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 아내는 얼굴에 점을 찍고 나와 자신을 버린 남편을 처절히 복수한다. 영화 <친절한 금자 씨>에서 금자는 자신의 삶을 수렁에 빠트린 옛 애인에게 함무라비 처형을 능가하는 응징을 가한다. 이런 극단의 복수가 아닌, 우리 생활 속에서 일어날 법한 소심한 복수를 고 박완서 선생의 <친절한 복희 씨>에서 읽는다. 가난한 시골 처녀가 상경해
부잣집 유부남의 후처로 들어가 남들이 보기에는 온화한 노년을 맞으면서도, 복희 씨는 자신의 순결을 겁탈한 남편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평생 살아간다. 그러나 그 복수라는 것이 그저 소심하다. 화장실 뒤처리를 못해 자신의 손수발을 원하는 남편에게 비데를 설치해주고는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세상에 그런 편리한 장치가 있다는 걸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 했을걸. 용용 죽겠지…”라고 하는 식이다.
박완서 선생의 문학적 미덕이 리얼리즘이듯 세상의 부부는 저마다 배우자를 향해 소심한 복수를 꿈꾸고, 또 그 복수를 소소하게 펼쳐나간다. 외박한 남편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보따리를 싸들고 친정으로 달려가는 새댁의 복수, 냉랭한 표정과 입에 자물쇠 채우기로 집 안을 냉장고로 만들어버리는 주부의 복수, 술 마시고 온 남편에게 해장국을 생략하거나, 시부모님에게 일부러 냉담하거나, 일주일 내내 초원의 식탁을 만들어버리는 여자들의 복수. 이에 맞서는 남자들의 복수는 ‘땡깡 피는’ 아이처럼 유치하다. 젊어서는 ‘변기에 오줌 흘리기’ ‘양말 뒤집어서 벗어놓기’ 등으로 맞서다가 이후로는 자기가 돈 벌어주는 기계냐며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위협하고, 이렇게 자신을 홀대하면 바람을 피우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복수의 하이라이트는 여자들이 내뱉은 저주의 주문이다. “늙어서 보자!” 우리 증조할머니의 고조할머니 때부터 지금의 아내들에게까지 계승된 이 전통의 주문은 ‘네가 지금은 기운이 펄펄해서 여자 알기를 우습게 알지만 늙어서 수족 못 놀리는 때가 되면 너를 철저히 응징하리라’의 압축된 표현이다. 자신의 젊음을 여전히 과신하는 남자들은 늙어서 보자는 여자들의 주술에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마는데,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면 슬슬 저 주술의 상상 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늙은 내가 중풍에 걸려 휠체어에 앉아 있다. 부엌에서 할멈이 고기를 굽는다. 이게 얼마 만에 맡아보는 고기 냄새인가. (중략) 마비된 얼굴에도 좋아 죽겠는 미소가 저절로 번진다. (중략) 캬햐! 소주도 있구나. 그 상을 번쩍 들고 내 앞에 내려놓는 늙은 아내가 오늘은 유난히 예뻐 보인다. 쩝쩝 입맛을 다시는데, 할멈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마블링이 환상인 고기 한 점을 기름장에 콕 찍더니 자기 입으로 날름 가져간다. (중략) 원망에 가득한 나의 눈빛을 의식했음인가, 상추쌈에 터져버릴 것 같은 아내의 입속에서 분홍빛 혓바닥이 쏘옥 나오더니, ‘메롱’ 하고는 쏙 들어간다.”(<친절한 복희 씨> 중)
아아, 이런 상상은 지옥이다. 그러나 늙어서 보자는 복희 씨가 얼마나 많은 것인지 세간에는 이런 유머까지 등장했다. 40대 남편은 아내가 샤워할 때 무섭고(고개 숙인 남자의 비애), 50대 남편은 아내가 끓이는 곰국 냄새가 무섭고(장기간 여행을 떠나는 아내의 복수), 60대 남편은 이사 가자고 하면 무섭고(자기 버리고 이사 갈까 봐), 70대 남편은 등산 가자면 무섭고(산에다 자기를 버리고 올까 봐), 80대 남편은 아내가 목공소 갈 때가 무섭다고 한다(자기 관 짜러 가나 싶어서). 그러나 늙어서 보자고 하는 것은, 문학 속이든 현실 속이든 이루어질 수 없는 위협이다. 어차피 늙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악을 하며 싸우던 부부가 나이가 들면 웬만한 일에 발끈조차 하지 않는 것은 둘 다 기력이 쇠했고 누군가에 맞서는 것도 귀찮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것은 남편이 속을 썩일 때 ‘늙어서 보자’는 위협의 목적처럼 남편을 반성하게 하는 방법을 펼쳐 보이면 되는 것이다.
주변 유부남들에게 물었다. “부부 싸움 후 상대가 어떤 행동을 보일 때 미안했는가?” 한 남자가 대답했다. “홧김에 술 마시고 들어왔더니 아내가 아이랑 자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공연히 측은하더라.” 다른 남자가 대답했다. “화가 나서 집을 나와 반나절 후 들어갔더니 아내가 아이들과 평화롭게 케이크를 만들고 있더라. 그 평화가 너무 좋더라.” 또 다른 남자가 대답했다. “소리를 지르고 침실에 왔는데 한동안 아내가 안 들어와서 거실을 엿보니 묵주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나 자신이 한없이 작고 못나 보이더라.” 비록 이 설문이 과학적인 조사 방법이나 납득할 만한 표본 집단을 동원한 것은 아니더라도 사는 게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어느 남자도 아내가 히스테리컬하게 소리를 지른다거나, 아빠 닮았다는 이유로 아이를 잡는다거나 하는 아내에게 반성의 마음을 갖는다고 하지 않았다. 남자도 늙으면 생기는 감성은 측은지심 惻隱之心이다. 소리를 질러놓고 뒤돌아서서 미안하고, 흰머리 희끗 나는 아내가 애틋하고, 싸우고 나면 상대에 대한 원망보다 자신에 대한 책망이 더 커지는 것, 이것이 갑남을남들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아내들아, “늙으면 보자”는 협박 좀 거두시고 아이처럼 철없는 남편에게 엄숙한 양의 자애로움을 보여주시라. 어려서 엄마가 가장 무서웠을 때는 야단칠게 뻔한데 아무 말 하지 않고 밥상을 차려주던 엄마의 뒷모습이었다는 남자들의 이구동성에 귀를 기울여주시라.
글 윤용인(노매드 미디어&트래블 대표, www.nomad21.com, 트위터 @ddubuk) 캘리그래피 강병인