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5 인생 2막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란 늘 쉽지 않습니다. 가족이 있는 주부에게도, 자신의 일에 매진하는 독신 여성에게도 그 도전은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2012년<행복>에서는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30~40대 여성을 응원합니다. 가열찬 용기로 인생 2막을 연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라디오 방송작가 일을 그만둔 지 2주 만에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두 딸아이의 손을 잡고 도착해 매트리스도 없이 한국에서 챙겨간 홑이불 하나로 시작했지요. 인터넷을 설치하고, 은행 계좌를 열고, 아이들의 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아무 연고 없이 시작한 영국 생활은 정원사의 하루처럼 쉼 없이 꾹꾹 채워진 나날이었습니다. 오로지 공부를 향해 달렸지만, 돌이켜 보면 늘 흥미진진하고 내면적으로 충만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마감 시간에 맞춰 기계처럼 원고를 쏟아내느라 바늘처럼 꼿꼿하고 뾰족하던 7년 전 제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왼쪽) 영국을 대표하는 인기 정원사 베스샤토 씨와 그녀의 정원에서.
내가 더 나아질 미래가 보이는가
방송작가는 우연히 시작했습니다. 대학 졸업반 때 잠시 근무한 출판사에서 담당한 책의 필자가 라디오 방송작가였지요. 그를 통해 ‘라디오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SBS 으로 데뷔했으나, 영화를 바탕으로 한 전문 지식이 많이 필요했기에 쉽지 않았습니다. 동료와의 갈등도 이어졌습니다. 결국 일을 잠시 쉬기로 결정했고, 그사이 결혼해 첫째 딸 수빈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돌이 될 즈음 다시 펜을 잡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라디오 방송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달렸습니다. 분초를 다투는 마감과의 전쟁 속에서 방송국 시계를 숨 가쁘게 좇으며 청취자를 울리고 웃기는 일에 매달렸지요. 일하는 사이 둘째 딸 형빈이도 낳았습니다. <트로트 가요 앨범>에 이어 <지금은 라디오 시대>까지, 그렇게 16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방송작가로서 일이 싫어서 유학을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스스로의 발전에 대한 고민이 컸다고나 할까요. 여느 직업처럼 승진도 없고, 사실상 업무에 큰 변화가 없는 것이 방송작가입니다. ‘10년이 지나도 오늘과 다르지 않겠구나. 삶의 평행선을 걸을 뿐, 더 이상 발전하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직업적으로, 개인적으로 미래의 그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클래식 프로그램부터 시사 프로그램까지 16년간 방송작가로서 하고 싶은 일은 거의 다 했습니다. 무엇보다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작은 실수를 참지 못하고, 사소한 것들을 용서할 수 없어 괴로워하고, 불쑥불쑥 찾아오는 조급증으로 늘 불안해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를 평온하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준 것이 앞마당의 소박한 정원이었습니다. 그 정원에서 지극한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언제나 말합니다. 그것이 영국으로까지 나를 떠나게 한 진짜 이유라고.
두 딸과 함께 도착한 영국
제 나이 서른다섯일 때 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다음 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허망하게 부모님을 일찍 떠나보내니, 인생 전반에 대한 깊은 성찰이 뒤 따랐습니다. ‘삶이 언젠가 내 뒤통수를 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몇 년 동안 마음의 몸살을 앓던 저는 어느 날 드디어 유학을 결정하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유학이 아니면 방송작가라는 직업의 끈을 철저하게 단절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제 심신이 많이 지쳤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인지 “갔다 오는 것이 좋겠다”며 제 결정을 받아들였죠. 단 한 번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절대적 신뢰를 준 남편에게 늘 고마울 뿐입니다. 방송을 그만두고 2주 만에 비행기에 올랐고, 아이들도 출국 2주 전에야 영국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영국에서 “아침도 챙겨주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반갑게 맞아줄게!” 하고 큰소리쳤으나 실은 한 번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과제를 하느라 새벽 5시가 되어야 잠이 들곤 했으니까요. ‘일하는 엄마’ 아래 독립적으로 자란 아이들은 걱정과는 달리 저보다 훨씬 빨리 영국 생활에 적응했습니다. 투덜대면서도 자매가 의지하며 아침을 챙겨 먹고, 오히려 엄마를 걱정하고, 영국의 삶을 좋아했습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남편은 방학이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 달 이상 영국에서 지내다 가곤 했습니다. 항상 컴퓨터를 켜놓아 한국에 있을 때보다 속 깊은 대화를 더 많이 나눈 것 같습니다.
(왼쪽) 오가든스 갤러리에서 전시중인 화가 안나영 씨 정원 그림 앞에서
특별 채용으로 학교에 입학하다
삶의 갈래에서 고민하고 있었을 때 정원 공부와 더불어 드라마 작업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드라마는 한 번쯤은 쓰고 싶은 영역이었어요. 하지만 시도하려고 하면 늘 문제가 발생해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유학은 정반대였지요. 누군가 등을 떠밀 듯 서두르지 않아도 길이 열렸습니다. 시작은 인터넷 검색이었습니다. 정원 문화가 발달한 나라답게 영국 가든 관련 학교 리스트가 가득했고, 그중 한 학교의 인터내셔널 지원 담당자 메일 주소를 확인해 무작정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바로 답장이 왔습니다. 학교 관계자가 아시아를 방문하는데, 한국에 들를 테니 한번 만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요! 영어도 잘 못하고, 영어 평가 성적을 받아올 자신도 없고, 학원에 갈 시간도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관계자는 제가 준비한 포트폴리오를 영국으로 가져가 담당 교수에게 보이겠다고 하더군요. 포트폴리오는 가든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유, 직접 디자인한 가든 드로잉 등이었습니다. 저는 드로잉을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집 앞마당을 그렸을 뿐이었죠. 학교에서 3개월의 어학 코스 이수를 조건으로 입학을 허가했습니다. 포트폴리오를 이렇게 꼼꼼하게 준비한 학생이 이전에는 없었고, 영어로 제출한 편지가 좋은 평가를 받은 까닭입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주는 호기심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공부도, 육아도 모두 열 배
3년 학부 과정으로 입학했으나, 정원 이론 수업의 필요성을 느껴 1년 과정인 리틀 칼리지 가든 디자인 디플로마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업 자체가 이미 가든 디자인과 조경 업계에서 베테랑인 전문가가 듣는 코스였고, 저는 수업 과정을 따라가기 위해 혹독하게 달려야 했습니다. 영어 실력이 부족해 다른 학생은 세 시간이면 끝낼 수 있는 과제가 열 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무지했습니다. ‘포토샵(사진 수정 프로그램)’이 사진 현상소라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프로그램도, 언어도 공부해야 했으며 아이들 학교생활도 신경 써야 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종일 학교에서 수업 듣고, 수업이 끝나면 밤을 꼴딱 새우며 과제에 매달렸습니다. 영국에서는 쇠꼬리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인데, 저녁에 꼬리곰탕을 만들어놓으면 아이들은 알아서 아침을 챙겨 먹고 학교로 가곤 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 10년은 산 것 같더군요. 하지만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내가 이곳에 왜 왔을까?’라고 의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힘들면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지,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디플로마 코스를 마치고 1년간 로열 보태닉 큐 가든스에서 인턴십 과정을 거치니, 학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에식스 대학의 조경 마스터 과정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치열하게 공부한 결과 1년이라는 시간을 선물로 받은 것이지요. 영어 공부부터 시작한 아줌마가 영국에서 ‘초스피드’ 석사를 거쳐 이제 박사 과정에 있으니 저 자신도 놀랍습니다.
(왼쪽) 공예가 전익준 씨와 협업으로 완성한 도시인을 위한 정원 작업 공간. 정원용품을 실용적으로 수납할 수 있는 철제 기구를 두었고, 그 앞에는 간단한 정원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알루미늄 소재 테이블을 설치했다.
(오른쪽) 오가든스 앞 나무를 둘러싼 작은 정원에 오경아 씨가 팬지를 심고 있다.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깔의 팬지꽃이 봄바람에 부드럽게 살랑거린다.
도심 속 정원을 꿈꾼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부터 제 목표는 언제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고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늘 ‘어떻게?’ ‘무엇으로?’라는 질문이 뒷덜미를 잡았습니다. 박사 과정의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그 질문이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보다 새로운 시도로 바꾸고자 합니다. 내가 왜 정원 디자인 공부를 위해 영국으로 떠났는지를 생각하니 답이 보이더군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떠났으니, 돌아와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공예 작가들의 정원 설계 작품을 전시하는 오가든스 갤러리를 지속적으로 운영해 도시인이 꿈꿀 수 있는 가든 아이템을 제안하는 것이 그 물음에 대한 첫 대답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제2의 오가든스를 만들 계획입니다. 정원은 멀리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늘 존재해야 합니다. 빌딩 밀집 구역에 파고들어 도심 속 정원을 일상화하는 것. 그 구심점이 오가든스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집 앞마당에서 시작한 식물 공부가 영국 유학을 이루게 했고, 가든 디자이너로서 두 번째 인생을 열어주었습니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즐겨 찾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며 정주하는 삶도 꿈꿔봅니다. 이렇게저의 인생 2막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
인생 2막을 연 선배 오경아 씨가 말하는 세 가지 조언
내가 가야 하는 일을 안다면 그 길을 걸어라 새로운 인생을 목표로 삼은 사람 중 사회 경험 부족으로 섣불리 용기 내기 두려워하는 이가 많다. 식물도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초보자다. 유학 생활 동안 내 딸들은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배웠다. 스스로에게, 자식에게, 남편에게 보다 대범해질 필요가 있다.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가족이 반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꿈꾸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한 발짝 나아가라. 내가 가야 하는 일을 아는 것과 그 길을 직접 걷는 것은 다르다.
마음을 온전하게 주어라 어떤 목표를 향해 도전했을 때 결과는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다. ‘내가 온전하게 이 일에 몰두했는가?’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했는가?’ 자문하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결과와 상관없이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않다면 그것은 나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가든 디자인을 할 때 늘 생각한다. 이 정원이 이곳에 사는 사람에게 정말 좋은 공간이 되어, 그들이 궁극적으로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 그 진정으로 타자를 위한 마음이 아름다운 디자인을 완성한다. 애정을 갖고 대상을 대할 때 그 긍정의 기운은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법이다.
공부하고, 선택하고, 등록해라 가든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면 식물에 대한 공부를 먼저 해야 한다. 그다음으로 건축과 미술 공부도 필요하다. 가든 디자인은 건축과 미술과 식물에 대한 공부가 통합적으로 이뤄진 학문이다. 사전 조사를 통해 이 세 가지 영역을 들여다보고 내가 과연 이 학문에 적합한 사람인지 파악해야 한다. 다음에 할 일은 배울 장소를 찾는 것이다. 내가 영국에서 공부한 이유는 방송작가 일을 어떻게든 삶과 철저하게 분리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외로 갈 수 없는 상황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본인에게 맞는 국내 교육기관을 찾아라. 그리고 두 발로 걸어가 수강 등록을 해라.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