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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싶은 일을 하는 행복한 놈 - 최민식
최민식 씨는 우리 배우 중 드물게도 칸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두 번이나 밟았던 인사다. 그중 한 번은 2등에 해당하는 상을 받는 쾌거를 올렸다. 한국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였던 그가 요즘에는 영화 촬영장이나 극장이 아니라 거리에 있을 때가 더 많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려는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대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쥔 모습으로 거리에 앉아 있는 사진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전경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도 더러 볼 수 있었다. 그는 왜 거리로 나갔고, 왜 계속 거기에서 머물고 있는 것일까. 그는 ‘분노’ 때문에 나갔고, 사람들에게 ‘스크린쿼터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거리에 선다고 했다. 상식도 없고, 소통방식도 모르는 ‘참여정부’의 자세에 분개한다는 그는 수십 개의 대학을 찾아다니며 대학생과 토론했다. 기독교식으로 하면 ‘내 탓이오’의 마음가짐이고, 불교식으로 하면 ‘하심下心’의 자세다. 단언컨대, 반성이 없다면 절대 그리 할 수 없다. 그가 동의할지 모르지만, 최근 1년간 ‘인간 최민식’은 그의 생애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사랑은 상대가 힘들어할 때 옆에 있어주는 것

“요즘 시위를 하느라 건강이 많이 상했지요?”
“괜찮아요. 그런데 어제는 농민회 분들과 막걸리를 마셨더니 술이 안 깨네요.”
“건강 진단은 받아보시나요?”
“전혀 안 하고 있죠.”
“열심히 시위하려면 건강 진단도 받아가면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겁이 나서 못해요. 저는 주로 자가 진단을 해요. 딱 느낌이 올 때가 있어요. 아, 이번에는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야 되겠다 싶을 때가 있죠. 사람의 몸에는 자연 치유력이 있거든요. 마음과 몸은 거짓말을 못해요. 그러니까 몸에 이상이 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죠.”
최민식 씨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집에서 좀 일찍 나왔더니 너무 이르게 도착했다고 했다. 1차로 커피를 마시며 어제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차 긴장을 푸는 시간이었다. 용감무쌍하고 기관차 같은 추진력을 가진 ‘천하의 최민식’도 무서워하는 게 있다니,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건강에 대해 아주 무심한 편은 아니어서 민간요법에 대해서는 척척 알려주는 박사급이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동의보감’이라고 부른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투사가 되었으니, 부인께서 걱정 많이 하시겠어요?”
“짧은 시간에 동안 주위 환경이 달라졌으니까 집사람이 우울해하고 속상해했어요. 제가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설득하니까 수긍을 해주더라고요.”
 어느 부인인들 가만히 있겠는가. 굳이 ‘당신’이 아니어도 될 일인 것 같은데 앞장서서 일하다가 듣지 않아도 될 비난까지 듣는 남편을 보고 속상해하지 않는 부인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부창부수라고, 이제 그의 아내는 남편의 뜻을 존중하고 이해해준다고 한다.
“두 분은 어떻게 사시는지?”
“사명감처럼, 같이 사는 거죠. (부부는) 같이 의지하고 도와주고 더불어 같이 사는 사람이죠. 친구처럼 서로 걱정해주고 보완해주고 나누고 살아요. 먹여 살려야 된다는 압박감도, 결혼 생활에 대한 부담감도 없어요.”
“사명감이요?”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평소 어떤 남편이려고 노력하시나요? ”
“(쑥스러워 하며) 있는 그대로 사는 건데,(웃음) 좀 더 배려해주려고 해요. 집밖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집안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려고 해요. 그러면 아무 문제 없어요.”
“2세 계획은요?”
“정해놓은 것은 없어요. 아이가 있어 좋은 점도 있겠지만 아직은 필요성을 못 느껴요. 저도 나이가 있고, 집사람도 나이가 있으니까 이제는 자연스럽게 가져야겠죠. 그러데 저는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을 못 봐요. 우는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해요. <격몽요결>에 소개되어 있는 양육법을 보면 애들은 때려서 엄하게 키워야 한다고 써 있거든요.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그러죠. ‘나아서 키워봐, 그렇게 되나’ 라고요.”(웃음)
“부인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하시나요?”
“그게 서양식 표현이에요. 원래 우리만의 고유한 정서와 특유의 멋이 있어요. 맛이 있어요. 방식이 다르죠. 사랑은 고귀하고 어렵고 가치 있는 것이에요. 저희 아버지 세대들은 평소에는 어머니에게 살갑지 않다가도 감기 걸려 약 먹고 누워 계시면 보이지 않게 나가셔서 아무 말 않고 연탄불을 갈아주셨어요. 속으로 깊으신 거죠.”
“그래도 여자들은 사랑한다는 말 듣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벤트에 능한데, 이벤트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처럼 제가 힘들고 외롭고 고통받을 때, 제 아내가 제 곁에 있어주는 것처럼 사랑은 그 사람이 필요로 할 때 도망가지 않고 옆에 있어주는 거예요.”
그의 명작 <파이란>, 영화 속의 강재는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 파이란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도 몰랐다. 그녀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강재가 바닷가에서 목 놓아 울었던 것은 그녀 곁에 있어주지 못했음을 자책하는 울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재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가 우는 이유를 모른다. 그리고 옆 사람에게 묻는다. “왜 울어?”

못난 사람이 좋다
그는 영화 속 인물을 온몸으로 이해하고 뼛속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관찰력과 해석 능력은 이미 몸에 밴 것이어서 어떤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일면만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없다. 1면, 2면, 3면 등 여러 가지 면모를 살핀 뒤 감싸 안는다. 그의 최근작인 영화 <주먹이 운다>의 경우 사업에 실패한 올림픽 메달리스트 복서 태식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세상과 가족 그리고 자신을 불신하던 인물이 어떻게 위기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고 이해했을까?
“아주 이기적인 발상인데, ‘내’ 실체를 깨닫는 거예요. 작품 분석할 때 류승완 감독이나 스태프들은 ‘아들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했지만 저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했어요. 아들과 가족은 부차적인 문제예요. 그는 ‘내’가 살아 있음을 자신에게 보여주겠다는 데 주안점을 두었어요. 사람에게는 원래 각각 갖고 태어나는 인성이 있는데 (인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의 (귀한) 인성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본성이라고 할 수도 있죠.”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지요?”
“인터뷰 때마다 말씀드리는 게, 작품을 선택하는 근간이 되는 것은 연민이라는 거예요. 사람에 대한 연민, 사람에 대한 애정이죠. 인간마다 숙명적인 결함이 있잖아요. 저는 그것도 선함이라고 보고, 또 딱 까놓고 보면 나쁜 사람은 없어요.


최민식 씨는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해 연극무대 에서 기본을 다졌다. 영화 <구로 아리랑>(1989)과 TV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 출연하며 영역을 넓혔다. 대중들이 그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기 시작한 것은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춘식 역을 연기하면서부터. 이후 침잠했던 그는 <쉬리>(1999) <해피엔드>(1999)<취화선>(2001) <파이란>(2001)에 출연하며 입지를 공고히 했다. 지금까지의 출연작 중 최고 화제작은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은 <올드보이>(2005). 위 사진은 류승범 씨와 공연한 근작 <주먹이 운다>(2005)의 스틸.


(한미FTA체결 지원위원장인) 한덕수 씨와도(웃음) 소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하면 그 사람 나름대로 결함이 있을 거란 말이에요. (재경부 통상교섭본부장인) 김현종 씨도 까놓고 보면 아픔이 있을 거라고요.(웃음) 이건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을 떠나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인 거죠.”
“어떤 사람을 좋아하세요?”
“못난 사람을 좋아해요. 엉뚱하고, 좀 재밌어야 해요. 실수도 많이 하고 그러는 사람이 인간적이고 좋지 않아요? 좀 비어 있는 사람에게 정이 가죠. 후배들 중에도 ‘형, 나,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데’ 하며 괴로워서 울고불고 하는 놈들에게 정이 가요. ‘나는 지금 걔랑 결혼하고 싶은데 돈도 없고’ 하면서 어눌하게 말하는 애들 있잖아요. 그집 앞에서 기다리는 그런 애들이 참 순수해요. 그리고 설사 논란이 있다고 해도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후배들이 연기도 잘해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깊고 넓다
그는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한다. 하긴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사람 싫어하는 경우 없고, 사람 좋아하는 사람치고 술 싫어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는 술은 가리지 않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호오好惡가 명확하다. 미리 계산하고 재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별로 안 좋아하고, 인간적이면서 정직한 사람을 좋아한다. 여자를 사귈 때부터 일을 하는 때까지, 계산부터 하고 보는 사람은 머리로 일을 하기 때문에 자기 경험이 좁고 자기 세계가 얕지만, 무엇이든 우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폭이 넓고 내면이 깊은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류승범 씨를 칭찬하시던데?”
“제가 승범이하고 <주먹이 운다>를 찍으면서 ‘너 방송에는 출연하지 마라’ 그랬더니 ‘선배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를) 느끼고 싶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보통 다른 후배 놈들은 “아, 예, 알겠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래서 제가 충격 먹었잖아요. 승범이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못 나온 놈이에요. 연기 교육은 받아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가치를 형성해가는 과정과 사고방식이 그 어느 배우들보다 제대로인 거예요. 가치를 형성해가는 과정이 너무나 제대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보통 신인배우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야 되는지 하는 거예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이렇게 잔머리를 굴리고 있어요. 그런 후배들이 하는 연기를 보면 다 똑같아요. 연기는 거짓말을 못하니까. 그런데 승범이는 연기를 잘해요. 영화 <사생결단> 보셨어요? 거기서 보면, 승범이가 연기를 참 잘해요. 서른 살이 넘고, 마흔 살이 되면 어떻게 변할까, 어떻게 진화할까, 궁금하게 만들어요.”
“배우로서, 업그레이드를 강조하시죠? 본인께서는 어떻게 업그레이드를 하시나요?”
“내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사람을 표현하고 사람을 연구해요. 심리학자나 정신과 교수들, 인류학자만 사람을 연구하는 건 아니에요. 배우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니까요. 사람을 표현하고 나아가 동물이나 무생물도 될 수 있어요. 배우로서 무대에 서거나 카메라 앞에 설 때의 표현영역은 전 우주를 아우르는 것이거든요. 매 순간을 진하게 부딪치면 뭔가를 느끼게 돼요. 그때의 느낌은 옳고 그름을 떠난 것이죠.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할 때 사고의 폭이나 깊이가 업그레이드되는 것이죠.”
“액션 영화를 많이 하신 편이지요?”
“액션 영화는 이제 안 하죠.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못해요. 생각하고 몸하고 따로 놀아요. 이제는 근사한 여배우들하고 커피 마시는 영화 아니면 “죽여라!”(웃음) “쟤 잡아와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영화를 할 거예요.”(웃음)

스크린쿼터 73일은 있으나 마나 그의 갈색 눈망울은 화를 낼 때도 선하고 맑다. 가늘고 긴 속눈썹은 감동적으로 아름답다. 영화에서 주로 ‘센’ 역을 연기해 강한 인상이 남아 있어서 그렇지 연기하지 않을 때의 얼굴은 장난기로 가득하고 천진하다. 어휘가 거칠지만 그의 트레이드마크이고, 악의나 감정이 섞여 있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편하다. 그러면서 남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이해한다. 가식이 아니다. 상대의 의견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시위를 하실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신기하죠. 이 일을 후회할 수도 없지만 나중에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거예요. 설사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해도 이 자체로 의미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하는 점에서 제 스스로에게 떳떳해요.” “스크린쿼터가 이미 축소되었습니다만.”
“스크린쿼터 73일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에요. 극장들의 전산화가 안 돼 있으니까요.”
그가 동국대에서 스크린쿼터와 한미FTA에 관해 강연하는 현장에 간 적이 있다. 그는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갔는데 그중 인상 깊은 대목은 ‘스크린쿼터가 없어지면 제 철 밥통이 깨지는 게 아닙니다. 학생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스태프들이 알거지가 됩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 사람은 영화를 깊이 사랑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제가 하는 일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이죠.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영화계가 국가에 의해 이렇게 부당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거죠.”
“그러나 정부도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는 것일 테니, 하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은가요?”
“이해되는 점들은 있죠. 그러나 국가 정책을 입안한다면 보편성을 확보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한미FTA를 체결하지 않아도 우리는 잘살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세요?”
“아니죠. 꼭 그런 것은 아니죠. 헤비급은 헤비급과, 라이트급은 라이트급과 경기하는 것처럼 체급에 맞게 하자는 것이죠.”
“요즘같이 국제경쟁력이 강화되는 때에, 개방과 경쟁을 거부하는 것은 아닌가요?”
“아니에요. 어떻게 요즘 같은 시대에 개방을 거부하고 살 수 있겠어요? 다만 개방을 해야 한다면, 이해가 얽혀 있는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하고 수렴하는 게 선행되어야죠. 제가 이 과정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는 게, 정부의 소통 방식이에요. 아주 글러먹었어요. 그 어느 역대 정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악랄한 방법을 쓰고 있어요. 정말 영화를 내줌으로 해서 농업이 살고 공공서비스 분야가 굉장히 발전하는 계기가 되고, 또 많은 고용이 창출되고 국민들이 경제적 혜택을 누리게 되는 근거와 자료를 제시한다면 양보할 수도 있죠. 그런데 우리나라 최고의 브레인들이 모여 있다는 재경부에서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배우와 영화인들을 아주 파렴치한으로 매도했어요. 영화를 문화적 자산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소비나 일삼고 사치와 허영을 즐기는 집단으로 매도했어요.”
“증오는 사랑의 왜곡된 방식이라는데,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를 사랑하시나 봐요?”
“굉장히 믿었죠. 참여정부는 다를 줄 알았어요. 시간이 좀 오래 걸리더라도 대화로 설득하고, 고도의 협상력을 발휘할 줄 알았죠.” “어떻게 하는 것이 소통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이해를 해야죠. 일단,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해야죠. 어떤 감정이나 사견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죠.”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에 동참하게 된 까닭은요?”
“분노예요. 분노. 우리와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4대 선결조건을 맺은 것도 화나지만, 배우를 모욕하는 것에도 화가 났어요.”
“반년 넘게 스크린쿼터 사수 활동에 동참하는 동안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번민하는 순간들이 있었겠지요?”
“패배주의 성향의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 ‘내가 외친다고 바뀌어질까?’ 또는 ‘어차피 FTA는 대세야’…. 내 안에 있는 악마의 유혹이 왜 없었겠어요. 어떤 역사를 봐도, 국가 권력에 의해서 자행된 정책이나 잘못이 국민들의 반대로 고쳐지거나 시정된 예가 거의 없잖아요. 그러니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생각을 왜 안 했겠어요. 그럴 때마다 (생각의 결론은)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 떳떳하자는 것이었어요. 사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자화자찬일 수도 있는데, 나 자신에 대해 ‘아직 덜 썩었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어요. 제가 올해 마흔 다섯인데, 어떻게 해야 세상을 영악하게 사는지 정도는 알고 있거든요.”
가장 중요한 자산은 ‘나’의 경험 출산을 한 번 할 때마다 여성들의 몸은 해체되었다가 재구성된다고 한다. 몸의 작은 마디까지도 다 열렸다가 닫힌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출산에 대해 다시 태어나는 것과도 같다고 이야기한다. 육체가 출산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한다면, 정신은 무엇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될까. 갑자기 가세가 기운다든지, 사랑하는 연인에게 차이거나, 몸이 심각하게 아픈 위기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련을 통해 사람의 정신은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민식 씨를 만나기 전, 그에게는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이 ‘출산’에 준하는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큰 변화는 없어요. 시작하기 전에 ‘FTA가 뭔가, 정부에서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등등 골백번도 더 생각했고, ‘내가 뭘 모르고 이러는 것은 아닌지’ 하며 스스로에 대해서도 많이 점검해보았어요. 저라고 왜 제 직업상 생길 수 있는 손해에 대해 고려해보지 않았겠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손해가 크다 하더라도) 제가 가만히 있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어요.”
“이제는 작품 활동으로 돌아가셔야 하지 않나요?”
“동료와 후배들도 ‘형, 이제 작품 해야지’ ‘이제 그만해라’ 하는 이야기를 해요. 원래 놀던 동네가 아닌 삭막한 동네에서 싸우고 있으니까요. 저도 작품을 하고 싶죠. 그래도 지금 제가 보내고 있는 시기를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배우들에게는 작품을 하는 시기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하지 않는 시간은 더 중요하니까요.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은 자신의 경험이거든요. 지금 저의 모습이 누구에게 인정받거나 대가를 바라고 시작한 것은 아니니까요. ‘내가 하는 일이 옳다’라는 확신에 근거한 거예요.”
“지금의 당신을 있게 해준 계기는 무엇인가요?”
“대학교 때 졸업 공연 앞두고 술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급성폐렴으로 공연 펑크를 낸 적이 있어요. 그때 은사이신 안민수 선생님께서 ‘너는 앞으로 배우 할 생각 말아라’고 말씀하셨어요. 피아니스트나 무용수들은 자기 몸을 그렇게 아끼는데 어떻게 연극하는 놈들만 술 마시면서 자기 몸을 함부로 하느냐는 꾸짖음이셨죠. 그때 울었어요. 설움에 복받쳐서 울었는데요, 그때 선생님 말씀 말씀과 그 느낌이 제게는 귀감이 되었죠. ”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행복한 ‘놈’
“행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모르겠어요.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이죠. 같은 상황이라 해도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느끼고, 다른 어떤 사람은 불행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 제 친구들은 저한테 그래요. ‘임마, 너는 그래도 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행복한 놈 아니냐?’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행복한 놈이구나(웃음)’ 생각하죠. 물론 제 일에 고통이 없는 게 아니고, 애로사항들도 있지만 세상에 그렇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살아오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그런 것 물어보지 마세요.(웃음) 많았죠. (다 소중하기 때문에) 아마 죽을 때도, 죽기 전까지도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어떤 순간이었을까’ 하고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는 만나면 만날수록 더 멋지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으며 그의 의식 또한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8개월 넘게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을 펼쳐오면서 그는 열정적으로, 그리고 진심을 다해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었다. 그가 최고의 배우가 된 것도 이러한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매 순간 이런 자세로 임하며 성실하게 씨앗을 뿌렸을 것이므로 ‘최고의 배우’라는 타이틀을 수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의 열정을 보았고, 그의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무성의한 말 한마디와 불성실한 자세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도 생생하게 경험했다. 우리는 2006년의 그를 기억할 것이다. 거리에서 저항하던 그의 처절하고 통렬한 몸부림과 영화에 대한 깊은 사랑을.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