고 갈 상여에 관한 것이었다. 수의의 거죽은 강원도에서 짠 삼베, 곧 강포로 하고, 속은 부드러운 상주 명주를 넣어 그가 바느질 솜씨를 믿는 아무개 할머니에게 부탁하여 지으라고 했다.”
출처 _ <행복> 2008년 4월호 설호정 씨의 글
그이 생전의 당부대로 자정이 조금 넘어서부터 김굿(한창기 씨는 흔히 ‘씻김굿’이라고 말하는 걸 반대했으니, 그 굿의 이름은 제 고장 말대로 ‘ 김굿’ 해야 옳다)이 시작되었다. 그 굿은 별세하자마자 하는 ‘곽머리 김’이었다. 무형문화재 ‘진도 김굿’의 예능 보유자인 박병천 씨가 재비들을 통솔하고 역시 그 예능 보유자인 당골 김대례 씨가 흰 종이를 오려 만든 돈전을 들고 그이 빈소 앞에 섰다가 김 들머리에 생전에 그이에게 은혜 입은 바가 있다는 박병천 씨가 추모의 말을 몇 마디 했다. 굿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5시간동안 그이의 운구차 뒤를 따라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그 빈소 앞을 넓게 에워싸고 앉거나 서서 사진 속의 그이를 보기도 하고 굿을 보기도 했다. 징, 가야금, 아쟁, 대금, 장고 소리에 어울려 김대례 씨가 “넋이로구나” 하고 구슬프게 목청을 뺄 때에는 바로 그 당골의 ‘혼맞이 노래’가 그이가 출반한 음반인 <한반도의 슬픈 소리>에 실린 것인 줄을 <뿌리 깊은 나무> 식구들은 금방 알았다. 그리고 그 소리가 그이 심금을 울리던 소리였음을 회상했다.
새벽에 굿이 끝나자 사람들은 동네 여기저기 처소에 들어 눈을 잠깐 붙인 뒤 날이 밝자마자 다시 그 마당으로 모였다. 그이를 영결하는 날, 곧 2월 5일 아침이었다. 발인제는 그이와의 인연이 유별한 지허 스님과 그 밖의 선암사 승려 몇 사람이 함께 이끌었다. 자신의 선암사 내림 <반야심경> 독송 소리를 “아름답다” 하던 고인이 영영 떠나는 자리여서 그런지 발인제의 지허 <반야심경> 소리는 궁글되 애잔했다.
1 무형문화재 김대례 씨가 ‘진도 김굿’으로 그의 마지막 길을 위로했다.
2 한창기 선생은 키가 훤칠하고 작은 얼굴에 풍채가 좋아 한복과 양복 모두 잘 어울렸다.
“1996년 겨울이 다가들고 있을 즈음의 일이었다. 병이 깊어 기동을 못한 지 석 달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자리에 누워 자기 장례의 여러 절차를 세심히 챙기기 시작했다. 상여는 백상여로 하고, 미리 명주로 만장감을 떠다가 누구누구에게 만사를 부탁하고, 객지 죽음이라 고향 집에 내려가도 방 안에 못 들어갈 테니 마당에 짚으로 움막을 지어 상청으로 하고, 진도 당골 김대례와 재비 박병천에게 굿을 부탁하고, 부의는 일체 받지 말고… 기록이 가능한 한 그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길 것을 의중에 두고 하는 지시였다.”
출처 _<특집! 한창기>(창비)
승려들이 앞장서고, 빈소를 떠난 그이가 그 뒤를 따랐다. 동네 앞에는 노젯상과 함께 그이를 태우고 갈 백상여가 기다리고 있었다. 노제는 간략했고 그이는 곧 상여에 태워졌다.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상두꾼들이 상여를 메고 두어 바퀴 돌더니 곧장 마을 뒤의 그이 선영을 향해 떠났다. 박병천 씨와 김대례 씨가 상여 앞에 서서 ‘상엿소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 또한 <한반도의 슬픈 소리>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흰 만장輓章(죽은 사람을 슬퍼해 지은 글을 적어 기처럼 만든 것) 스무남은 개가 앞서 가며 휘날렸다. ‘상엿소리’는 완만한 길에서는 느리고 구슬펐고 가파른 데에 다다르면 노동요처럼 빠르고 힘차졌다. 그이가 묻힐 곳은 불던 바람이 잠드는 양지바른 야산 자락이었다. 그 자리는 또 그이 할아버지, 할머니 무덤의 발치이기도 했다. 그이를 묻고 그 위를 여러 사람이 꼭꼭 눌러 밟아 편편하게 한 뒤에 모두들 산을 내려온 때가 하오 4시 반쯤이었다. 뒤에 남은 일꾼들이 봉분을 ‘조선식’으로 둥글고 덩실하게 짓고 떼를 잘 입혀 그 무덤을 완성한 줄로 알고 있다. 그런 무덤에 잠들기를 바란 사람이 고인 한창기 씨였다.
* 이 글은 1997년 3월 <샘이 깊은 물> 발행인 한창기 씨의 부음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기사다. 당시 편집 주간인 설호정 씨가 쓴 기사를 발췌,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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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안진현 기자 캘리그래피 강병인 어시스턴트 최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