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서준호 씨, 김세미 씨, 윤세영 씨, 김나영 씨.
성북동은 사실 사무실이 있는 제 아지트입니다. 아지트 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골목길, 선잠단지길을 소개합니다. 선잠단지 先蠶壇址는 조선 성종 때 중국 왕비인 서능씨가 누에를 처음 친 자리로, 뽕나무가 잘 크고 좋은 실을 얻게 해달라고 빌었던 곳입니다. 잠업 蠶業을 주관하던 선잠단지는 현재 주택가 한구석에 터만 남아 있어요. 몇 그루의 뽕나무가 그날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겠지요.
선잠단지를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사거리 중앙에 교통섬이 하나 나옵니다. 차량의 주행을 제어하고 보행자가 길을 건너다 잠시 쉴 수 있도록 마련한 안전장치인데, 보도블록을 삼각형으로 쌓아 작은 섬 같아 교통섬이라 부른답니다.
근처에 성북초등학교와 수도원, 대사관저가 있어 어린아이들과 수사와 수녀님, 외국인이 교통섬에 모이는 특별한 풍경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교통섬을 지나 언덕길을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별장 성락원이 있습니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화려한 별장 대신 호젓하게 터만 남아 있어요. 교통섬을 둘러싼 갤러리 오뉴월, 모자 숍 두필로, 갤러리 이안재가 선잠단지길의 호시절을 다시 재현할 것입니다. 세 집이 단합해 앞으로 작품 전시도 열 계획이라니 더욱 기대가 됩니다.
(왼쪽) 비 오는 날 오후 교통섬 풍경.
한옥과 서양 주택이 공존하는 선잠단지길.
모자 숍 두필로 Due Filo
최시영 씨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오랜만에 찾은 손님인 줄 알고 무척 반가웠다는 윤세영 씨. 이 길에 숍을 연 지는 1년이 채 안 됐다. 올해 서른하나인 그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모자 유학’을 떠났다. 한국에서는 전문적으로 모자 디자인 교육을 하는 곳이 없었다고. 마돈나와 영국 왕실 공주의 모자를 맡고 있는 모자 디자이너 스티븐 존스 밑에서 모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4년간의 모자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이번엔 가방 공부를 하러 영국으로 다시 떠났다. 우리나라에서 모자 아이템 하나만으로는 숍을 차리기가 어려울거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고.
다시 돌아온 그는 모자도 팔고 가방도 파는 작은 가게를 오픈했다. 두필로는 ‘두 개의 실’이란 뜻으로 모자와 가방 두 가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업실 겸 숍이 필요하던 터라 번잡한 강남보다는 한적한 성북동 선잠단지길에 자리를 잡았다. 신상품 봄 모자부터 가방, 헤어밴드, 명함 지갑, 앞치마, 스카프까지 판다. 뭐든 모자 만들 듯 손으로 뚝딱뚝딱이다. 모자를 하나도 못 파는 날이 있지만 모자를 만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윤혜영 씨와 모자가 안 어울려 고민인 최시영 씨가 만났다.
1 마네킹이 두른 스카프는 두필로의 봄 신상품.
2 갤러리처럼 꾸민 두필로 쇼룸.
3,4 두필로의 주인장 윤세영 씨의 보물 재봉틀.
최시영 인적 드문 성북동 뒷길에 모자 숍이 하나 있기에 놀랐어요. 맞춤 제작해주는 건가요?
윤세영 네. 이 숍 안에 있는 모자는 모두 샘플이에요. 컬러와 소재를 선택할 수 있고 장식도 바꿔 달 수 있어요.
최시영 이곳에서는 꿈꾸던 모자가 현실이 되는군요. 사실 전 모자가 안 어울려서 잘 안 써요.
윤세영 어울리는 모자를 못 만난 거예요. 모자는 많이 써봐야 해요. 어울리는 모자를 찾는 과정이 필요하지요. 반대로 마음에 드는 모자를 고른 다음 거기에 맞춰 옷을 입고 헤어스타일을 바꿔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모자 하나가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주기도 하니까요.
최시영 그게 모자의 힘이군요. 자세히 보니 모자 안감이 참 예쁘네요.
윤세영 패브릭, 가죽 등 원단은 영국에서 수입해요. 안감은 직접 피부에 닿는 것이니 겉감만큼이나 신중히 골라요. 겉감보다 안감이 10배 비싼 모자도 있어요. 모자 틀은 프랑스 장인이 직접 만든 것들이에요.
최시영 작업실에 양은 냄비도 있고 라면도 보이네요?
윤세영 구석에 숨겨놨는데 보셨군요. 작업실에서 먹고 자기도 해요. 작업에 불붙기 시작하면 집에 가는 시간도 아깝거든요. 테이블 위에 매트를 한 장 깔고 누우면 침대나 마찬가지예요.
최시영 모자 만드는 게 그렇게 좋아요? 모자는 왜 써야 하는 건가요?
윤세영 모자를 쓴다는 건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늘어나는 거고, 아름다워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생기는 건데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요?
윤세영 씨의 말대로 모자는 나를, 내 일상을 조금 더 멋스럽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5월, 우리가 모자를 써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따가운 햇살이다. 성북동 나들이 길에 두필로에 잠시 들러보자. 안 사도 상관없으니 와서 실컷 써보라는 주인장 덕에 낯설던 모자가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올 봄에는 마음에 쏙 드는 모자를 만나게 될지도! 윤세영 씨가 모자를 만드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다.
갤러리 이안재 怡顔齋
2009년, 갤러리 이안재의 첫 시작은 갤러리 겸 카페였다. 카페에서 차와 함께 맥주, 와인을 팔았는데 하루는 지나가던 성북동 주민이 갤러리로 들어와 “아이들이 많은 동네예요. 이 골목에 술집 하나도 없는 거 아시지요?”라고 정중히 술 판매를 중단할 것을 부탁했다. 고마운 ‘참견’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티 테이블과 의자를 들어낸 후 그 자리에 그림을 더 걸어 넣었다. 그리고 지금은 성북동 사람들이 지나가다 편히 들르는 ‘동네 갤러리’가 되었다. 얼굴이 편안해지는 공간이라는 갤러리 이름 ‘이안재’처럼 말이다. 성북동에 사무실이 있는 최시영 씨도 이곳을 편안하게 들르는 한 사람이다. 멀리서 보고 작고 예쁜 카페인가 보다 했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제법 큰 갤러리였던 것.
커다란 창문이 프레임이 되어 갤러리 이안재를 그림처럼 담고 있다.
갤러리 이안재는 몽골, 카자흐스탄 등 문화적으로 소외된 국가의 전시를 주로 기획한다. 특히 몽골의 문화를 국내에 알리고, 국내 작가들의 몽골 활동을 지원하며 두 나라의 문화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만 하는 흔한 갤러리가 아니다.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더 넓은 의미의 문화와 예술을 선보이는 특별한 갤러리다. 이 ‘착한’ 갤러리의 큐레이터인 김나영 씨는 상업 갤러리에서 일하다 이곳으로 왔다. 전시관에 작품을 거는 도우미가 아닌, 문화와 예술을 대중에게 전하는 진짜 ‘도우미’가 된 것 같아 행복하단다. 소수민족 문화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가득한 그는 앞으로 갤러리 이안재를 통해 해보고 싶은 것이 많다. 6월, 갤러리에서 작품으로만 만난 몽골을 직접 가게 된 그와 오래전에 몽골을 다녀온 ‘몽골 선배’ 최시영 씨의 몽골 이야기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됐다. 마침, 갤러리 이안재에서는 <안녕하세요? 몽골리아>전시가 한창 열리는 중이었다.
1 갤러리 맞은편은 오래된 골목 그대로다.
2 세월이 묻어나는 돌계단과 기와집의 정겨운 풍경.
3 갤러리 이안재의 전시 공간.
4 작품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최시영 씨와 큐레이터 김나영 씨.
최시영 몽골의 작품들은 유난히 색깔이 진하고 선명한 것 같아요.
김나영 몽골인은 시력이 5.0, 8.0 정도로 굉장히 좋아요. 그러다 보니 색에도 민감하고 선명한 색을 좋아하는 편이지요.
최시영 몽골과 어떤 작업들을 하고 있나요?
김나영 세계 5대 축제 중 하나인 몽골의 유목 문화 축제인 ‘나담 축제’를 공동 기획하고 있어요. 한국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가서 축제 기간 동안 공연도 하고, 설치미술도 선보이고, 몽골 아이들에게 미술 교육도 해요.
최시영 몽골의 예술 수준은 어떤가요?
김나영 장르는 회화로 한정되어 있어요. 최근 조각을 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 미약해요. 갤러리가 하나 있는데 상업적으로 악용돼 아쉬운 부분도 있고요.
최시영 몽골에 갔을 때 몽골의 광활한 대자연에 압도당했어요. 몽골은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주는 굉장히 매력적인 곳이에요.
김나영 ‘아티스트 예술 캠프’를 통해 한국 아티스트가 몽골에 가서 작품 활동을 하며 몽골 아티스트와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어요.
최시영 이안재, 갤러리 맞아요? 몽골 문화 교류 사절단 그 이상이네요.
갤러리 이안재는 소수민족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갤러리로, 한 바퀴 둘러보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5월에는 베네수엘라 일러스트 작가들의 전시가 열린다니 가벼운 마음으로 가보자.
갤러리 오뉴월
아직 간판도 달지 않은 갤러리 오뉴월. 서준호 씨와 김범서 씨 그리고 홍일점 김세미 씨가 의기투합해 갤러리를 준비 중이다. 오뉴월은 호시절, 5월과 6월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셋의 이력을 잠시 살펴보자면, 서준호 씨는 미술이 론을 공부한 뒤 주로 전시기 획자로 일해왔고, 김범서 씨는 뒤늦게 경영학도의 길로 들어서 아직 학생이다. 김세미 씨는 미술 이론을 전공한 후 <아트앤컬처> 기자로 활동 중. ‘재밌는 미술 전시’를 보여주자는 데 세 사람은 이견이 없었다. 일단 미술이 재미있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래야 더 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6월 17일이 갤러리 오픈 날인데, 돼지머리를 가져다놓고 ‘고사 퍼포먼스’를 열 계획. 성북초등학교 어린이들은 물론 대사관저의 외국인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되지 않겠느냐며 신이 나 있다. 내년 5월과 6월에는 모자 숍과 갤러리 이안재와 작은 디자인 페스티벌을 해볼 생각이다. 테크놀로지와 미술의 결합, 뉴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겠다는 오뉴월은 갤러리의 벽, 바닥, 창문까지 모두 작가들의 작품 전시 공간으로 내줄 생각이다. 최시영 씨는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리창은 완전히 오픈할 것을 제안했다. 갤러리가 좁은 대신, 주변을 온통 오뉴월의 공간이라 생각하고 마음껏 즐기라고.
1 교통섬에 종을 단 설치미술 작품. 갤러리 안에서 줄을 당기면 종소리가 난다.
2 오뉴월의 젊은 대표 서준호(왼쪽) 씨와 김세미(오른쪽) 씨.
3 오픈 전 워크숍에 참여한 작가 림의 작품 ‘배산임니’.
4 작가 김경진 씨의 작품 ‘21C 도시 가족 관계 _4x4개의 이야기’.
최시영 비평이라는 건 뭔가요?
서준호 비평은 ‘과연 이 작품이 어떤 유효한 점이 있을까?’란 질문으로 시작해요. 대한민국에서 지금 이 시점에, 과연 어떤 의미를 주는 작품인지 봅니다.
최시영 그렇다면 어떤 비평이 좋은 비평인가요? 비평은 중요하잖아요. 누군가에게 기준이 되기도 하고 편견이 되기도 할 테니까.
서준호 공허한 이야기들, 손에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비평을 통해 작품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오히려 벗겨내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인간 스스로 내면을 돌아보는 기회를 주고 싶고요.
최시영 다른 갤러리와는 확실히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요.
김세미 아무래도 둘 다 미술판에 오래 있었으니 어떤 작업을 하든 소스가 풍부해요. 주변에 친한 작가들이라든가 작업을 도와줄 동기, 선후배라든지. 무엇보다 각자 그동안 키워온 안목이 새로운 전시를 기획하는 힘이 되겠죠.
서준호 그 힘으로 좋은 전시 만들어보겠습니다!
이날 아쉽게도 김범서 씨는 자리에 없었다. 갤러리 오픈을 앞두고 원래 돈줄을 책임지는 사람이 가장 바쁜 법. 선잠단지길의 교통섬을 무대로 기발하고 재밌는 전시를 선보일 갤러리 오뉴월 덕에 우리의 일상이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특히 매년 5월과 6월은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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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및 취재 협조 두필로(02-4150-6157), 갤러리이안재(02-743-3770), 갤러리 오뉴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