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풍이 젖가슴처럼 통통하게 달라붙은 4월, 산중에는 아직도 눈이 한가득입니다. 거룩한 이름 하나씩 단 설악의 골골마다 눈이 희끗희끗합니다. 그 골짜기 아래 점, 점, 점점이 불이 붙었네요. 겨우내 언 산허리를 녹이려 댕긴 봄불인가요. 아, 저 불, 꽃불이었군요. 진달래 꽃불이 자꾸만 추파를 던지며 발목을 잡습니다. 정신이 다 휘청할 지경이로군요. 그 풍경 안으로 두 사람이 불쑥 끼어듭니다. 마른 억새 사이를 아버지와 딸이 정답게 걷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니 금세 마음이 풀어헤쳐집니다.
설악산 아랫녘, 나무들의 병풍에 둘러싸인 곳에 김종학 화백이 살고 있습니다. 벌써 30여 년째라지요. 이곳에서 성실하고 참한 농사꾼처럼 마음을 닦고 그림을 그리며 삽니다. 가슴에도 꽃물이 배어들 듯한 봄여름 설악의 그림, 산맥의 뼈가 다 느껴지는 겨울 설악의 그림, 고적한 가을 설악의 그림까지 모두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풍랑의 세계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들어온 설악산에서 그는 예술의 의미 그리고 생의 의미를 찾았답니다.
“1979년에 내가 이혼을 했어요. 서울대 나왔으니 잘나가는 작가여야 하는데 무명 생활을 오래 하지, 돈은 못 벌지… 그만 이혼을 당한 거야. 우리 형님이 날더러 설악산에 작은 집이 한 채 있으니 거기 내려가 있으래요. 설악산에 귀양 간 셈이지. 내가 살던 집을 떠나올 때 우리 딸이 그걸 봤어요. 얘가 국민학교 5학년이었는데 가게에서 칫솔이니 수건이니 그런 걸 사서 이삿짐 트럭에다 던져넣더라고. 그러고는 막 쫓아오다가 주저앉아 울어요.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죽 울면서 대관령까지 왔는데, 동해가 보이니까 마음이 좀 시원해지더라고. 여기 와서 외롭게 혼자 있는데, 그때 심수봉이 노래가 유행했어요. 딱 들으니 마음을 파고들더라고. 밤이면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듣든가, 심수봉이를 듣든가 하면서 별 보고 많이 울었다고. 별은 왜 그렇게 낮게 떠서 빛나는지…. 그해 겨울은 죽음을 생각할 만큼 괴로웠어요.” 아버지가 홍역처럼 생을 앓던 이야기 앞에서 딸은 자꾸 목구멍이 컥컥해집니다.
“아버지가 그때 자살을 생각하다가 ‘그래도 아빠인데 현주와 홍석이에게 아빠가 화가였다는 걸 알려줘야겠다, 좋은 그림 1백 장은 남기고 죽어야겠다, 그때까지 억지로라도 살자’ 하며 입술을 깨무셨대요. 그 순간 아빠는 자신을, 김종학이라는 예술가를 다 내려놓고 자식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가진 거예요. 그런 마음으로 산을 헤집고 다니는데 어느 날부턴가 달이 말을 걸고 달맞이꽃이 말을 걸더래요. 옛날엔 그 이야길 듣고 ‘아버지가 미쳤구나’ 했어요. 그런데 몇 년 전 제가 몸에 큰 병을 얻고는 다 내려놓고 청산도로 떠났어요. 보리밭 길을 걷는데 바람을 맞아 보리밭이 요동치며 춤을 춰요. 그 순간 무아지경이란 말처럼 자기가 없어지면서 마음이 행복해지는 거예요. 제가 바람도, 구름도 되는 것 같고 그냥 자연과 동화가 됐어요. 아버지도 그때 김종학이란 인간을 버리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 하나만 가지고 서니 자연이 아버지를 안아주지 않았나, 아플 때 자연이 절 치료해줬듯이 아버지에게도 자연이 치유제이지 않았나 싶어요.” 오래 떨어져 산 이들, 각자 주름 깊은 삶을 살며 서로의 생을 이해하기 시작한 겁니다.
김종학 화백과 딸이 걷던 그 길에서 바라다보이는 설악산은 바로 이 드로잉 작품처럼 장엄하고 기운 생동했다. 김종학 화백도 그러했다. ‘김종학’, 2001.
꽃보다 붉은 그림, 시작! “그 힘든 가을,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니까 할미꽃이 삭 올라오더라고. 이야, 이렇게 아름다운 걸 두고 왜 안 그렸나…. 그때까지 나는 추상미술에 관련돼 있었거든. 유명 작가가 안 돼도 좋으니 이제부터는 그리고 싶은 것만 그려보자, 해서 꽃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사실 그는 1960~1970년대 박서보·김창열·윤명로 작가와 교류하며 앵포르멜(현대 추상회화의 한 경향)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가 꽃을 그리기 시작한 1980 년대에도 무채색 위주의 추상회화가 ‘대세’였지요. 그가 꽃 그림을 그리자 친구들은 “타락했다”고 손가락질했고, “꽃 그림은 이발소 그림”이라며 대접도 해주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그는 설악산 들머리에 핀 달맞이꽃이 아름다워 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지요. 그렇게 그린 꽃 그림은 마음을 위로하는 묘한 힘이 있었고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그림을 한 벌로 갖추면 또 꽃의 종류별로 사고… 하는 식으로 컬렉션하는 이도 많다는군요. “자연이 이야기하는 걸 아버지가 고스란히 받아들이니까 그때부터 그림이 나온 것 같아요. 아버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눈물이 나요. 아버지가 그런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이 김종학 작가 그림을 걸어두면 애들이 잘된다, 치유가 된다, 이런 이야길 하는 것 같아요.” 망망대해에 홀로 있는 듯하던 그에게 그렁그렁하니 가슴팍을 비집고 찾아온 꽃들. 그때부터 김종학 화백은 줄곧 ‘꽃의 화가’ ‘설악산의 화가’란 별칭을 갖고 삽니다.
하이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간 편지 이들이 함께 산 시간은 채 1년도 되지 않습니다. 그도 자식들 연사에 어깃장 놓으며, 연애 걸 듯 알콩달콩 다투고 사랑하는 아빠로 살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처자식 다 떠나보내고 진물 나는 삶을 살다 가끔씩 자식을 만나면 미안함에, 기쁨에 안절부절못하던 아버지입니다. 못다 한 부정父情을 편지에 꾹꾹 눌러 담아 국제우편으로 부치던. “사랑하는 홍석아, 아버지는 그림밖에 그릴 줄 몰라 미술대학을 나와 고생하다가 너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고, 현주와 홍석이를 낳아 길렀지. 하지만 돌이켜 보면 아버지가 네게 해준 일이 별로 없어 편지로나마 너와 대화하고 싶구나. 공부에 방해되지 않게 잠시 쉴 때 엽서라도 아니, 너의 수채화가 그려진 편지를 받았으면 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받은 아들딸의 마음을 편지로나마 달래며, 일찍 유학 간 아이들에게 당부와 염려의 말을 건네며. 그 편지엔 화선지에 곱게 그린 그림이 함께했습니다.
“영어로 Love & Hate라고 하죠? 아빠, 전 아빠의 옛날을 생각하면 많이 슬퍼요. 아빠가 옛날에 날 앉혀놓고 ‘얼굴’이란 노랠 부르게 하셨잖아. 그런 거라든지 아빠가 술 많이 드시던 거, 그런 기억밖에 없으니 아빠가 마냥 미웠지. 제가 늘상 보던 아빠는 슬픈 아빠, 무서운 아빠, 말 없는 아빠였잖아요. 처음 아빠의 편지가 미국에 날아왔을 땐 별다른 느낌이 없었어요. 그런데 편지가 계속되면서 1년도 채 같이 살지 못한 부녀가 처음 대화란 걸 시작한 거예요. 제가 열다섯 살 때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1백50통 가까운 편지를 받았어요.” “내가 그림 다음에 신경 쓴 게 얘한테 편지 쓰는 거였어요. 얘도 나만큼 공허할 테니 마음을 붙들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얘가 미술에 소질이 있으니 아버지로서, 동료로서 얘한테 교훈 줄 거… 여러 가지를 편지에 쏟아부었어요.”
산속 작은 집에서 홀로 가난과 고독의 먼지 닦아내던 아버지는 그 생의 쓸쓸함도, 기쁨도 편지에 담아 딸 현주에게, 아들 홍석에게 띄웠습니다. 말할 기회조차 없던 자신의 이야기들, 평양에서 보낸 유년, 가난에 힘들었던 학창 시절,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전업 작가의 평범한 하루 등을 편지에 썼습니다. 미술학도인 딸과 함께 가고 싶은 전람회를 적어 보내기도, “그림은 많이 그려야 해. 양에서 질을 찾아야 해”라며 딸을 독려하기도, 비슷한 시기에 찾아온 슬럼프를 함께 겪으며 “실패해도 내 딸, 성공해도 내 딸”이라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내달부터 네 통장으로 돈을 보낼게. 아버지는 이제야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 같다”며 기뻐하기도, “그림이 잘 팔려 고민이야. 잘 팔릴 때 조심해야 한다. 미술은 큰길”이라고 스스로 다잡기도, 화랑의 독촉 전화와 이미 약속된 전람회에 둘러싸인 자신이 “적국에 잡힌 포로” 같다며 무명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무명 화가라도 아빠를 사랑해요”라고 쓴 딸의 편지에 눈물 쏟기도, 딸의 답장이 뜸하면 “편지에 자주 회답 못하는 것을 보니 예일 대학은 문제없겠다”며 귀여운 협박을 담기도 했고요. “그렇게 편지가 한 통씩 더해지면서 ‘아, 우리 아빠는 철부지 딸이 원하는 아빠가 아니라 화가구나, 정말 좋은 예술가구나’ 하고 아버지의 인생 자체를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이 이야기를 듣는 아버지의 우묵한 눈썹 사이로 웃음이 배어 나옵니다.
“그래도 그땐 아버지도 밉고 엄마도 미웠어요. 당시만 해도 이혼한 사람이 많지 않을 때라 부모가 이혼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고,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 갔거든요. 제 감정이 ‘hate’에서 ‘love’로 바뀌기까지 편지도 편지지만 아빠의 은근한 사랑이 컸죠. 언젠가 눈이 굉장히 많이 온 겨울에 제가 설악산에 왔는데, 아빠가 밖으로 나오래요. 아빠가 마냥 미운데 그 추위에 밖으로 나오기까지 하라니요. 아빠가 억지로 저를 끌고 개울가로 갔는데, 세상에! 하늘 빼놓고는 세상이 전부 흰색으로 덮여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도 그게 천국 가는 길 같았어요. 아빠가 이걸 보여주고 싶었구나 생각하니 뭉클했어요. 그러면서도 발이 빠진다고 짜증을 내니까 아빠가 절 업으셨어요. 적잖이 무거운 초등학교 5학년짜리 딸을 업고 눈구덩이를 밟으며 개울가를 걸으시는데, 전 그 등 뒤에서 ‘아빠가 날 사랑하시는구나. 내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지만, 표현은 안 하지만 날 사랑하시는구나’ 느꼈어요.” 어쩌면 그 무심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의 모습은 자칫 헤프게 터져 나올 사랑을 단속하기 위한 것 아니었을까요. 그 이야길 들으며 갑자기 우리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작살 같은 말을 인정사정없이 찔러대는 딸 앞에서 태아처럼 리모컨을 꼭 쥔 채 웅크리고 잠든 아버지, 이불 덮어주러 온 딸년 때문에 일부러 코를 고는 우리 아버지. 자꾸 생각나서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돌거립니다.
“예술은 똥! 신체가 튼튼하면 똥도 굵고, 신체가 엉망이면 설사를 하게 되지. 그래서 정신은 예술의 똥이다.” _김종학 화백이 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김종학 화백의 그림 속 꽃은 사실적으로 피는 꽃이 아니라 화면 위에서 다시 구조적으로 피어나는 꽃이다. 그는 “자연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구상한다”는 기막힌 문장으로 이를 설명했다.
‘겨울 바다’, 캔버스에 유채, 117.4×258.5cm, 2006
5월 1일부터 열리는 전시 <김종학의 다정多情>에서 만날 작품 ‘설악’, 캔버스에 유채, 17.9×25.8cm, 2011
낙엽이 바람 타고 떨어지듯 그렇게 서로의 맘속 깊은 동굴을 들여다보며 아버지와 딸은 평범한 부녀의 정을 되찾았습니다. 그사이 김종학 화백은 새롭게 가정을 꾸렸고,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기작가가 됐습니다. 미술을 전공하고 큐레이터로 일하던 딸은 지금 미국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충일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 제 소망은, 아버지가 좋은 작가로 잘 늙어가셨으면 하는 거예요. 아직도 아버지는 새벽부터 밤중까지 작업실에서 보내요. ‘으악’ 하고 놀랄 작품 하나를 그리기 위해 거의 똑같은 그림을 1백 장 이상 그려요. 아버지가 그림 그릴 때 보면 아버지 자신이 그림 같아요. 그림과 자신이 하나 된 상태, 바로 해탈의 경지에 있는 것 같아요. 지켜보는 제 가슴까지 떨려요. 그걸 보며 전 ‘아티스트 스스로 아트가 아니면 제대로 된 아트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아버지를 ‘아트’라고 부르는 딸을 둔 이 사람. 홍안에 소년의 미소를 물고 이야기합니다. “화 가는 육십부터, 시인은 칠십부터라고요. 인생 좀 보일 때부터.”
얼마 전부터 딸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아버지 일을 돕고 있습니다. “제가 아프고 나서 죽음이 생의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는걸 알았어요. 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창조물이라는 거죠. 언젠가 제가 창밖을 바라보는데 나뭇가지가 너무 아름답게, 새가 글라이딩하듯이 떨어지더라고요. 저게 무거우면 쿵 떨어질 텐데 가벼우니까 저렇게 아름답게 떨어지는구나 싶었어요. ‘아버지, 우리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좀 가벼워져요. 낙엽이 바람 타고 떨어지듯 마무리를 하면 얼마나 좋아요’ 하고 말씀드렸지요. 제가 한국에 CHK 아트라는 회사를 차리고 아버지 일을 돕는 건 뭘 쌓아 올리는 게 아니라 있는 걸 정리한다는 의미예요. 워낙 유명한 작가이다 보니 방해꾼도 많았어요. 큐레이터로서, 기획자로서 제가 봤을 때 아버지는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는 좋은 작가인데, 우리가 ‘예쁜 꽃 그리는 화가’ ‘설악산의 작가’라는 테두리를 쳐놓고 그 안에서 못 나오게 한 것 같았어요. 그러니 이제 아버지가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게 내가 잔가지를 쳐야겠구나 생각하고 화랑 일, 골동(김종학 화백은 골동품 수집가로 유명하다. 목기와 불교 공예품 3백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석물 등 아버지의 남은 수집품도 정리해 어딘가에 기증할 계획이다) 등 전체적인 윤곽을 정리하고 있어요.”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딸은 아버지가 쓴 편지를 엮어 책으로 펴낼 예정입니다. 사람들이 김종학 화백을 그림값 높은 작가로만이 아니라 이렇게 인간적인 사람으로 기억하기를, 그러니 지금부터는 멀찌감치 떨어져 자유를 선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또 설악산 입구에 아버지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짓기 위해, 작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독립 영화 같은 미술관을 짓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어릴 때부터 인생의 쓰라림도 많던 우리 딸이 이렇게 잘 커서 날 도우니 좋죠. 마흔 살 넘은 우리 딸이 하는 일이 꽤 믿음직스러워요.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거 다 맡겨줄 거예요. 1백 장의 좋은 그림을 그리고 죽기로 했으니 나는 열심히 그리기만 하면 되지. 이제 한 20점 그렸을까? 그때까지 우리 딸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가줬으면 좋겠어요.” “든든하세요, 아버지? 불안, 불안하시죠? 하하.”
머리에 서리꽃 곱게 핀 일흔여섯 살 아버지와 그 딸이 연애 걸 듯 알콩달콩 사랑하고 아끼는 모습에 눈이 아릿합니다. 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바람 속에서 누군가의 등에 업히던 순간의 냄새, 그 그리운 냄새가 훅 끼쳐옵니다. 업어준다는 것, 내 생의 무게를 누군가 견디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옛날 우리 아버지, 날 업었지요.
(오른쪽) 금방 내린 눈처럼 여백만 남은 도인 같기도 하고, 말랑말랑한 아이 같기도 하고,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집어삼킨 노인 같기도 한 김종학 화백. 이 표정에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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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협조 CHK 아트, 갤러리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